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아도 건교부 시계는 간다

 

 

 

이 강 수

(제12회 시험합격, 남, 26세,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4학년)

 

 

 

 

Ⅰ. Prologue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 어두운 방에서 전화기 플립을 열면 그 배경불빛과 어우러져 나의 눈에 들어오는 문구, “되고자 하는가...” ....

 

 

 

내가 수험기간에 본 합격수기는 30편도 넘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나의 이야기를 쓰자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무래도 결정을 할 수가 없어 내가 보아왔던 수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를 인용하여 나의 글을 시작했다. 이제 어느덧 합격자 통지를 받은 지도 몇 달이 지났고, 이제는 수험생시절에 가졌던 고민들과는 또다른 일거리들과 고민들로 여전히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의 수험기간은 절대로 쉽게 잊혀지지 않을 추억 이상의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그 기억을 수험생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특히 동차합격생으로서 더 기뻤던 마음을 동차수험생으로서 더 힘드실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나는 수기를 쓴다.

 

 

 

 

 

 

 

Ⅱ. 왜 이 시험 공부를...

 

 

무슨 일이든 그 일에 대한 발단 내지는 동기(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감정평가사 공부를 시작한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드라마틱한 사건도 있지 않아 따로 목차를 잡기가 민망하다. 그래도 글의 논리상 이 자리에 무슨 말이라도 써야 하기에 쓴다. 나 역시 합격생 중에는 어린 축에 속하고, 나와 같은 경우는 대개가 군 제대 후 대학 졸업 전에 무언가 해야겠기에, 그 무언가를 찾다가 주변사람들을 통해 감정평가사에 합격하면 좋다기에 시작했다. 나 역시 이러한 보편적인 케이스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

 

 

 

 

97년 말일(IMF 직후)에 제대하여, 자유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복학하여 한 학기동안 굳은 머리를 좀 풀고, 98년 7월 4일(공교롭게도 9회 1차 시험일)에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변리사공부를 생각 중이었고, 그건 내가 복무했던 부대의 중대장님의 영향이었다. 그 분은 입대 전 이미 변리사로 활동하셨고, 또 내게도 적극 권하셨기에 그런 맘을 가지고 제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학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우선 주변에는 감정평가사를 공부하는 선배들이 몇명 있어, 수험가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며, 친구들도 내게 이 시험을 적극 권유했다. 왜냐하면 변리사는 우리 전공과 관련을 시킬 것들도 별로 없고, 공부했던 선배도 없었고, 합격 후에도 별로 비전이 없을 거라는 이유에서였고, 감정평가사라면 굉장히 수월한 것처럼 얘기들을 해서 나는 선뜻 감정평가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감정평가사를 우습게 보고 시작한 건 나의 오판이었지만, 아무튼 ‘감정평가사를 선택한 건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Ⅲ. 제2의 군생활

 

 

그렇게 나의 기나긴(더 오래 공부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내게 만 3년은 정말 피말리게 길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난 제2의 군생활로 간주한다) 수험생활은 평온하고 여유롭게 시작했다.

 

 

 

 

 

수험가에서 만 2년 이상 있으면 모두가 道人이 된다. 나도 2년차까진 몰랐는데 3년차로 넘어가니 하루하루가 깨달음의 연속이요, 得道의 순간순간이다. 특히 지금은 학원에서 실무팀장으로서 누군가의 앞에 서는 입장이 되어보니 도인인 척이라도 해야 된다. 어쨌든 이번 목차에서 적고 싶은 글의 요지는 꾸준히(보통 2년 이상) 수험생활을 해나가려면 체력저하나 경제적인 어려움도 큰 문제일 수 있으나 가장 큰 문제(수험생 공공의 적)는 자신감의 저하라는 것. 즉, 불신의 벽, 불확실성 ... 이런 것들이 최대의 적이다. (특히 동차생들에겐...) 이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생각을 적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믿으면 된다. 첫째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은 공평하다. 뿌린 만큼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노력한 자에게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주어지는 법, 권선징악 등등 내가 2년차 때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시는 공부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보름 정도의 기간동안 가장 힘들었던 이유다. 난 할 만큼 했는데.. 난 정말 똑똑하고 시험도 잘 봤는데... 근데 떨어진 건 억울하다. 세상을 믿을 수가 없다. 말도 안 된다. 모든 불합격의 원인을 세상 탓으로, 운으로 돌렸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 합격한 이들은 모두 나보다 더 잘 하고, 열심히 하고 시험도 잘 본 사람들이었으리라.

