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로빈, 유렉스, 헬프미, 로보 등
법조계도 인공지능 도입 활발
단순업무 인공지능이 처리하면
수임료 낮아지고 시간 절약
소비자에게는 ‘문턱’ 낮춰줄 것
변호사업계에는 양날의 칼
권위·수익구조 흔들릴 위험
“30년 뒤 없어질 직업” vs
“인간 대체하긴 어려워”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 ‘알파고 충격’ 이후 인공지능(AI)이 기존 직업과 산업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법조계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법률 서비스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 부동산 권리분석을 해주고, 법률과 판례를 찾아주고, 간단한 서류도 작성해준다. 국내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외국에서는 법률상담, 범죄수사, 재판에까지 활용된다. 인공지능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언젠가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공지능 변호사의 등장은 법률 서비스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키게 될까? 브로커, 전관예우, 높은 수임료 등 국내 법률 시장의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
‘로빈’을 불러냈다.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ㄱ아파트 ㄴ동 ㄷ호.”
로빈에게 전세로 들어가고 싶은 집의 주소를 줬다. 1분도 걸리지 않아 로빈이 답을 내놨다.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로빈은 “이 아파트는 지난 7월 ㅅ은행에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다”며 “경매에 넘어갈 경우 보증금을 챙기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을 경우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은 후순위로 밀리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고 싶은데 나중에 보증금을 안전하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싶어 서류를 떼어봐도 암호 같은 단어들이 많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로빈이 필요하다.
로빈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안전장치를 해야 할까?”
“이 아파트의 현재 소유자에게 보증금을 전부 내기 전까지 저당권을 없애라고 요구하거나, 저당권 액수 금액을 뺀 금액을 상한선으로 해서 보증금 액수를 정하는 방안 등을 활용하라.”
로빈은 부동산 권리분석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법무법인 한결이 최근 에스케이씨앤씨(SK C&C), 부동산 거래 애플리케이션 ‘다방’과 협력해 만들었다. 현재는 다방의 파트너 공인중개사들에게 시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이 서비스는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매물 주소와 거래 유형, 금액 등 간단한 정보만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법률전문가의 전문성이 반영된 부동산 권리분석 보고서를 금세 만들어 제공한다는 점이다. 또 인공지능 스스로 위험성 정도를 판단해 해당 부동산 최종 평가 점수를 △안전 △안전 장치 필요 △위험 △위험 현실화 등 네 등급으로 나눠 표시한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다. 로빈은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을 기반으로만 분석하기 때문에 해당 부동산의 시세 정보는 고려하지 않는다. 근저당권에 대한 분석도 부족하다.
인공지능 변호사의 ‘취직’
“학교에서 최근 리모델링을 했는데 새로 만들어진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가 터무니없이 적다. 남는 공간이 있는데도 여자 화장실 대변기가 5개니까 남자 화장실에 대·소변기도 5개 넘게 설치를 못 한다고 한다.”
지난 19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실제로 올라온 글이다. 이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 글이 공유되며 이러한 법이 실제로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정말 ‘여성 화장실 용변기 수는 남성 화장실 대·소변기 수보다 같거나 더 많이 설치해야 한다’는 현행법이 있는 걸까. 이 법은 어떤 검색어로 찾을 수 있을까.
‘남자 소변기 개수가 적은 이유’라고 인공지능 법률 서비스 ‘유렉스’(U-LEX)에 물어봤다. 이런 것도 유렉스가 알려줄 수 있을까. 유렉스는 순식간에 관련 법과 조항까지 찾아줬다.
“현행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제7조(공중화장실 등의 설치기준)와 같은 법 시행령 제6조에 따르면 공중화장실은 남녀 화장실을 구분해야 하며 여성 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 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해야 한다. 수용 인원이 1000명 이상인 공연장, 야외극장, 공원 등의 공중화장실의 경우 여성 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 화장실 대·소변기 수의 1.5배 이상이 돼야 한다.”
