Ⅰ. 들어서며
2001. 12. 14
“경묵아... 너 합격한거 같다.”
합격자 명단이 대한매일신문에 공고되기 전날, 오후 늦게 야 친구에게서 이런 전화를 받았다. 난 거짓말하지 말라고 받아쳤다. 이 때쯤이면 유난히도 더웠던 2001년 8월 26일, 서울대에서 고생했던 응시생 모두들 자신의 당락 여부를 알만도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난 어이없게도 이렇게 친구에게서야 합격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듣게 되다니.
합격이란 것이 주는 기쁨과 환희에 비해, 이 순간은 정말이지 드라마틱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때, 난 대학 생활의 마지막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들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난 정말 발표일자를 망각한 채 가을을 보냈다. 이미 감정평가사 시험은 물 건너 간 일이라고 생각해서, 기업체에 취직, 인턴사원으로 근무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그만큼 합격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다음날, 난 출근길에 생전 처음으로 길거리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 보았고, 그제서야 합격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 날 부로 난 짧은 시간이나마 정들었던 회사와 이별을 고해야만 했고, 지금은...... 내가 자격이 있는 수험생이었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합격수기라는 것을 쓰고 있다.
거의 매달 ‘월간 감정평가사(구 부동산고시)’를 읽어왔지만, 솔직히 난 합격수기를 그다지 즐겨 읽지는 않았다. 학원에서 만나 동문수학하던 이들 중 대다수가 ‘부동산고시’를 받아들면 가장 먼저 합격수기란을 펼치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 했을 정도다.
합격수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켜 학습의욕을 고취시키는 효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수험생활에 대하여 기탄과 왜곡없이 밝힘으로써, 글을 읽는 수험생들이 자신의 공부 패턴과 비교, 가장 적합한 학습 방식을 찾아가도록 하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대학생 신분으로 감정평가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지금, 졸업 전에 합격한 나의 경험은 대학생들에게 특히 도움되는 간접경험이길 바란다.
Ⅱ. 수험생활의 시작
군에서 제대한 후 1년이란 황금같은 시간을 날려 버렸다. 복학해서 대학 3, 4년 동안 무엇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무슨 일을 할 지를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 기간의 성과라고는 “노는 것에 지쳐 공부할 마음이 절로 생긴 것” 외에는 없었다. 99년 3월 1일, 3학년으로 복학하기 위해 집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얼굴 보기 힘들었던 과 동기 친구들을 만났다. 1, 2학년 때 같이 당구장, 술집, 무도회장을 밥먹듯이 드나들었던 친구들. 학교 시험을 보면 누가 제일 빨리 답안지를 내고 퇴실하는 가로 내기하던 이 철없던 친구들이 모두 근엄한 고시생으로 변신해 있었다. 충격과 함께 고민이 물밀듯 밀려왔다.
우리 과 학생들이 고시를 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공인회계사 시험을 떠올린다. 내 친구들도 제대하고 나서 그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진작부터 패거리(?)를 구성하여 학교 도서관에서 수험 생활을 본격 시작했던 터였다. “왜 고시를 시작했습니까?” “친구들이 다 고시해서요...” 라고 대답한다면 누구라도 다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복학하고 나니 고시생으로 돌변해 있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미래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집안의 장남인 내가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기업체에 입사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기를 바라고 계셨다. 하지만, 이미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취업이라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해외에 나가 영어를 공부한 경험도 없고, 그 흔한 TOEIC 시험 한 번 쳐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취업에 대한 대비를 하느니, 차라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더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사람의 성향을 단순히 이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것은 약간 어폐가 있긴 하지만, 난 어릴 적부터 ‘LEADER’적 기질보다는 ’STAFF‘적인 기질이 다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STAFF‘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그러면, 왜 하필 공인회계사가 아닌 감정평가사였는가? 이것도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친구들 중에 감정평가사를 준비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감정평가사에 관하여 내게 조언해 준 사람도 없었고, 수험대책과 학습방법, 업계 전망에 대해서 설명해 준 사람도 없었다. 그저 주위의 친구들과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단지 고등학교 다닐 때 한국지리 과목을 열렬히 좋아했었다는 정도? 이렇게 엉뚱하다면 엉뚱한 계기로 감정평가사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건만, 혼자서 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2001년 8월 26일의 2차 시험장에서까지 나에게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Ⅲ. 2000. 1. 1~7. 2 1차 시험 준비