 

 

 

 

둘째로 믿을 건 나 자신이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나만 열심히 하면 합격이다. 자신감을 갖자. 사실 모든 인간의 능력은 다 똑같다고 한다. 왜냐면 세상은 공평하니까. 그렇다면 1,000명 중 100명은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은 100% 누가 더 열심히 했는가가 기준이다. 여기서 열심히란, 막연히 누가 잠을 덜 자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나로 측정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누가 정성껏 노력을 더 많이 했는가일 것이다. 즉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누가 집중력 있게 효율적인 방법으로 했느냐에 따라 시간 때우기와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질적, 양적인 것들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열심히”라는 표현이다.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하자. 열심히 해도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 4 : 4 : 2 전법 ”. 수험생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으리라(특히 객관식 시험). 시험출제의 원칙이라고도 한다. 40%는 공부 좀 했으면 누구나 맞춘다. 그리고 20%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못 맞춘다. 그렇다면 60점을 넘기 위해선? 중간의 40%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리라. 이 두 이론을 접목시키면 수험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어쨌든 여자분들께는 뭐라 설명드릴 길이 없지만, 군대를 한 번 갔다 오신 남자분들이라면, 그 군생활의 고통스럽던 시간을 되새기며(다시 생각해 보면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겠지만..) 다시 한 번 군생활을 한다는 생각으로 수험기간을 보내신다면, 거꾸로 매달아도 건교부 시계는 흘러가 합격의 기쁨을 맛보실수 있으리라 믿는다.

 

 

 

 

 

 

Ⅳ.수험생활

 

1. 0년차(1998.7~ )

 

 

2학년 여름방학. 정말 뿌듯한 두 달을 보냈다. 처음 가보는 학교 도서관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원래 어딜 가나 적응능력이 빠른 나로선 곧 학교 도서관만큼 편한 곳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부관법과 민법을 수강했고, 신설동에 있는 학원(지금은 없어짐)에서 회계원리와 경제학을 수강했다. 거의 매일 학원을 나갔고,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여름이었건만, 고등학교 졸업이후 학원을 다니는 것 자체에서부터 공부를 한다는 것, 공부내용 등등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래서 재밌었고 보람찼다.

 

 

 

 

하지만 9월 개강 이후로는 2차 과목으로 3인 공저를 붙잡아 봤지만, 바쁜 학교생활 속에서 2차 공부는커녕 여름에 배웠던 회계원리나 경제학도 다 잊어버리는 어이없는 시기로 기억된다. 아무튼 나의 0년차는 그래도 공부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나름대로 1차 시험 기본강의(회계학 제외)는 한 번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큰 의의를 갖는 시기였다.

 

 

 

 

■도서목록 : 이 때 보았던 책들은 민법(곽윤직/조병욱/신종석tape), 민법전, 회계원리(기억안남), 경제학(3인공저), 관계법규(조병욱), 2차 책(최신감정평가론-3인공저), 실무강의(이영오-반쯤 들음)

 

 

 

 

 

2. 1년차(1999년)~1차시험(10회) & 2차 준비

 

다시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다행히 작년에 시험 봤던 형들 4명이 모두 합격을 했고, 졸지에 우리 과에서는 감정평가사 시험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시작한 나를 필두로 선배와 후배들이 우후죽순 시험에 뛰어들어 그 동안 혼자 다녀야 했던 학원을 같이 갈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았다. 그래도 나는 좀 경험이 있어서 노량진 J강사의 회계학만 듣고 다른 날은 학교도서관에서 나름대로 여유를 갖고 2차(실무)과목도 공부하며 2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또 개강. 만만치 않았다. 1차를 우습게 봤는데 학교수업 따라가며 따로 학원 다니기도 버거워서 3~4월의 문제풀이반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았더니 5월말이 되도록 모의고사 점수가 겨우 50점을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다. 막판에는 학교수업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던 도시설계(4학점)를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께 찾아가 마지막 발표를 앞두고, 감정평가사 시험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리고(우리설계팀 4명 중 3명이 수험생이었다!) 며칠 더 공부했던 것이 대단한 효과를 본 듯 하다. 3명 중 1명은 술 마시고 시험에 불참했지만, 시험 본 두 명(나 포함)은 합격했고, 특히 나는 평균 60.00으로 합격했다. 천우신조였다.

