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는  역사란 '인류의 범죄와 어리석음의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에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보면 아마 그 말이 진실인 듯 보입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과 살아남기에 적합한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는 게걸스러운 욕심의 역사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밥과 짝짓기와 번영을 위해 날마다 싸웁니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를 생물학의 단편으로 이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 속에서도 사랑을 만들었고, 노래를 만들었고,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공자는 함께 잘 지내는 법을 설파했고, 부처는 우리 안의 신을 찾기를 열망했고, 예수는 이웃과 빵을 나누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니체는 미친듯이 우리의 어리석음 폭로하여 각성하게하고, 프로이트와 융은 가면 밑을 흐르는 무의식의 평안을 도와줍니다. 역사는 수많은 실제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한 철학적 조망을 얻을 수 있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윌 듀란트는 '역사란 사례를 들어 가르치는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명의 역사는 100만년으로 추산되는 인류의 긴 자취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 속의 한 종으로 살아왔습니다. 신화는 문명 이전 인류의 정신세계를 말합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팬티를 걸치지 않은 인간 나체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체계이기도 합니다. 구스타프 융의 이야기를 내식으로 조금 비틀면 아마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신화는)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있다. 그 밤은 우리의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오래전부터 정신으로 존재했다.... (신화는) 자아를 던져 버린.... 깊은 곳에서 생겨나며 너무도 유치하고 기괴하고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서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의 삶에 대하여 얼굴을 붉히게 된다....무의식의 장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통합된다."


 

 


어느 날 나는 신화 속 이야기들을 통해 사회적 가면 넘어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경영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자연적 본능과 불완전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갈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높여줌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경영에 대한 실험이 가능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을 우선 신화 경영이라고 불러 볼까요 ?

 

 

 

“신화는 개념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체계에서 옵니다. ...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경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 신화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화는 사실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 조셉 캠벨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총 2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

 

디미르란 두 주인공이 고도라는 미지의 인물을 끊임없이 기다리지만 그는 연극의 막이 모두 내릴 때

 

까지 결국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단순한 줄거리를 담은 이 현대극은 두 막 모두 다음과 같은 장

 

면으로 끝이 납니다.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연상시키는 신화 속의 한 장면 중에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가 쓴 에세이로도 유명한 시지프스는 신들에게서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산마루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이입니다. 그는 쉴 새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지만 정상에 닿기가 무섭게 바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굴러 떨어집니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이 바로 이 형벌의 이름이죠.

 

 

 

 

혹시 이 두 개의 장면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어렴풋이 연상되지 않으세요?

 

 

끊임없는 기다림과 끊임없는 노동은 의미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언어입니다.

 

 

 디디와 고고(연극 주인공들의 별명)와 시지프스는 그 어디로도 향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 합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인생은 무의미한 기다림이거나

 

 희망 없는 노동일 뿐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마치 다락방의 먼지 쌓인 골동품 같은 신화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

 

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열심히 생을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환영(幻影)이라는 의미의 마야(maya) 속

 

을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야는 때로는 부모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회사와 조직이

 

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국가와 공동체란 이름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저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어디로도 향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신화는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의 모험임을 말해줍니다. 아주 편안한(그러나 불안한) 일상 속에서 영

 

웅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자의든, 타의이든) 어둡고 위험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렇게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통과하여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

 

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듯이, 싯다르타가 생로병사를 접하게 되듯이 시험에 들게

 

는 것입니다.

 

 

 

 

 

그 미지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 입구를 찾아주는 것이 바로 당신의 소명입니다. 이는 자아의 문을 굳

 

게 걸어 잠그고 있는 미로의 입구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오직 당신 만이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god)는 오지 않습니다.

 

 

 

 

무거운 바위는 끊임없이 굴러 떨어질 뿐입니다. 이 무의미한 순환의 고리를 끊을 사람 또한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요? 무엇을 하다 죽고 싶은가요?

 

 

당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일상을 열정으로 넘쳐 흐르게 할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니, 그렇게 요란하게 들끓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은근한 밑불처럼 나직한 욕망이어도 괜찮습니다.

 

 

 

불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사람도 여러 타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

 

그리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조셉 캠벨은 말합니다.

 

 

 

“자신의 몫을 산다면 신화 따위는 필요치 않다.”


오늘은 제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봐야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몸 안에 흐르는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겠습니다.