우리 집 근처인 해운대에는, 새천년의 시작이라며 올해 첫 일출을 보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날 밤부터 몰려들었고, 덕분에 해운대 일대의 교통은 하루종일 완전 불통이 되었다. 결국 이날 난 서울에 올라오는 기차를 놓쳐 버렸고, 새천년 첫날부터 단단히 액땜했다고 위로를 삼았다. 며칠 전,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4학년 진학을 않고 이번 학기를 휴학하겠다는 말씀을 어렵게 부모님께 드렸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당신들께선 날 믿으신다며, 너무도 순순히 허락해 주셨다. 난 최선을 다 하겠지만, 만약 내년 2차 시험에 떨어진다면 미련 없이 공부의 길을 접고 취직하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이 때 부모님께 드렸던 약속은 항상 내게 ‘기회는 한번 뿐이다’라는 자극과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부모님께 말씀 드린 다음날 아버지께선 근처 시립도서관에서 감정평가사가 ‘대체 뭐 하는 직업’인지를 꼼꼼히 찾아보셨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계 계절학기 수업을 듣는 일이었다. 군대가기 전인 1, 2학년 때엔 ‘노는 것이 미덕이다’라는 선배들의 말에 속아(?) 학점관리를 통 못했던 탓이다. 일단 결심을 한 이상, 감정평가사 시험준비가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은 자명한 것이었으나, “붙을 때까지” 몇 년이고 공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장래 취업을 대비해서 어느 정도의 학점관리는 필요했다. 학교 제 2캠퍼스가 있는 원주에서 계절학기 수업을 이수하고, 1월말에는 작년에 룸메이트였던 과 친구와 새로운 하숙집을 물색했다. 나는 고시생, 친구는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으로서의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옮긴 하숙집은 내게는 글자 그대로 ‘재앙’이었다.
새 하숙집은 학교 근처인 신촌에 있었다. 그런데, 개인주의적 성향이 대세인 요즘 하숙집과는 달리, 이틀이 멀다 하고 술 마시고 고스톱을 치는, ‘우리가 남이가?’ 분위기의 하숙집이었다. 룸메이트인 친구는 1년이나 나와 같이 아무 문제 없이 생활했고, 고시생이 된 나의 생활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 이 하숙집에 고시생이 들어온 것은 내가 처음이라는 주인 아주머니 말씀을 듣고는 어이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첫날 하숙집 선배가 내게 했던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너 고시한다며?” “예. 감정평가사 준비하는데요.” “어, 그래?...... 혹시 너네 집 보석상 하니?”
앞서 말한대로,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은 모두 ‘예비’ 공인회계사였다. 이 친구들은 작년 군 제대 후 이미 공부를 시작했던 놈들인 만큼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것도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 있었고, 올해 1차 합격을 내심 노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술 좋아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공부 시작한 이후로는 친구 생일 등 특별한 날이 아닌 한, 한 달에 한 번 술자리가 있을까 말까 했다. 대신, 나와 친구들은 게임을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모두들 심한 중독 증세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이틀에 한 번 꼴로 저녁 식사 후 바람 좀 쐰답시고 1~2시간 정도 PC방이나 오락실에 머무르는 정도였다.
고시 공부는 의외로 돈을 많이 잡아먹는다. 부모님께서 생활비를 전적으로 대 주시는 만큼, 책과 테이프 값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린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휴학 중에 가능하면서도 그리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그래서, 매일 점심, 저녁 식사 후 45분 정도 일하면 되는 학교 구내서점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고, 월 20시간 정도 자기가 편한 시간을 선택해 근무할 수 있는 도서관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도 했다. 아르바이트 장소가 서점, 도서관이었던 만큼 이동시간이 필요없었고, 또한 수험서적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아르바이트는 다음 해 봄까지 계속하였으며, 책값과 학원 수강료 등에 톡톡히 일익을 담당했다. 일산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잠깐 하기도 했지만, 이 일은 이동시간이 부담되어 곧 그만 두었다.