 

 

 

 

 

 

■도서목록 : 이 때까지 봤던 1차 책들은(위에서 추가된 것만) 민법(노종천/권용우 문제집), 경제(주한광 문제집/정병렬 문제집/박지훈 서브), 회계(김영덕/김상운/이효익), 관계법규(법전)

 

 

 

 

 

당시는 지금과 달리 가답안이 나오지 않아 7월말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고, 시험도 좀 어려웠던 해라 1차 합격을 확신할 수 없어 발표 때까지 술로 연명하다가 8월초부터 본격적으로 2차 공부에 돌입했다. 학교에서 선배들이 주최했던 무료특강을 한 달 정도 들었고, 하루빨리 더위가 가시기를 기다리며 지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참, 그러는 도중 한 번의 소풍이 있었다. 10회 2차 시험에 반드시 가서 끝까지 앉아있으라는 선배의 명령으로 그렇게 했지만, 왜 그랬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 원래 지구력이 강한 편이라 굳이 그런 연습 따위는 필요 없는데... 아무튼 그래도 1년차로서 2차 시험응시는 생각보다는 진지하게 임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최소한 2차 시험장의 분위기는 1차 시험장하고는 사뭇 다르니까. 답안지는 어떻게 생겼고, 종이의 질은 어떻고, 어떤 펜이 잘 써지고, 시험감독은 어떠한지 등등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해 둠이 다음해 진짜 2차 시험응시 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9월이면, 대개의 2차 수험생활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특히 9월부터 12월까지는 학원강의는 거의 다 듣고 기본서도 여러 권 독파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래서 당시 4개월간 내가 들었던 학원강의들을 늘어놓아 보자면...

 

 

 

 

■도서목록 : 실무(이정훈/신병기, 보상특강/신근섭, 실무특강/정영철/신종웅)-정영철과 신종웅 수업은 반 정도씩만 들었음. 이론(은민수/전영주/신근섭 이론특강), 법규(김동건/서정욱), 행정법특강(유지태)... 참 많이 들었다. 어떨 땐 한 달간 7개를 동시에 들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위에 적은 모든 수업을 100% 출석한 건 아님을 실토한다. 아무튼 이때 아니면 학원수업을 들을 시간이 별로 없다. 해가 바뀌면 스터디에 끌려 시험일까지 쭉 끌려가기 때문이다(3~4년차 이상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3. 2년차(2000년)~2차시험(11회) & 낙방

 

 

2년차의 시작과 끝은 모두 학원 스터디이다. 나도 수험생시절 들었고, 지금은 스터디 팀장을 하고 있지만, 과연 스터디의 필요성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시험은 최근 정보 확산이 많이 되었기는 하나 그래도 당분간은 학원차원에서의 스터디가 어느 정도 지속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학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조직적으로 몇 명 이상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문제풀이 훈련을 함께 해야 함은 실력향상(단기간에)에 너무나도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당시 관례(?)대로 노량진 N(지금은 H)학원에서 1기와 2기를 수강했고, 3기는 따로 하지 않았다(그게 그해 실패의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1기는 숙제를 내주면, 해당 범위에 대한 기본서 등을 월․화요일에 읽고 수․목요일에는 숙제를 정리하고(서브작성), 금요일에는 그 부분을 암기해서 토요일에는 학원에서 시험을 보고, 일요일에는 토요일 날 받은 자료 정리하고, 사우나 한 번 하고, 거의 이러한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워낙에 빡빡한 일정인지라 시간 가는 것이 너무나도 빨랐다. 특히 나는 함께 1차를 합격한 과 동기 녀석과 함께 동거를 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그래서 토요일 밤엔 여지없이 자취방에서 혹은 그 앞 닭발집에서 맥주나 소주 한 잔 걸치는 게 굉장한 낙이었고 스트레스 해소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아무튼 시간은 빨리 흘러 어느덧 2기가 됐고, 2기에는 매주차별 시험범위가 없거나(실무) 매우 넓어 공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문제는 하나같이 생소하기만 해서 그런지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별 거 아닌데.. 3기가 되면 다시 1기 수준이랑 별 차이가 없어지던데... 2기는 항상 응용력 향상을 빌미로 오버하는 경향이 있는 기간인 것 같다.