유렉스는 궁금한 법률적 쟁점에 대해 간단한 문장을 입력하면 원하는 답과 관련 자료들을 시각화해 표현해준다. 관련 법령이 거미줄과 같은 관계망으로 표시되고, 관련 판례들이 차례대로 제시된다. 유렉스 제공
한국의 첫 ‘인공지능 변호사’라고 할 수 있는 유렉스는 지난 2월 법무법인 대륙아주에 ‘취직’했다. 유렉스는 그동안 변호사와 법률 비서 여러 명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달씩 걸려 작업하던 법 조항·판례 검색 등 사전 리서치 업무를 20~30초 만에 해치우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Go)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선보여 전세계에 충격을 준 지도 2년이 지났다. 이후 인공지능은 의료, 교육, 기업, 공장 등 다양한 분야에 속속 도입되며 직업과 산업 현장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법률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서비스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변호사와 인공지능 전문가들로 구성된 인텔리콘 메타연구소(대표 임영익 변호사)는 지난해 유렉스와 ‘로보’(Law-Bo)를 개발했다. 유렉스는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로 내용을 입력해도 법률적 논리에 맞춰 이해한 다음 사용자가 궁금해하는 내용에 가장 가까운 관련 법령이나 판례를 찾아 보여주는 서비스다. 로보는 청탁금지법(김영란법)에 특화된 질의응답 시스템이다. 어떤 행위가 부정청탁에 해당하는지에 관련된 질문을 하면 로보가 그에 맞는 답을 찾아준다. 앞으로 공정거래 분야, 개인정보 등으로 분야를 확장할 예정이다.
국내 온라인 법률상담 플랫폼 기업인 ‘헬프미’(HELP ME)는 2016년 인공지능을 활용해 지급명령 신청서를 자동 작성하고 법원에 제출하는 ‘지급명령 헬프미’ 서비스를 만들었다. 지급명령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가 법원에 해당 내용을 기재해 신청서를 제출하면 법원이 이를 검토해 상대방인 채무자에게 돈을 지급하라고 명령하는 제도로 민사소송법상 독촉 절차에 해당한다. 지급명령 신청은 별다른 증빙서류 없이 신청서만 작성해 내면 되기 때문에 절차가 간단하고 일반적인 채무를 비롯해 용역대금, 체불임금 등의 영역에서 두루 쓰인다. 하지만 막연히 신청서 작성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수십만원씩 비용을 내고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맡기는 사람이 많다.
‘지급명령 헬프미’는 이용자가 이해하기 쉬운 몇가지 질문에 응답하면 신청서가 자동으로 작성되는 서비스다. 이용자가 지급명령 헬프미 사이트에서 △얼마를 빌려줬나 △언제 빌려줬나 △언제 돌려받기로 했나 등의 질문에 답변을 작성하면 지급명령 신청서가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비용은 한장당 3만9000원 정도다. 최근 헬프미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법인등기, 제소 전 화해 서비스 등도 제공한다. 그밖에 ‘제법 아는 언니’, ‘리걸인사이트’, ‘로톡’ 등의 온라인 법률상담 플랫폼도 인공지능을 이용해 일반인의 법률 관련 질문에 답변해주고 법률문서를 작성해준다.
법원·법무부도 가세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다. 법무부가 내놓은 ‘버비’는 ‘대화형 생활법률지식 서비스’다. 지난해 나온 1세대 버비는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부동산·노동 분야의 법률과 판례를 제공했다. 카카오톡에서 버비와 친구를 맺어 대화하듯 질문하면 대답해준다. 지난 3월에는 2세대 버전이 나왔다. 상속 분야 서비스가 새로 들어갔다.
법원도 이런 흐름에 뛰어들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현재 ‘지능형 개인 회생·파산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이 시스템은 변호사나 브로커에 의지해야 했던 개인 회생·파산 신청을 연말정산 신청같이 간편하게 바꾸는 게 목표다. 대법원은 기존 개인 회생·파산 시스템에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접목해 개인들이 법률 대리인 도움 없이도 회생·파산을 신청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지난 3월부터 법원은 2024년 시행을 목표로 ‘스마트 법원 구현을 위한 차세대 전자소송 시스템’도 개발하고 있다. ‘스마트 법원’이 완성되면 스마트폰만 있으면 집에서도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인공지능 챗봇이 24시간 소송 절차와 소장 작성, 소송서류 작성을 도와 ‘나홀로 소송’을 지원하고, 스마트폰 앱으로 온라인 법정에 접속할 수 있어 집에서도 재판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국내 법조계에도 인공지능 바람이 불고 있지만 아직은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법률이나 판례 검색을 좀 더 쉽게 도와주거나, 상대적으로 내용이 간단한 특정 분야의 문서 작성을 도와주는 정도다.
미국 등 국외에서는 법률 분야 인공지능 활용이 좀 더 앞서가고 있다. 계약서 등 법률 서면을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프로그램은 흔한 일이 돼가고 있고, 재판과 수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미국 뉴욕의 100년 전통 로펌인 ‘베이커 앤드 호스테틀러’에 ‘채용’돼 화제를 모았던 인공지능 변호사 ‘로스’는 초당 10억장의 판례를 검토한다. 사람의 일상 언어를 알아듣고 법률 문서를 분석한 뒤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콤파스’는 법정에서 폭력 사범인 피고인의 재범 가능성을 분석해준다. 영국에서는 인공지능이 범죄 수사에도 쓰인다. ‘레이븐’은 사기·부패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분류해 요약하는 작업을 주로 한다. 지난해 영국 중대범죄수사청(SFO)은 자동차 제조사인 롤스로이스의 불법 로비 혐의를 수사하는 데 ‘레이븐’을 활용하기도 했다.