고시생의 주적(主適) 중 하나는 여자 문제다.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그 하숙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여학생을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난 내 나름대로는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시험이 100일도 안 남은 마당에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고, 시험공부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 때만큼은 내가 그 친구를 정말 좋아하긴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랑 잘 되었다면, 아마 난 1차 시험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덕분에 난 다음날 책상에 ‘不合格卽死’(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지만)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는, 1차 시험 전날까지 하루도 안 빼고 4시간만 자는 초강수를 두었다.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이다. 회계사 공부하는 친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가리켜 ‘독한 놈’이라고 불렀다.
Ⅳ. 1차 시험 공부방식과 교재
1월 마지막 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숙집 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최대한 일찍 일어나 하숙집을 빠져나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최대한 늦게 하숙집에 들어가는 방법을 썼다. 잠은 규칙적으로 6시간 정도 잤고, 하숙집에 일단 귀가한 후에는 책 냄새도 맡지 않았다. 대신 1차 시험일까지 4개월 여 밖에 남지 않았던 만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시간엔 철저하게 ‘기계’가 되기로 했다. 나는 본래 잠이 많은 편이라서, 식사 후에는 꼭 잠깐씩 엎드려 낮잠을 청했지만, 결국에는 낮잠 깨는 시간까지 기계적으로 되어 버렸다.
5월 중순까지는 1차 과목을 테이프 강의 위주로 공부하고, 5월 말부터는 보던 책들을 복습하면서 문제 풀이를 위주로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학원 강의와 테이프 강의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내 처지에서는 학원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다. 일단, 1차 공부를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공부하는 곳이 신촌이었던 만큼 노량진이나 신림동의 학원을 오가는 것이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수업료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도 없지는 않았다.
따라서, 각 과목별로 나한테 맞다고 생각되는 수험서적 1권, 그리고 강의 테이프 1질만을 준비하고 나서, 최소한 5월 중순까지는 이것만 집중적으로 심도있게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테이프 강의는 여러 번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원칙적으로 테이프는 한 번만 청취하고, 대신 수험서에 포함돼 있는 객관식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풀어 실전 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즉, 텍스트의 완벽한 이해에 집착하기보다는 객관식 문제의 답을 끄집어낼 수 있는 훈련에 치중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과목별로 공부하면서 중점을 두었던 사항, 그리고 수험서 선택에 대해 간단히 적어 보겠다. ① 민법 : 감정평가사 시험이 거의 사법고시 수준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본서(EX. 곽윤직, 김준호 교수)는 보지 않았다. 대신 조병욱(한교) 강의 테이프와 수험서에 많이 의존했다. ② 경제학 : 전공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부담은 없었다. 김대식 교수 3인공저를 최대한 빨리 1회독 한 후, 정병렬(하나) 테이프와 수험서를 공부했다. ③ 부관법 : 생소한 과목이었기에 가장 큰 부담이었고 끝까지 나를 괴롭혔던 과목이다. 민법 공부를 하면서 조병욱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판단, 부관법도 조병욱 테이프와 교재를 선택했다. ④ 회계학 : 일반 수험생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과목이었지만, 내게는 상대적으로 전략과목이었다. CPA 공부하는 친구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가 있었다. 회계원리와 중급회계는 송상엽(웅지), 원가회계는 오경수(하나) 교재와 테이프를 공부했다.
계획했던 대로 5월 중순에 전과목 테이프와 교재 1회독을 마무리했다. 한 과목에 약 2~3주 정도 소요된 것이다. 말이 1회독이지, 정말 책을 열심히, 그리고 꼼꼼히 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달랑 수험서 1권과 테이프 1질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백업’ 차원에서 다른 책들도 공부하여 리스크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법은 김성룡 교수의 사법고시 1차용 문제집을 골라 다양한 문제를 풀어봤다. 경제학은 정병렬 교재 말고도, 홍박사, 이재민, 박지훈 등 회계사 수험생들이 보는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객관식 문제만 풀어 보면서 실력을 점검했다. 회계학 역시 친구들한테 자문을 구해, 강경보 객관식 문제집을 풀면서, 틈틈히 김영덕 고급회계와 새로 개정된 기업회계기준도 중요한 부분을 체크했다. 이렇게 과목별로 복습을 하고 객관식 문제를 부지런히 반복적으로 푸는 단계에까지 왔지만, 문제는 부관법이었다. 때마침 지공법 등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백업’으로 삼을 만한 교재나 문제집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조병욱 선생님이 강의하는 부관법 문제풀이반 (주 10회 + 특강 2회) 수업을 등록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단과학원을 다녀본 이후로 학원이란 곳은 6년만에 처음이었다. 테이프 강의만을 듣겠다던 애초의 소신은 깨졌지만, 이 강의 덕분에 법 개정에 따른 막연한 두려움을 많이 제거할 수 있었다.