 

 

 

 

3기를 신청하지 않은 이유는 1기와 2기에서 너무 쉴 새 없이 끌려만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시간을 갖고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다들 학원 가서 매주 시험을 보는데 나 혼자만 긴장이 풀어져 버리게 된 거였다. 그래서 8월 20일 시험일에 내 답안이 형편없게 제출되고야 만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아는 게 많고 말을 잘 해도 어차피 시험엔 기준이 있고, 우리 시험은 주어진 시간 안에 100점의 분량을 최대한 맞고, 보기 좋게 채워서 제출하면 그게 곧 지나간 모든 수험기간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의 나의 실수는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아 버렸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이론에서 합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실전답안 그 자체다. 감정평가사 합격을 위해서 면접시험이 있는 것도, 체력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유일한 당락의 척도는 답안지뿐이다. 그래서 첫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어느 정도의 사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바로 이 부분에 적합한 얘기다. 아는 것이 100이라도 120을 아는 것처럼 답안을 작성한다면, 그 사람의 실력은 100이 아니라 120인 것이다. 최소한 자기가 아는 만큼은 100% 답안에 반영할 수 있어야 억울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열심히 공부한 실력자들을 전제로 한 얘기다.

 

 

 

 

 

■도서목록 : 이 때까지 보았던 책들에 대해 열거하자면(스터디 외엔 어떠한 학원강의도 듣지 않았음),

①실무(3인공저/안정근/정영철/신체계/68회/감정원/단대기출/부고시3년분/학원팀장문제 등)

② 이론(방경식/안정근 평가이론 및 부동산학/전영주/허장식/김세중서브/기타서브)

③ 행정법(김동희/유지태), 법규(임형욱/유해웅/박평준/주종천/서정욱/김동건서브/기타서브)

 

 

 

 

그리고 불합격처분을 받을 때까지, 왠지 붙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어깨 쫙 펴고 학교생활(3학년 2학기)에 복학해서 열심히 다녔고,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12월 14일)에 함께 공부했던 후배로부터 불합격 소식을 왕십리 국철 안에서 들었다. 이론점수의 저조로 인한 평균 미달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방황 후 12월 29일에 다시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던 감정평가사 재수를 결심했다.

 

4. 3년차(2001년)~12회시험 동차 & 합격

 

 

 

동차는 정말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졸업설계도 하고, 토익점수까지 어느 정도 올리고, 동차합격까지 동시에 해볼까 하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꿈도 가져봤었지만, 이내 학교는 휴학을 했고, 접수했던 토익시험은 포기했고, 회계학 수강을 필두로 2001년 1월을 시작했다. 학원 스터디 선발고사 타이밍을 놓쳐 뒤늦게나마 낙하산을 타고 다시 노량진 H학원 스터디 1기에 들어갔다.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 모두 나의 팀장들이 되어 내 앞에 선 모습을 본다는 게 몹시 자존심 상했지만, 세상은 공평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노력해서 작년에 합격을 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을 하고, 단 한 번도 스터디에 지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1~2월이 지났다. 3월이 되니 슬슬 1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회계학은 기본강의를 들었으니 앞으로는 매일 문제를 풀면 될 것 같은데, 다른 과목들은 애당초 시간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가 너무 막막했던 것이다. 올해의 동차생들은 특히 영어가 추가되어 더욱 난감하겠지만. 아무튼 당시 7과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름하여 사법고시생)이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실무는 매일 200점을 풀기로 하고(내겐 다행히 든든한 개별 스터디 조직이 있었다!) 이론법규는 스터디 가기 전날 오후부터 저녁까지 잠깐만 보기로 했다. 그리고 경제학 테이프(정병렬)과 회계학 문제집(김상운)을 주로 풀며 3월을 보냈다.