리걸테크법 추진…변호사업계 반발
“최근 ‘에이아이 변호사’가 현장에 투입되는 등 법조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법률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1100여개의 리걸테크 기업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현행법은 변호사 아닌 자가 법률문서 자동생성 프로그램 서비스를 제공하면 비변호사의 법률사무 취급에 해당하여 법률 위반이고,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변호사로부터 수임료를 배분받는 경우는 동업 금지 위반으로 처벌되는 등 법률 서비스 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변호사법 일부 개정안 취지 설명 중)
법조계에서 인공지능 활용이 확대되자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을 결합한 ‘리걸테크’(legal-tech)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변호사와 비변호사 간의 동업 금지, 이익분배 금지 규정을 완화하는 입법이 추진됐다.
현행 변호사법은 변호사 업무와 관련해 변호사와 변호사가 아닌 자의 동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동업 결과 발생하는 보수나 이익의 분배도 금지된다. 위반하면 변호사 아닌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변호사는 공범으로 처벌되진 않지만 징계를 받게 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정성호 민주당 의원이 지난 8월 공개한 변호사법 개정안은 변호사가 아닌 자도 법률문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단순한 법률문서를 자동생성·제공하는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서비스 제공 대가로 변호사와의 이익 분배도 허용했다.
변호사업계에서는 정치권의 이러한 움직임에 큰 위기감을 나타내고 있다. 로스쿨 도입 이후 가뜩이나 변호사 수가 증가해 경쟁이 치열해진 상태에서 이제는 인공지능 기업과도 수익을 나눠야 할 처지가 될 수 있어서다. 한국법조인협회는 “리걸테크기업과 변호사의 동업을 허용하면 자본력과 기술력을 가진 소수의 기업이 변호사를 매개로 법률 장사를 할 것”이라며 반대 성명을 냈다. 정 의원의 개정안은 변호사 업계의 반발로 결국 발의되지 못했다.
내년 판결문 공개되면 가속도
국내 법조계의 인공지능 법률 서비스가 법률·판례 검색, 간단한 질의응답, 문서 작성 대행 정도에 머물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인공지능 기술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법률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기술 중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은 훈련 데이터를 가지고 컴퓨터를 먼저 학습시켜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정보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한 기술이다. 머신러닝 기술 중 딥러닝(Deep Learning)은 컴퓨터가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해 마치 사람처럼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공 신경망을 기반으로 구축했다. 즉, 데이터가 있어야 머신러닝, 딥러닝이 가능하다.
이상민 법무법인 헬프미 변호사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려고 하는데 재료가 없어서 못 만든다”며 “최소 10만건 이상의 법률 데이터가 있어야 인공지능이 학습해 결과를 내놓는데 법원의 판결문 입수 자체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한결의 법률에이아이(AI)팀 소속인 추새아 변호사는 “인공지능은 판결문을 예시로 학습을 하는데, 기술 개발을 하다 보니 인공지능이 학습할 판결문 자체가 너무 적었다”고 말했다. 현재는 판결문을 보기 원할 경우, 각 법원 누리집(홈페이지)에서 사건번호와 피고인 이름을 입력해야 한다.
내년부터는 사건번호와 피고인 이름을 입력하지 않아도 법원 누리집에서 각급 법원의 확정된 형사판결문을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법조계에서는 형사판결문 공개가 인공지능 법률시스템 발전에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임영익 변호사는 “어떤 방식이든 데이터 공개는 당연히 법률 인공지능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한결 법률에이아이팀의 강태헌 팀장(변호사)은 “공개된 하급심 판결문이 너무 적어서 그동안 발전이 더뎠다”며 “형사판결문이 공개되면 교통사고나 폭행 사건 같은 사실관계가 비교적 단순한 사건에서는 양형 예측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법률 서비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률 소비자, 시간·비용 줄어
“공사장 인부인 아버지가 사다리차에서 떨어져 사망했어요. 이런 경우 사장에게 어떤 책임을 물 수 있나요?”
일단 어떤 법을 적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사다리차’로 검색해보지만 꼭 들어맞는 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다리차’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지만 법률 용어로는 ‘고소작업차’다. ‘산업재해’ 전문가가 아니라면 변호사도 알기 어려운 용어다. 또 특수 분야가 아니라고 해도 일반 시민이 법률 용어를 찾아가며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변호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 변호사 아닌 사무장이 먼저 의뢰인을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 수임료 역시 만만치 않다.