5월 중순을 시작으로 6월 말까지 총 4회의 모의고사를 봤다. 순전히 시간 안배를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60점을 넘긴 것은 2번 뿐이었고, 첫 시험에서는 부관법 과락이 나왔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계산한 민법 25분 + 경제학 40분 + 부관법 30분 + 회계학 55분 + 마킹 10분의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험장에서 큰 두려움은 없었다. 6월 27일부터 30일까지는 하루에 1과목을 최종적으로 복습했고, 시험 전날인 7월 1일에는 전 과목을 훑어본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임했지만 욕심이 과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지는 못했다. 7월 2일은 정말 더웠다. 하지만, 강의실의 위치가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었던 게 정말 다행이었다. 민법 1번부터 회계학 40번까지 순서를 바꾸지 않고 차례대로 풀어나갔는데, 생각보다 민법 과목에 시간을 덜 뺏겨 시종일관 5분 정도 여유가 있다는 기분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풀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긴장도 덜 되었던 것 같다.
Ⅴ. 2000. 7. 3 ~ 2000. 12. 31. 시행착오의 연속
3일 후인 7월 5일에는 공인회계사 2차 시험이 있었다. 작년 1차 합격생은 없었기 때문인지 모두들 부담없이 다녀온 것 같았다. 내게나 친구들에게나 7월은 오랜만에 누리는 휴식 그 자체였다. 난 채점이고 뭐고, 좋아하던 소설책을 원 없이 읽으며 1차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결과는 다행히도 합격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응시자 중 25%에 달하는 1500명이 합격을 했기 때문이다. 올 해 선발예정인원인 130명을 적용할 경우, 내년 2차 시험에는 내년의 동차생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경쟁률이 11.5 : 1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이러니 누구라도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발표가 나고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 구입도 아니요, 2차 시험 준비도 아니었다. 가장 중대한 과제는 바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견뎌왔지만, 매일같이 노느라 밤 새는 분위기의 하숙집에서 앞으로 1년의 또 다른 수험생활을 시작할 순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은 학교 기숙사였고, 2차 시험을 친 다음 주에 입사를 했다. 8월 20일에 있었던 2차 시험은 누구 말마따나 ‘소풍’이었다. 1차 합격자 발표일까지 2차 과목을 공부한 역사가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7월 말이 되어서야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교재를 구입하고자 이리저리 동분서주했지만, 혼자 공부하는 처지의 서러움을 또 한 번 느꼈을 뿐이었다. 일본식 / 미국식 이론의 개념조차 없었던 내가 한 달 동안 고작 공부한 것이라고는 이정훈 실무 서브, 안정근 이론 책, 서정욱 법규 책을 글자 그대로 ‘훑어본’ 것 밖에 없었다. 시험 당일날 2차 답안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처음 알았을 정도로 대책이 없었다. 실무는 황당하게도 1번 문제를 풀고 나니 20분 밖에 남지 않았고, 이론은 세 장 정도밖에 답안지를 채우지 못했으며, 법규는 중간에 퇴실해 버렸다. 그리고, 100분 동안 10장의 답안지를 채운다는 게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 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1차에 합격함으로써 내게 주어진 두 발의 ‘총알’ 중 한 발은 이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부터라도 새로 옮긴 기숙사에서 각오를 다지고, 2차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았다. 9월부터 4학년 1학기로 복학을 한 것이었다. 1, 2학년 때 엉망이 되어버린 학점을 복구하는 것, 그리고 2차 과목 공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한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학점은 어느 정도 나왔지만, 내가 4개월 동안 한 것이라고는 김동희 교수 행정법을 1회독 한 것 뿐이었다. 전공 수업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기울인 것도 착오였지만, 법규 공부를 위해서는 행정법 관련이론을 숙지해야 한다는 말만 주워 듣고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행정법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그 성과도 지지부진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크리스마스가 다 되어 끝난 기말고사 이후에야 감정평가사 학원에 전화를 해 봤지만, 이미 1기 스터디는 모집이 완료된 상태였다. 정말 막막했다. “감정평가사 시험을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주위에 한 명만 있었어도...” 