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들어가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안다는 것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난 감정평가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1년 반 동안 공부를 했고, 무사히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나 나름대로 힘들었던 순간들도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 항상 나를 믿어 주시던 부모님과 나의 투정을 받아 주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순간들을 무사히 넘겼던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이 합격수기를 써야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자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盡人事待天命이라고, 시험 역시 내가 할 일을 다 한 후에 나머지는 운이 작용하는 것 같다. 난 여전히 내가 운 좋게 합격했다는 생각을 하기에 감히 수험생들 앞에서 어떠한 조언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사람들의 합격수기를 읽어보았는데, 대부분 공부방법들을 써 놓았던 것 같다. 그 분들의 방법들이 모두 옳을 수도 있고, 모두 틀릴 수도 있다. 그건 개개인의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서 공부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이래저래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부딪혀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내가 공부했던 방법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내가 겪어온 시행착오들을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가 겪은 수험생활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난 수학적인 것과 눈에 딱 보이는 것을 좋아하기에 공부할 때도 그러한 방법을 이용했다. 일단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에 적응하기 전에는 하루에 10시간이라는 공부시간을 정해 놓고 시간을 재어 가며 10시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가서 쉬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유혹들을 뿌리치고 묵묵히 공부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하는 관성이 생겨 시간을 재지 않고도 그 정도 공부할 만큼 되었을 때부터는 하루의 진도를 정해 놓고 그 분량을 공부했다. 그런 후에 고시원으로 향할 때는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물론 하루 하루의 계획도 있지만 일주일, 한 달의 계획도 설정하는 것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과도한 일정보다는 일단 여유 있게 목표를 잡고 서서히 해 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인 거 같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보면 공부에 탄력이 생기고, 그런 후에 학습량을 늘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Ⅱ. 2000년 감정평가사 1차 시험
1차 시험의 과목(민법, 부동산관계법규, 경제원론, 회계학)을 보니 무척이나 낯선 과목들이었다. 일단은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 단시간 내에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기들의 조언을 얻어 노량진의 모 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1월, 2월 두 달 과정이라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수업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하루에 4~5시간 정도 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실내 공기도 안 좋고 의자도 불편해서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체 잠도 많던 내가 공부한답시고 잠을 줄이다 보니 하루에 1시간 동안은 매번 잤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경제원론과 회계학 시간만큼은 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목들은 공대생인 나에겐 신천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놓치면 정말 복습하기가 힘들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수업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사님이 했던 말-예습은 열심히 해도 잘 모르니, 복습만큼은 철저히 하라-처럼 복습 위주로 공부를 했다. 복습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생각되는 암기과목보다는 경제원론, 회계학을 중심으로 저녁 수업을 받기 전에 공부를 했다. 공부 장소를 딱 정해서 공부하지 않고 동네 독서실, 인근 대학 도서관을 전전하며 공부해서인지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어려웠다. 솔직히 그 땐 공부하기가 싫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두 달 과정이 다 지나고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난 1차 공부를 할 땐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물론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학교공부를 열심히 안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한 학기를 보낼 수 있었다. 동료들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3월이 되어 다시 경제원론, 회계학을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져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앞으로 시험은 4개월 남짓 남았을 뿐인데....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맘을 굳게 먹고 집을 나와 고시원에 들어가면서 핸드폰도 해지했다. 사실 학교에서 집까지 30~4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시간조차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꾸준히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아 몇 달만 참고 고시원에서 승부를 보자는 맘을 먹었다.
고시원 첫날밤은 왜그리 서럽던지.... 왜 편한 내 집을 놔두고 이 비좁은 고시원에서 잠을 자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다시 군대에 왔나 라는 생각도 들고, 하여튼 이런 저런 생각으로 그 날 밤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처음엔 몇 평 안되는 비좁은 방에서 시작하지만 두고 보자 앞으로 열 배, 백 배 되는 집에서 살도록 이 악물고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3, 4월에는 학교수업을 들으면서도 나머지 시간들을 잘 활용해 열심히 공부했다. 우선 경제원론, 회계학이 시급하기에 두 과목을 집중적으로 했다. 회계학은 학원교재와 이효익 교수님의 문제집을 가지고 공부했고, 경제원론 역시 학원교재와 정병렬 교수님의 문제집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복습했던 것이 도움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 하기 싫었던 두 과목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일단 흥미를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점수도 올라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문제를 풀면 틀린 답보다 맞는 답이 더 많고 자신감도 생겼다.
5월이 되면서 이제 민법과 부동산관계법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문제집보다는 학원 다닐 때 공부했던 조병욱 교수님의 책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런데 두 과목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민법은 재미가 있어선지 점수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는데, 남들이 전략과목이라고 하는 부동산관계법규는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그래도 5월 중순경에 본 모의고사에서 합격권에 들었다.
6월이 되어 날도 더워지고 학교에 여러 가지 행사가 있다 보니 나의 마음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와 맞물려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선배들, 동기들의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니 일년 후의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앞으로 일년을 더 저렇게 보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두려웠다. 난 그렇게 해서 긴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 달 여를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시험 전날 그래도 시험은 합격해야 좋은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믿는 종교도 없으면서 기도를 했다. 2차 시험에 합격시켜 주실 거면 내일 시험 잘 보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않으실 거면 떨어뜨려 주세요 라고....