 

 


 "불행한 이번 전쟁의 근본 원인은 파리스를 낳은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어려서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반딧불만한 불씨가 모든 것을 태우게 한 그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파리스는 세 여신의 아름다움을 품평하는 판관이 되었지요.  아테나는 트로이인이 헬라스(그리스)를 정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고, 헤라는 아시아와 유럽을 다스리는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내 용모를 칭찬한 다음 나를 파리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파리스는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되었지요). 


  내가 파리스의 아내가 된 것은 그리스에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는 트로이의 공격을 받아 정복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그 대신 나는 아름다움으로 팔려 이런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화환을 받고 칭찬을 받아아야할 공을 세우고도 그로 인해 도리어 이렇게 비방과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 중에서

 

 

   서양 최고의 미인은 아마 헬레나일 것입니다.   그녀는 ‘배 천 척을 띄우게 할 만한 미모’ 였다지요.   이 이야기는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함락한 후, 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나를 잡아 전남편인 메넬라오스 앞으로 끌고 왔을 때,  헬레나가 메넬라오스에게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하는 대사입니다.   메넬라오스는 결국 아름다운 헬레네를 죽이지 못합니다.   희화된 얼간이 메넬라오스는 바람나 딴 사내를 따라 도주하고 수 만명의 장정을 싸움터에서 죽게 한 부정한 아내 헬레나를 데리고 스파르타로 의기양양하게 귀환합니다. 위대한 전리품을 되찾아서 말입니다.



  그리스의 눈먼 시인 호메로스는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죄악은

 

거짓말'이라는 말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거짓은 여자의 본능'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자연은 사자

 

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고, 소에게는 뿔을 주고,   오징어에게는 먹물을 준 것 처럼,   여자에게는 자

 

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하는 힘을 주었다고 여자들이 미워할 말을 골라했군요.   그는 거짓으로 이골

 

이 난 교활한 남자들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헬레네의 경우에는 딱 맞는 말처럼 들립

 

니다.

 

  

그러나 거짓말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말을 한 사람은 아마 톨스토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군요.

 

"남에게 한 거짓말은 자신에 대한 거짓말 보다 중대하지 않다.   남에게 한 거짓말은 즉흥적일 수도 있고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은 진리에 대한 배반이며, 인생의 요구에 대한 배신이다."

   

 

  자기혁명은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인생이 내게 요구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인생이 당신에게 요구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요 ?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아아, 원통하구나. 이것이 수많은 불행 중의 마지막 불행이구나.   불타오르는 고국을 등지고 떠나가야하다니.   늙은 몸이라 비록 발걸음은 떨릴지라도 비운의 조국에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러가자.   지난 날 아시아의 백성을 거느리고 우뚝 솟았던 트로이가 이제 곧 그 영광의 이름을 잃어야 한다.   적들은 성에 불을 지르고 우리를 종으로 삼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려한다.    오오, 신들이시여,   그러나 이제 신을 부른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껏 수없이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건만 일찍이 들어 준 적이 없는 신들이 아니었던가.   불속으로 뛰어들자.   조국과 더불어 타 죽는다면 나로서 그 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

                                                                     -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 중에서

 

 

  토로이성이 불타고 무너지는 날, 트로이의 늙은 왕비 헤카베의 절규입니다.   오딧세우스는 그녀를 전리품으로 삼아 종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그녀는 트로이 제일의 용장 헥토르의 어머니이고,  헬레나를 데리고 옴으로써 트로이 전쟁의 비극을 만들어 낸 파리스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아폴론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늘 맞는 신탁을 말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비운의 사제로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카산드라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음 속에 신을 잃고 맙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오늘 날 전해지는 그리스 비극 30여편 가운데서도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철저한 절망을 다룹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을 '가장 비극적'인 것으로 평했습니다.    패전국 트로이의 여인들은 포로가 되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이 실제로 행해지자 더 이상 '불행에 대한 두려움조차 모두 사라진 일종의 평화, 아니 오히려 영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알 수 없는 괴이한 아름다움' 속에  놓이게 됩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정조(情調)는 절망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만 신화는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집니다.    승전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카산드라를 전리품으로 데리고 당당히 귀환하지만, 귀국하는 첫날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목욕탕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반면 헥토르에 이어 트로이 두 번 째 용사인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유민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의 시조가 됩니다. 트로이가 로마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구원은 우리 안에 신성한 것을 되찾는 것입니다. 자기혁명은 새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것입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하고,  알에서 깬 새는  신에게로 날아' 갑니다. 