하는 아쉬움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1기 스터디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Ⅵ. 2001. 1. 1 ~ 2001. 8. 26. 2차시험 준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1기 스터디 등록을 않은 것은 못내 찜찜했지만, 2기 스터디 개강 때까지 내 나름대로의 공부 방식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잘 될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 1차 시험을 공부할 때처럼 잠은 6시간 정도로 제한하고, 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려 했지만, 유난히 올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는지라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역시 학원 강의는 피하되, 실무는 이정훈, 정하용, 이론은 은민수, 김재진, 법규는 서정욱, 전준경 강의 테이프 및 서브노트, 자체교재를 차근차근 공부했고, 감정평가론 3인 공저와 안정근 실무 문제도 틈틈히 풀어 보았다. 그리고, 부동산학개론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감정평가사 시험 특성상 수험생의 입장에서 과목별로 명확한 시험범위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CPA를 공부하는 친구들은 학교 서점에서 수험서들을 훑어보며 어떤 책이 더 나은지를 비교하기도 하고, 서로 상의해 돈을 모아 책을 구입한 뒤 이를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게 안 되니 답답하기만 했다. 똑같은 ‘감정평가이론’임에도 강사마다 다루는 문제와 범위가 다르고, 법규의 경우 대체 행정법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되는지 답이 나오질 않았으며, 실무는 일본식 문제와 미국식 문제가 머리 속에서 뒤엉켜 혼란스럽기만 했다. 감정평가사 시험이 회계사 시험이나 사시, 행시보다 체계가 부족한 면도 없지 않지만, 1기 스터디에 참가하지 않았던 게 보다 큰 원인이었다. 이런 와중에 2월 25일, CPA 1차 시험이 있었고, 작년에 고배를 마셨던 친구들과 후배들이 와신상담하여 시험을 치루었다.
어느덧 3월말이 되고, 난 두 군데의 학원 스터디 선발고사에 응시해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해 보았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작년 2차 시험 이후에도 답안지를 작성하는 연습을 하지 않은 탓에, 아는 문제가 나와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 글씨가 악필은 아니었기 때문에, 채점시 약간은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해 왔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보기 좋은 글씨체가 아니라 글씨를 빨리 쓰는 능력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어쨌든 두 학원 중 신촌에서 보다 가까운 노량진에 위치한 고시학원에 등록했고, 특히 시간과의 싸움이라 할 만한 실무 문제풀이를 연습하기 위해서 신체계 감정평가실무(홍병각․유영조 저)를 새로 샀다. 그리고 약간 늦긴 했지만, 과목당 2~3권의 서브노트나 교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되어 이론과 법규 서브노트 단권화를 시도했다.
4월부터 2기 스터디가 시작되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내가 막내였다. “1기 스터디는 안 했는데요”라는 내 대답에 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2기 스터디에서 매주 치룬 모의고사는 내게 자극을 넘어서 충격 그 자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이론, 법규 문제들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었고, 실무는 2번 문제를 풀 때쯤 되면 100분이 이미 지나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답안지를 제출조차 못 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결석도 잦아졌다. 또한, 1주일에 하루라고는 하지만, 신촌에서 노량진까지 이동하는 것은 내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기 때문에 스터디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잤다.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2기 스터디에 뒤늦게 합류하면서 느는 것은 한숨 뿐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팀장들이 나누어 주는 자료, 그리고 팀원들 간에 오고가는 대화 속에 들어있는 유용한 정보들이었다.
시험이 100일 정도 남았을 때엔, 여전히 스터디 빼 먹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더 이상 의미없는 단권화를 포기하고 팀원들이 추천한 배태성, 이홍규, 주남중 팀장 1기 스터디 서브노트를 구해 이것들을 교과서라고 생각하고는 공부해 나갔다. 단, 실무는 다른 과목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김정환 4인 공저(정해 감정평가실무), 이정훈 2인 공저(핵심 감정평가실무)를 택해서 실제 답안지에 문제를 푸는 연습을 따로 하였다. 과목별로 학습에 할애한 시간 비중은 실무 : 이론 : 법규 = 3 : 1 : 1 정도였다.
