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서서히 그러나 격렬하게, 나는 변해왔다
질문 없는 학교, 우리 사회의 축약판
학교의 거짓말, 인성
학교의 거짓말, 공부
학교의 거짓말, 가난
나도 맞았고, 나도 때렸다
폭력은 학교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학교폭력만 비난하는 그들에게
M이 희망하는, 교사의 자리에서
선거는 끝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교사와 학부모는 왜 맨 얼굴로 만나지 못할까
지금 이곳의 세월호를 말하라
질문 없는 사회, 우리 학교의 확장판
이 세상에 질문하는 몇 가지 방법
이 교과서를 만든 그들은 누구인가?
대중에게 쉽게 살해되는 교사
지금 힘써 싸우는 사람을 비웃다
아름다운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권위적인 교사는 복종을 좋아해요
학력 우수생의 나라에서 교사로 살아가기
질문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불온한 책 읽기
책 읽기에 대한 짧은 생각
한 권의 책이 사람을 흔들 수도 있다:『전태일평전』
나는 지도당하고 싶지 않다:『지식인을 위한 변명』
악의 평범성과 말의 쓸모:『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텅빈말의 껍질과 구경꾼들:『아큐정전』
인간의 배후를 지워버린 교육:
『마르크스 프로이트 평전: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이식된 언어와 제작된 주체:『열녀의 탄생』
불의한 권력을 바라볼 용기:『삼성을 생각한다』
가만있지 마라, 질문하라, 비판하라, 저항하라!
그래야 희망할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다.
어느 시골학교 교사의 학교와 세상을 깨우는 사색과 질문들!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에게 행복한 곳이 아니다. 학생들은 그저 줄 세우기에 급급한 경쟁교육에 하루하루 지쳐갈 뿐이다. 시골교사 황주환은 어떻게 학교가 학생들에게 억압과 굴종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추적해간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왜 공부를 하고, 왜 대학에 가는지, 그리고 왜 두발을 비롯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지,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이미 학교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고 복종과 주입을 강요해왔고, 학생들은 5지선다형에서만 정답을 찾을 뿐이다. 저자의 깊은 문제의식은 여기 ‘질문 없는 학교’와 ‘질문하지 않는 학생’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첫 단초로서 질문의 절실함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학생들이 질문을 가져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모순을 극복할 해답도 제대로 된 질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질문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 된다. 학교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 이 책에 소개된 저자의 ‘불온한 책읽기’는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넘나들며 우리 자신과 세상을 깊고 풍성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또 질문하는 힘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삶으로 써낸 일선 교사의 자기고백적 글은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와 같다.
■ 책 내용
단숨에 읽었다. 아가리를 연 현장교사를 만나 무척 반가웠다.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그 지식인의 아가리 말이다. 많은 독자가 불온한 이 책을 통해 우리 교육, 우리 사회의 희망을 읽어내기를 바란다.
ㅡ홍세화(장발장 은행 은행장)
작은 읍내의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사의 폭력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부모의 이기심 탓에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교가 곧 우리 사회의 축약판임을 깨닫는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만 고민했던 그는 누구를 위해 가르치는가로 질문을 바꾸면서 절대로 다시는 굴종의 길로 들어설 수 없게 된, ‘깨달은 자’의 반열에 들었다.
ㅡ문정우(《시사인》대기자)
삶으로 써낸 일선 교사의 자기고백
학교를 통해 사회를, 사회를 통해 학교를 이야기한다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에게 행복한 곳이 아니다. 학생들은 그저 줄 세우기에 급급한 경쟁교육에 하루하루 지쳐갈 뿐이다. 학교는 즐겁고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일선 교사로서 이러한 교육현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온몸으로 느끼며, 어떻게 학교가 학생들에게 억압과 굴종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추적해간다.