 

 

 

 

아차, 나의 수험생활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2월 중순에 드디어 2년 남짓의 학교 도서관 수험생활을 떠나 봉천동으로, 그리고 한 달 후 신림동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맹모삼천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지만, 학교는 돈이 적게 들고 친숙한 환경이 좋다면, 봉천동은(노량진보다야 쾌적하지만) 좀 열악하지만 감정평가사 위주의 뜨거운 학습열기가 있는 곳이고, 신림동은 일단 돈이 많이 들지만 그 이상으로 환경이 참 좋은 곳이다. 여기서의 환경은 의식주 및 음주가무를 비롯해 첨단산업(통신 및 PC방, 비디오방) 환경을 포괄하는 개념임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스터디 1기가 끝나고 2기에 돌입하기 전 약간의 갈등을 했지만, 다행히 2기 장학생으로 선발돼 2기에도 당연히 참여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1차와 관련된 특강 같은 수업 때문에 2기는 반 가까이 빠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최소한 2기까지 모두 들어도 크게 1차가 위험할 것 같지 않다. 그렇게 2기가 끝나니 어느덧 6월, 이제 1차가 한 달 남았다. 이 때부터는 1차 공부에 전념했다. 실무조차 풀지 않았는데 이거 역시 지금 생각해 보면 실무만큼은 좀더 풀었어도 괜찮을 뻔했다. 아무튼 4월부터 시작한 민법(나도연 강의/조병욱 책), 5월부터 시작한 부관법(공민달 수업/조병욱 책)으로 법 과목의 점수가 생각 같지 않았으나 6월 중순이 되니 평균점수가 70점을 넘나들게 되어 안심을 하고 7월 1일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당일 오후 늦게 나온 H학원 가답안으로 맞춰본 결과 75점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신림동으로 돌아가 2차만 공부하던 개별 스터디 팀원들에게 모처럼 만에 한 턱 쐈다.

 

 

 

 

1차 시험 본 뒤 만 이틀 후엔 본격적인 2차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그 전부터 함께 공부했던 2차만 하던 대여섯 명이 있는 개별 스터디 팀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우선 실무부터 시작하여 2주 정도만에 지난 2기 때 수준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6주간은 우리 시험장소인 서울대에 가서 실전경험을 쌓기로 하고, 6주차에 해당하는 과목별 예상문제를 팀원들과의 합의 하에 만들었고, 매주 일요일 시험시간에 맞춰 서울대의 한 강의실에서 우리가 뽑은 문제로 시험을 봤다. 나로선 2기 이후로 제대로 못했던 쓰는 연습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었다. 시험이 임박한 마지막 주엔 온 신림동 바닥이 들썩였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시험정보로 결국엔 하나도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신적, 시간적인 낭비만 초래한 불필요한 정보들 뿐 이었다고 판단된다.

 

 

 