6월부터는 S학원의 3기 스터디에 참여했다. 학원, 팀장마다 제시하는 자료에 약간씩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학원에서 스터디를 해 보고 싶었다. 솔직히, 3기 들어서도 모의고사 성적은 그리 오르지 않았고, 답안지를 제출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답안의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이론, 법규 답안을 100분 안에 10장을 채울 수 있는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됐다. 실무는 모의고사 문제지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 지가 머릿속에서 곧바로 떠오르는 문제도 꽤 있었다. 하지만, 2차 시험일이 두 달 채 안 남았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문제들이 종종 나오고, 특히 손도 댈 수 없는 법규 사례문제가 출제될 때면 당혹감과 위기의식이 많이 들었다. 따라서, 매주 모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는, 귀가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료, 서브노트에다 그 날 받아온 스터디 자료의 참신한 내용을 보완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2기와 3기 서브노트까지 몽땅 복사해 두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서브노트는 거의 20권 가까이에 달했다.
한참 발등에 불이 떨어진 7월은 내게 큰 고비였다. 7월 4일에 있었던 공인회계사 2차 시험을 마지막으로, 같이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이 모두 도서관을 떠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시험을 준비해 왔다고는 하나, 도서관에 혼자 남겨진 심란함은 생각보다 컸다. 또 하나의 악재는,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체력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이었다. 평소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운동은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고, 한약은 물론, 그 흔한 영양제나 비타민제 하나 복용하지 않았던 것이 올 여름에야 누적되어 몸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1분이 아쉬운 7월인데도, 오히려 하루 수면시간이 8~9시간으로 늘어났고, 더위를 먹은 듯한 무기력증까지 생겼다. 이 때가 수험 기간 중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일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어쨌든 3기 스터디를 마감하고 나서는 과목당 6~7권씩이나 되는 각종 서브노트의 모의고사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보았고, 제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서브노트를 한 권씩만 선정해서 나머지 서브노트의 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이를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과목별로 할당한 시간은 1 : 1 : 1이었다. 일주일 전부터는 최대한 시간을 아끼면서도 서브노트, 모의고사 문제를 보다 많이 풀어보기 위해, 답안의 세부적인 작성보다는 목차, 중요 키워드만 직접 써 보면서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다.
결국 학습의 절대량에 만족하지 못한 채 8월 25일을 맞이했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약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2차 시험 고사장의 책상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 새벽부터 몇몇 아저씨들이 인근 건물에서 큰 책상을 들고 와 책상을 바꾸기도 했지만 나는 차라리 그 시간에 예습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도 한 문제라도 더 목차를 외우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서울대를 빠져 나오는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이론, 법규는 최선을 다해 답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실무는 1번 문제에서 헤매느라 20분 정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그저 아찔할 따름이다.
아래의 순서는 제가 책을 구입, 학습했던 순서와 동일합니다.
1. 실무
① 서적 : 부동산평가실무 (안정근), 최신감정평가론 (백영준 3인공저), 신체계감정평가실무(유영조․홍병각공저), 정해감정평가실무 (김정환 4인공저), 핵심감정평가실무 (이정훈․신병기 공저)
② 강의 서브 : 이정훈 서브, 정하용 서브
2. 이론
① 서적 : 부동산평가이론 (안정근), 부동산학개론 (이내영)
② 강의 서브 : 김재진 서브, 은민수 서브
3. 법규
① 서적 : 감정평가및보상법규 (서정욱), 행정법Ⅰ(김동희), 5단계완성 감정평가및보상법규강의 (전준경), 최신보상법규쟁점 (전준경), 행정법요론 (류지태), 행정법연습 (이재화)
② 강의 서브 : 서정욱 서브 (행정법)
Ⅶ. 글을 마치며
아직도 내가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지금, 2년 넘게 써 온 일기장을 뒤적여 그 동안의 수험생활을 돌이켜 보니 기분이 묘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험생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수험생활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모델인 숱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석 달 반 동안 학원에서 2, 3기 스터디를 했지만 단 하루, 아니 단 한 과목도 모의고사 상위 30% 안에 내 이름을 랭크시키지 못 했다. 더듬더듬 하면서 공부의 맥을 겨우 짚어낸 것은 너무도 늦은 시점이었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만의 학습방식을 유지한 것이 비결이었다면 비결이었던 것 같다. 스터디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공부 방식에 회의를 갖거나, 능력 부족에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좌절과 회의가 발전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수험생활은 끝이다.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수험생 여러분께 당부 드리고 싶은 점을 몇 자 적어 본다.