참 이기적인 나의 기도였지만 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회계학이 의외로 높은 점수를 얻었고 과락을 걱정했던 경제원론에서도 어느 정도의 점수가 나왔다.
Ⅲ. 2000년 감정평가사 2차 시험
합격 소식을 듣고도 ‘아까우니까 2차 공부를 해야겠다’는 맘만 들 뿐, 1차 공부기간 마지막 슬럼프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9, 10월에 노량진의 학원에서 2차 종합반 강의를 들었다. 실무는 재미가 있었지만 법규와 이론은 너무 재미가 없고 졸리기만 했다.
그래서 10월에는 실무 강의만 듣고 나머지 과목은 그냥 혼자 하기로 했다. 11, 12월 달에는 친구를 따라 학교 선배인 재진 형, 정훈 형의 강의와 법규 수업을 들으러 서울대역 근처의 학원을 다녔다. 학원을 다니면서도 내 마음속에서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머리도 따라가지 않았다. 그렇게 4개월을 보내고 2001년 1월부터 노량진의 학원에서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스터디를 한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나와 같은 배를 탄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공부하는 방법도 보고, 그들의 실력도 보면서 장난이 아니구나,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구나 라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다시 학교 앞 고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스터디 반에서 모의고사를 치르는 것은 나에겐 매우 심한 벌이었다. 정말 쓸 말도 없고 채점 후의 나의 답안지를 받아 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래도 실무만 잡자 라는 생각에, 시중에 나와 있는 실무문제집과 지난 스터디 자료 등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실무 점수는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스터디 1기 말부터 오르던 나의 점수는 2기에 접어들면서 진정으로 원하던 일등도 한 번 해보고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실무에 자신이 생긴 그 다음부터는 암기과목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암기과목을 싫어하기도 했을 뿐더러 시간도 부족한데다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실무 공부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법규를 60%, 이론을 30% 정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실무는 공부하면서 재미도 있고 점수도 많이 오르던데, 두 과목은 왜 그리 하기 싫던지.... 시간이 촉박해 두꺼운 책을 공부하기보다는 선배들이 물려준 스터디 자료와 스터디 시간에 나눠준 유인물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만 책을 통해 공부했다. 하지만 2기 막바지에 가서도 두 과목에 대한 자신도, 점수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6월 스터디 3기에 접어들었다.
날씨는 더워지고 왜 그렇게 암기과목은 외워지지 않던지, 1차 시험 마지막의 그런 심한 슬럼프는 아니지만 약간의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체력의 한계로 몸은 힘들고, 덩달아 머리회전속도도 뚝 떨어졌다. 힘들어서 그런가 싶어 하루 이틀 쉬어봐도 상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전의 슬럼프가 정신적인 거라면, 이번엔 체력적인 슬럼프이기에 힘들어도 책상에 앉아서 꾸역꾸역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3기 모의고사에서 나의 문제는 여실히 드러났다.
실무는 그럭저럭 점수가 나왔지만 이론과 법규는 내가 잘 아는 부분이 아니면 과락의 점수가 나오기 일쑤였다. 마음은 조급해져서 실무는 거의 제쳐 두고 이론, 법규 두 과목만 공부했다. 그래도 3기 마지막까지 점수는 많이 오르지 않았다. 스터디 3기가 끝남으로써 모든 스터디 과정이 끝났지만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드디어 8월말 시험날이 되었고, 솔직히 난 그 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제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맘이 편했다. 물론 합격할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제 한동안 공부 안하고 놀아도 되는구나 라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12회 시험에서는 특히 실무가 어려웠다. 근 2~3개월 동안 암기과목을 위주로 공부하고 실무는 거의 손을 놨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10점 이상을 풀지 못했고, 그나마 푼 문제들도 정답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실무 시험이 끝나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 동안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 그냥 시험을 계속 보기로 했다. 실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머지 두 과목은 한 두 문제를 제외하고는 매우 평이하게 나왔다.
그리고 몇 달 후 동기로부터 합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한 느낌이었다가 일순 가슴이 벅차 올랐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을 생각해 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Ⅳ . 마무리
시험이 끝나고 난 후 난 이런 생각을 했다. 물론 합격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만약 떨어지더라도 지난 1년 반의 경험은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말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 역시 평범한 인간이고,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수험생활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옳은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수험생들께 감히 한 마디 하자면, 자신을 믿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말이다.
끝으로 내가 공부하는 동안 나를 끝까지 믿어주셨던 부모님, 경일 형, 성호, 정규, 영신 형, 우현, 건호, 성아, 민희, 경탁 형, 강수 형, 재진 형, 정훈 형, 진식 형, 정미, 창희, 요한 형, 보성, 범석, 재무, 재진, 성식, 현석, 대영 형, 용훈, 병우, 지호, 동형, 스터디 팀원들,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려준 여자친구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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