 

그 신의 이름은 누구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신은 반드시 우리 안에 신성하게 거주해야합니다.

 

갈등은 하나가 되려는 힘입니다

 

...... 헤라클레스는 험한 오이타 산에서 자란 나무들을 잘라 스스로 화장단(火葬壇)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장단에 불를 지르게 했다. 탐욕스러운 불길은 처음에는 그가 장작더미에 깔고 누운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태웠다.  이윽고 힘을 얻은 불은 혀를 날름거리며 그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의 사지를 태우고 그 불길을 가볍게 여기던 영웅의 몸을 태웠다.  천궁의 신들은 지상의 왕자였던 영웅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제우스는 지상에서 한풀이를 마친 헤라클레스를 사두마차에 태워 구름으로 가려 천상으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자리 사이에서 영원히 빛나게 해 주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헤라클레스입니다. 그는 제우스가 알크메네라는 여인을 범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남편의 바람에 신물이 났지요. 그리고 그녀는 예외 없이 남편의 사랑을 입은 여인과 의붓자식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난사 (The Labors of Hercules) 역시 헤라가 자신의 대리자인 에우리스테오스왕을 통해 헤라클레스에게 부과한 고난입니다. 헤라클레스는 12가지의 불가능한 노역을 마쳤지만 헤라는 저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오이타 산에서 헤라를 고래고래 원망하며 스스로 불을 질러 죽게 되지만 그는 모든 영웅들의 영웅으로 하늘의 별이 됩니다.

 

 

매우 특이한 것은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헤라의 영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헤라의 끝없는 복수심으로도 끝내는 정복할 수 없었던 헤라클레스의 용기는 헤라를 욕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상의 왕비인 헤라를 영광되게 했습니다.  헤라가  부과한 고통스러운 과업들은 헤라클레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성공은 오히려 그 노역을 부과한 헤라의 영광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헤라가 부과한 노역이 없었다면 헤라클레스의 영광도 없었을 테니까요.   헤라클레스와 헤라도 결국은 화해를 하게 되었지요.  헤라는 자신의 딸인 청춘의 여신 헤베를 헤라클레스와 맺어지게 허락합니다. 

 

자기혁명은 갈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길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짧은 성공에 오래 머물면 안됩니다. 

뱀처럼 과거를 허물로 벗고 성장해야하는가 하면,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는 절대 버려서는 안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가슴에 품어야 하지만 강박증을 가진 현실주의자처럼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야 합니다. 

 

갈등이란 하나가 되려는 힘입니다. 이것은 없애야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거쳐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여기에 고통의 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대 오늘도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과 함께 하시는 지요?


 

삶의 슬픔에 기쁨으로 응답할 때

이 아기는 그 옛날 어머니가 잉태하여
번갯불 번뜩이는 속에
때 아니게 나은 아이,
어머니는
벼락을 맞고 죽었네.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스스로의 허벅지를 째고
아기를 그 새로운 모태에 넣고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황금고리로 걸어 숨겼도다.

 

달이 차서 황소뿔이 난
신이 태어나자
아버지 신은 화환 대신
그의 머리에 뱀을 감았도다.

      - 에우리피데스, '박쿠스의 여신도들' 중에서

 

  테베의 왕녀 세멜레는 제우스가 사랑한 여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여인입니다.   세멜레를 몹시 사랑한 제우스는 그녀의 부탁이면 무엇이든 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세멜레는 천상의 왕이자 번개의 주인인 제우스의 찬란한 모습을 직접 보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세멜레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도록 주입시킨 것은 남편을 뺏긴 제우스의 아내 헤라였지요.   맹세를 거부할 수 없었던 제우스는 원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엄청난 광희를 견딜 수 없었던  세멜레는 불에 타 죽고 맙니다.   제우스는 출산이 임박한 아이를 빼내어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기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인간 디오니소스는 어머니 세멜레와 함께 죽었다가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신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그를 '두 번 태어난 자', 즉 그리스어로 디티람보스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미지의 것, 헤아려 알 수 없는 힘든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삶의 슬픔입니다.  

 

  자기혁명은  거부하지 않고 그 슬픔을 받아들여 운명이 요구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순간에 우리는 신의 실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순간 인간은 죽고 우리 속에 신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게 합니다.  

 "모든 위대한 것은, 고통과 재액이 없이는 인간을 찾아오지 않는다"

당신,  삶의 슬픔에 지지마세요.  슬픔에 기쁨으로 응답할 때, 그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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