첫째, 1차 시험 대비는 문제를 많이 풀어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여느 객관식 시험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아무리 중요한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을 객관식 문제화할 수 없다면 수험생 입장에서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차 시험 공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다. 책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험서의 객관식 문제를 계속적으로 풀어보는 것은 효율적인 공부방법이다. 단, 감정평가사 1차 시험의 난이도를 만만하게 보는 것은 금물이기 때문에 민법은 사법고시, 경제학과 회계학은 CPA 수준 정도 되는 문제들을 접해 봐야 한다. 또한, 실제 시험장에서의 과목별 시간 안배를 연습하기 위해 학원 모의고사도 몇 번 정도는 풀어봐야 한다.
둘째, 계획을 세워 공부해야 한다. 타임 스케쥴을 작성하지 않은 채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마다의 목표 학습량을 정하고 이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공부는,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루에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나의 경우엔 수험 초기, 하루에 테이프 두 개를 청취하는 것을 일일 목표로 설정했다. 6일을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주일에 하루 망가지는 것보다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매일매일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면서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내게는 더 효과적이었다.
셋째, 정보의 중요성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앞에서도 누누히 강조하였지만, 혼자 힘으로 독야청청 공부하는 것은 잘 닦인 포장도로를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합격에 골인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단, 반드시 학원 스터디를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재확인하고, 팀장 및 팀원들로부터 수험서적과 서브노트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넷째, 시험 공부는 학문 연구가 아니다. 시험이 6개월 이상 남았을 때에는 어느 과목이든 이론을 차근차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며, 저명한 교수의 저작일지라도 그 내용 자체에 의문 혹은 반론을 제기할 수가 있다. 하지만,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까지 자신만의 학설(?)을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수험생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한 것이며,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라도 그것이 중요한 내용이라면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암기해 버리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섯째, 답안 작성의 SKILL도 필수적이다. 2차 논술 답안을 작성하는 요령은, 실무는 CPA, 이론 및 법규는 사시나 행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감정평가사 시험이 다른 시험보다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글씨를 잘 쓰는 것보다는 빨리 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목차 작성의 중요성은 이미 수험생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며, 100분 내에 열 장의 답안지를 채울 수 있는 연습을 꾸준히 해 주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펜은 SAKURA GELLY ROLL (made in JAPAN)을 사용했고, 계산기는 CASIO scientific FX-570W를 사용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펜과 계산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나 외에 한 명도 보지 못 했다.
여섯째, 체력관리도 중요하다. 1, 2차 시험일자가 모두 여름에 잡혀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대비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대로 나는 이를 간과했기 때문에 7, 8월에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만약 지금 다시 수험 생활을 한다면, 그런 오류는 절대로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일곱째, 개인 서브노트 작성은 필수조건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전년도 말까지 단권화된, 그리고 개인취향에 맞는 서브노트를 만들되 그 이후에 입수하는 자료들 중 생소한 내용은 제작 완료된 서브노트에 그 내용을 보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브노트 단권화를 할 만한 시간이 없다면 학원 스터디, 혹은 강사의 서브노트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좋은 차선책일 수 있다. 선택한 서브노트를 중심으로 공부하되, 다른 자료와 서브노트의 내용을 옮겨 적으면서 보완하면 되는 것이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지만, 주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먼저, 미덥지 않은 아들을 위해 1년여의 시간을 허락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고생스런 수험생활을 함께 보내면서 분투한 끝에 드디어 회계사가 된 친구들 재황, 경식, 원섭, 상호, 정근, 상훈, 재욱에게 고맙고, 수고했단 말을 전하고 싶다. 승진 兄, 상민, 혁준, 장준, 현준, 소영, 소연이도 올해 좋은 소식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스터디 시절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김경출, 최창섭, 송순미 팀장 (이젠 자신있게 ‘선배’라고 부를 수 있는) 님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