만약 인공지능 변호사라면 어떨까. 인공지능은 일상적인 표현으로 질문을 해도 법률적 논리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변호사를 만나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변호사들도 기존의 법률지식, 판례, 연구결과 등을 찾아내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이 구실을 인공지능이 해준다면 변호사뿐 아니라 법률 소비자 입장에서도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헬프미’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지급명령, 법인등기, 제소 전 화해 절차 수수료를 기존 대비 20~30%가량 낮췄다. 소모적인 단순 업무를 인공지능으로 처리하고 단순한 업무인 경우 실제 변호사 사무실에 방문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과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
인공지능 법률시스템이 활성화되면 브로커(법률 소비자에게 수수료를 받고 변호사를 연결해주는 사람)가 개입할 여지도 줄어든다. 특히 개인 회생·파산 분야는 절차가 복잡해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야였고, 실제로는 브로커가 잠식하고 있는 분야였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통해서 혼자서도 이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면 브로커나 변호사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어진다. 대법원이 ‘지능형 개인 회생·파산 시스템’을 개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전문가들에게 독점됐던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는 ‘정보 활용의 민주화’를 촉진할 것이다.
변호사 등 법률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 보면 인공지능 활용은 양면적 성격을 갖는다. 인공지능이 업무에 활용되면 로펌은 비용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인공지능 변호사 유렉스를 사용하고 있는 대륙아주의 김형우 변호사는 “건설, 교육, 의료 같은 분야는 특수 분야라서 변호사들도 따로 연수를 받는다”며 “연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검토를 해야 할 때 유렉스를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방대한 자료를 검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그동안 경력이 짧은 변호사들이 주로 맡아온 업무를 인공지능이 수행할 경우 의뢰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임료도 줄어들 수 있다. 더 장기적으로 보면 그동안 독점해온 법률지식에 대한 ‘문턱’이 낮아짐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나 수익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임영익 변호사는 “인공지능은 브로커와 전관예우가 만들어내는 법률 생태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들도 막대한 광고비를 지출하거나 브로커에 의존하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재판에도 활용
인공지능은 변호사가 제공하는 법률 서비스를 넘어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 업무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검사가 노스포인트(미국 스타트업 회사)가 만든 인공지능 ‘콤파스’를 활용했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을 이용한 판결은 부당하다.”
2013년 2월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총격사건에 사용된 차를 운전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은 에릭 루미스가 밝힌 항소 이유다. 콤파스는 “루미스의 폭력 위험과 재범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고 검사는 이를 인용해 중형을 구형했다. 루미스 쪽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인공지능을 근거로 한 선고는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콤파스의 보고서는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법률 영역에서 인공지능을 인정한 첫 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7년 미국 뉴저지주 형사 법원에서는 피의자의 공판 전 보석에 대해 인공지능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공중 안전 평가’(PSA·Public Safety Assessment)라고 불리는 이 인공지능은 축적된 150만개의 데이터를 통해 도주 위험이나 범죄 가능성 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 인종·지역·재력 등의 요소를 전부 배제해 중립적인 평가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이는 인공지능이 판사의 의사결정을 도울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난 6월27일 대한변호사협회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AI와 법률시장의 미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대한변협 제공
변호사 직업의 소멸?
인공지능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16년 유엔 미래보고서는 향후 30년 인공지능에 대체될 주요 직업군 가운데 하나로 변호사를 뽑았다. 다보스포럼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 중 하나로 법조인을 거론했다.
‘인간 법조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인공지능 법조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판사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해에만 60건가량 올라왔다. 지난 6월 대한변호사협회가 한 설문조사에서는 국민 10명 가운데 6명꼴로 사법부 재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아직은 인공지능 판사가 내린 결론을 인간 판사가 내린 판결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법조인이 많다. 인공지능과 사람이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혼 등 가사사건에서는 자녀의 복리나 청소년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판단’이 더 중요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일반적인 민형사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건 유형에 따라 범행 전후 사정을 두루 살펴 형량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변호사 업무와 관련해서도 이상민 변호사는 “법률문서 작성과 리서치 일부는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으로 일을 해도 결국은 사무실로 전화가 오더라. 변호사와 직접 통화하고 확인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은 인공지능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인공지능 법조인을 기대하는 이유는 인간보다 더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역시 인간이 입력한 데이터를 갖고 학습하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임영익 변호사는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은 복잡한 법적 상황을 이해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다 인공지능 판사를 개발하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프로그램도 편견을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