하나의 직업으로서 교사가 되었던 저자는 아이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공감하면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점차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저자에게 학생들은 단순한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저자를 일깨우는 존재들이 되며, 교사라는 자리는 저자에게 새롭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각성의 과정에서 왜 학교가 굴종과 억압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또 학교가 바로 모순 가득한 한국사회의 축약판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가령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은 학교와 당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만, 사회의 폭력성이 결국 학교폭력과 맞닿아 있음을 밝힌다. 오늘날 학교폭력은 한국사회의 폭력이 밀려들어온 것으로, 자본과 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이 병든 것은 아이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또 무한경쟁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학교 또한 경쟁교육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학교는 사회와 연결되어 있기에 학교만 홀로 건강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학교와 교육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고는 너무도 먼 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비록 절망적인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이 인용한 노신의 글귀처럼 어디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바다. 커다란 담벼락을 무너뜨릴 작은 균열, 작은 변화 바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질문들
슬픈 우리의 학교 하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길어내다
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가르친다. 학생들이 소화하기에 벅찰 정도로 많은 지식을 학교에서 배운다. 표면상 그 지식들은 중립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는 교육 자체에 깊은 편향성이 있음을 제기한다. 국어교사인 저자는 가령 교과서에서 지겹게 반복하는 일제강점기는 다시 가르치라면서, 국가 기념일인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과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역사나 사회 교과서도 아닌 국어 교과서에 5·18과 6·10의 배경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투정할 일은 아니지만, 국어 교과서에서 70년 전의 일제 강점기가 배경과 주제로 숱하게 반복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차별의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교과서를 만든 그들은 누구인지 묻는다. 이런 문제제기는 요즘 뜨거운 현안으로 떠오른 국정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저자는 대중은 자기 이익을 표현할 자신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금,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동자, 파업, 계급, 자본, 국가, 인권 등 이런 언어의 실체와 사용법, 즉 이들 언어의 정치적 의미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언어들이 누구의 현실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이 언어들의 정치적 좌표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학교는 온전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중은 학교와 언론으로부터 익힌 언어를 자기 삶의 정답으로 받아들이지만, 하지만 학교와 언론은 대중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몸통이기에, 그렇게 제시된 언어로만 한국사회를 학습한 대중은 자기의 진짜 언어, 진짜 이익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 ‘질문 없는 학교’와 ‘질문하지 않는 학생’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첫 단초로서 질문의 절실함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학생들이 질문을 가져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질문하는 태도와 방법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마냥 긍정하거나 뭐 별것 있어 하면서 냉소적 태도로 일관할 때가 많다. 두발문제와 관련해 학생들과 토론하는 장면에서 저자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법과 질문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저자의 관점에서 교육이란 그런 능력을 지닌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질문은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질문이 우리의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모순을 극복할 해답도 제대로 된 질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질문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 된다. 저자의 독서에 대한 태도와 독서록은 질문하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불온한 책 읽기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독서
이 책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답고 말랑말랑한 이야기 속에서 감추어져버린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사실 교육은 체제의 입장에서 피교육자를 길들이는 속성이 있다. 저자에게 책읽기란 그러한 길들여져짐을 넘어서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실천 방법으로, ‘불온한 책읽기’로 명명된다. 살펴보면 세상의 위대한 것들은 모두 시대에 불온했다는 것이다. 예수도, 갈릴레이도, 마르크스도, 전태일도 모두 그러했으며, 바로 그들을 통해 시대의 핵심이 드러났다. 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불온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통찰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독서록은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소개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루쉰의 『아큐정전』, 강명관의 『열녀의 탄생』,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독서록은 하나의 서평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책 자체의 텍스트와 저자 자신의 삶과 성찰이라는 콘텍스트로 이어짐으로써, 하나의 책들을 더욱 깊고도 풍성하게 읽어내게 되고, 전태일, 아이히만, 아큐 등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선명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저자는 전태일과 마르크스를 읽음으로써 때로는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들 수 있음을 절감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독서는 타성과 관성에 젖은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게 해준다. 가령 루쉰의 소설『아큐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큐는 주변 인물들에게 모진 멸시와 폭행까지 당하면서도 ‘노려보기주의’와 ‘정신승리법’으로 형식적으로만 패배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아이히만은 도덕이나 이상 따위의 말을 많이 사용했으나 그것은 그냥 사용하는 상투어였을 뿐이고 그에게는 진정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없었다. 나치가 주입한 생각과 어휘로만 그는 말했고 당연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아이히만에게 죄가 있다면 사유하지 않는 죄였다. 저자는 우리 안의 아큐, 우리 안의 아이히만은 없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책읽기가 한 사람을 흔들고 깊게 각성시킬 수 있다면, 한 존재를 새로운 존재로 이행시킬 수 있다면, 책읽기는 하나의 지적 유희를 넘어서서 중요한 실천행위가 될 수 있다. 저자에게 책읽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시작이 된다.