아무튼 시험 전날엔 우황청심환을 먹고 밤 11시 정도부터 아침 6시까지 푹 자고 상쾌한 기분으로 서울대로 갔다. 시험장에 갔더니 역시나 우리 시험장은 탁구라켓(작고 기울기가 큰 책상겸 의자)이었다. 다행히 우리 시험장 복도에 평평한 책상이 몇 개 있었고, 다른 건물에서 수험생 몇 명이 그걸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가볍게 내 책상을 바꿨다. 그리고 전통대로 1교시 시작 전에 실무문제를 25점 풀었다(강력한 예상문제였던 DCF). 그리고 1교시 시험이 끝났다. 절망적이었다. 점심 같이 먹기로 한 형들에게 차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연못가에서 드링크제를 한 병 마시고 2교시 그리고 3교시를 최선을 다해 봤다. 시험이 다 끝나고 술자리에서 안 사실이지만, 실무 1번 문제에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고 정확히 풀지도 못해 그 이후 문제는 그야말로 손 가는 대로 휘갈겨 겨우 다 풀고 난 후의 내 좌절감은 시험 본 다른 사람들(거의 모든)의 공통된 감정이었고, 오히려 나는 그들보다 잘 풀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됐건 8월 26일로 시험은 끝나고 9월에 난 어느덧 세 번째 복학을 했고(4학년 1학기) 그 학기가 끝날 무렵(역시 마지막 기말고사 본 날 오후 늦게) 작년에 합격한 후배로부터 합격소식을 들었다. 참고로 합격하면 발표 며칠 전부터 전화가 폭주하지만, 불합격이라면 자신이 직접 확인하기 전엔 발표 날 이후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도서목록 : 3년 동차를 공부하면서 추가로 본 책은 별로 없다. 실무(핵심/ 「월간」감정평가사문제/팀장문제), 이론(팀장서브), 법규(임호정논문집/팀장서브). 오히려 동차를 시작하면서 초반(설날 전후)에 전년도 내 서브를 워드로 정리한 3과목 각각 한 권씩의 손바닥 크기의 서브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암기했다. 7과목을 동시에 가방에 담을 수가 없다.

 

 

 

 

 

 

Ⅴ. 수험기간 중 공부 이외의 생활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의 한계 극복에 관한 문제이리라. 나는 좀 큰 키에 마른 체구로 좀 약해 보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정신력이 체력을 극복하는 더 큰 힘이라 생각한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면 최소한 환절기 감기 따윈 지나칠 수 있고, 과음을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꾸준히 간단한 Push-up이나 아령 같은 건 매일 기상 후나 취침 전에 꼭 했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다(12시 반 취침 7시기상). 일요일에도 반나절 정도 공부하고, 반나절 정도는 정기적으로 영화관람(신림동은 이게 좋다=비디오방이 싸다)하고, 가끔 친구들을 만났다(신림동으로 면회 온다). 스트레스 풀기엔 술보다는 영화관람을 권하고 싶다.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뒤끝 없이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일주일간 공부하는 데 원동력이 된다. 경제적 능력이 된다면(안 되더라도) 가급적 몸에 좋은 것도 주기적으로 먹어 주는 게 남는 거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시험 한 달 전 같이 공부하던 누나랑 보약을 반 재 나눠먹은 적이 있다. 물론 그 효과는 시험이 끝나고 나타났지만...

 

 

 

결론적으로 항상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운동을 하고, 좋은 영화를 정기적으로 보거나 가벼운 등산도 괜찮겠다. 어쨌든 수험기간에는 시간이나 체력이 많이 소비되는 활동(축구나 여행, 과음 등)은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계획적인 삶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같은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계획을 짜서 생활한 사람과 그냥 산 사람은 결과적으로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게다. 하루는 3등분(오전 오후 저녁을 각각 4시간씩) + α(이동시간/식사시간/자기 전 등) 해서 생활했고, 그러면 하루 공부시간은 평균 13시간 정도였던 것 같고, 주 단위, 월 단위, 연 단위 계획을 각각 유기적으로 세우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Ⅵ. Epilogue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드라마를 좋아한다. 3년차 동차를 준비하던 시절 고시원에서 자기 전에 매일 나는 합격수기를 썼다(마음속으로). 그 때의 기분대로라면 좀더 드라마틱하게 쓰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동차생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자 많이 자제했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제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라면,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겠노라고 얘기하고 싶다. 내가 이 글 초반에 수험생활을 제2의 군생활로 간주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둘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불확실성이라는 것이다. 군대야 시간만 지나가면 제대하는 건 확실하지만, 수험생활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도 합격한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즉 세상은 공평하다는 믿음과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피나는 노력과 최후 시험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합격한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이야기하라면 군대 제대하던 날이었다. 하지만, 감정평가사 시험 합격(제2의 제대)은 그보다 몇 배 더 기쁘다. 이것 또한 군생활과 수험생활의 큰 차이점 중 하나다. 모두들 이러한 기쁨을 꼭 맛보시길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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