저자가 제기하는 ‘세상에 물음을 제기하는 방법’은 이 시대의 고전이 된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와 맥을 같이한다. 프레이리는 기존의 교육을 사회의 질서에 순응케 만드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하며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기한다. 지금의 갑갑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한경쟁의 ‘은행저금식 교육’에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이행해야 하며 그 시작은 질문을 갖는 데서 시작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교사인 저자가 학생들에 깊게 공감하고, 교육현실에 대한 성찰로 설득력 있게 우리의 교육현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삶으로 써낸 일선 교사의 자기고백적 글은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이다.
* 책속으로 추가 *
마르크스는 그렇게 쉽게 매도당해도 무방한 자가 아니다. 나 역시 그의 모든 사유와 예언을 그대로 믿지 않지만, 그가 보여준 자본의 작동방식과 인간과 노동의 소외, 역사와 계급에 대한 통찰은 놀라웠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방법, 세상을 통찰하는 뛰어난 시선이 그에게 있었다. 그가 받아야 할 비판과는 별도로, 나는 그를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간소외에 저항한 휴머니스트로 기억한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것이 그리 간단한 이유는 아닐 터다.(p.280)
책속으로
학교를 벗어나면 아이들은 생기가 돈다. 평소 무기력하게 있던 아이들이 야영장 무대에서 눈부신 몸짓을 발산한다. 존재감 없던 아이들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동한다. 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받아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던 아이들조차 무대에서 친구들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여줄 때, 우리 교사들도 경탄해 마지않는다. 아이들이란 ‘무대에 따라’ 이토록 아름답게 약동한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자기를 온전히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p.27)
오늘날 학교폭력은 한국사회의 폭력이 밀려들어온 것뿐이다. 자본과 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이 병든 것은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수십 명 죽어도 경쟁과 효율을 말하는 사회에서, 자본-국가-권력이 아버지를 불태워도 용산에서는 아들이 살해자가 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학교만 홀로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쌍용자동차 회계를 조작해 돈을 번 회계사처럼, 그 거짓 자료로 노동자를 쫓아내고 승진한 판사처럼, 저항하는 노동자를 짐승몰이한 대가로 출세한 경찰청장처럼, 이토록 염치를 모르는 사회에서 병든 것은 아이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다.(pp.69~70)
학교에서 순종을 익혔다지만, 그래도 배가 기울어 몸을 가눌 수 없고 곧 물이 차오를 생사의 순간에, ‘평소와 달리’ 왜 그리 온순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한동안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아마도 수학여행에서 교사의 지시를 어기는 것은, 그 정도로는 삶이 어찌되지 않는다는 자기 믿음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에 비해 배가 기운 상황에서는, 자기 믿음보다는 어른들에 대한 믿음이 우선했기 때문일 테다. 어른은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 판단하고 그래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리라는 믿음에, 자기 삶을 그들에게 의탁했을 테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배신당했고, 아이들은 가라앉았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이토록 쉽게 배반당하는 현실 때문이다.(p.104)
삼일절과 광복절은 당연히 배워야 하고 단오와 독도의 날도 시간을 내어 배우면 역시 좋을 것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지겹게 반복하는 일제강점기는 다시 가르치라면서, 국가 기념일인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과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역사나 사회 교과서도 아닌 국어 교과서에 5·18과 6·10의 배경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투정할 일은 아니지만, 국어 교과서에서 70년 전의 일제 강점기가 배경과 주제로 숱하게 반복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차별의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pp.125~126)
물음이 간절하면 답은 함께 있는 것이다. 물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말한다. 그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고, 그리고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느냐고도 한다. 아! 그렇게 마음먹은 바로 그 마음이 우리의 적敵이라고, 이제껏 나는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받는다지만 바로 그 지배를 우리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한 ‘나’가 고통의 뿌리라고 말이다. 지배는 우리 밖의 자본과 권력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선택이라고 말이다.(p.200)
권력이 대중에게 친절할 때도 있는데, 여기저기 불온의 딱지를 붙일 때다. 지배권력은 그것으로 자기를 보위하려 하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가장 약한 고리를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살펴보면 세상의 위대한 것들은 모두 불온했다. 예수도, 갈릴레이도, 마르크스도, 전태일도 모두 그러한 자들이었으니, 바로 그들을 통해 시대의 핵심이 드러났다. 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불온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통찰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거짓 세상이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래서 당신의 세상은 아름답고, 당신의 삶은 행복한가?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학교 바깥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 시대의 불온을 읽는, 이것이 자유다!(p.211)
책을 덮은 후 교단에서 다시 살아올 당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노동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전태일을 불태우는, 이 땅의 율법에 충실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부끄러웠고, 또 가끔 몸이 아프기도 했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p.224)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일하는 황주환 님이 쓴 ‘자기고백 교육비평’이라고 할 만한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갈라파고스,2016)를 읽다 보면, 황주환 님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는 이야기가 곳곳에 흐릅니다. 이를테면, 여학생 뺨을 때린 이야기라든지, 또 아이들을 때린 일을 그만 잊어버렸는데 나중에 그 학생하고 만났을 적에 그 학생이 왜 저를 때렸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꾸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낱낱이 써도 될까 싶기도 한데, 이렇게 ‘자기고백’을 하기에 오늘날 이 나라 학교교육를 차근차근 짚고 바라보면서 비평을 할 수 있으리라고도 느낍니다.
왜 나는 그런 지도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내 몸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미 몸으로 학습한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57쪽)
학교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도, 그것을 승자의 특권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학교폭력은 더 이상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75쪽)
교사 황주환 님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남한테 밝히기에도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까닭을 곰곰이 파헤칩니다. 황주환 님이 어릴 적에 학교에서 교사한테 늘 맞고 자랐으니 ‘맞고 자란 몸’이 버릇으로 굳었고, 이 버릇대로 ‘교사 자리에 서고 나서는 때리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몸으로 학습한 것(57쪽)”은 마음보다 늘 앞섰다고 털어놓아요.
그러니까,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폭력 아닌 사랑으로 배운 일’이 몸에 남지 않은 터라, 아무리 ‘머리에 이론이나 지식’으로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치자’고 하는 말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론이나 지식이 제대로 샘솟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폭력을 안 쓰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을 뿐 아니라 ‘나는 왜 저렇게 할 생각을 못했나?’ 하고 부끄러이 여겼고, 황주환 님으로서 부끄러운 몸짓을 ‘이제부터 새로 배워서 털어내자’고 다짐했다고 해요.
아이들이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란다. 국어 교과서에 소원 세 가지를 적어 보라는 예비 문제에, 돈 많이 벌기, 돈벼락 맞기,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적는 것처럼, 오로지 돈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교사가 되고 싶단다. (80쪽)
공부를 못한다고 자기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자기 몫을 주장하고 곳곳의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행하는 이 수업이 바로 연대의 사례라고, 내 믿음으로 말한다. (107쪽)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라고 붙인 책이름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시골 읍내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이 ‘자기고백’을 하면서 밝힌 대목에서 이 책이름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드러납니다. 학교가 ‘질문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 학생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는 삶’을 몸에 익히지 못합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체제와 정치와 사회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르는 ‘기계’가 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아이들은 ‘돈 많이 버는 안정된 일자리’를 바란다고 합니다. 또는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바란다고 해요. 아이들은 교사라고 하는 자리를 ‘돈 잘 벌고 안정된 일자리’로 바라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주환 님은 아이들 머릿속에 ‘돈’만 남도록 되고 만 우리 사회가 참으로 무시무시할 뿐 아니라 앞길이 캄캄한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찾으려는 삶이 아니니 앞길이 캄캄하지요. 꿈을 꽃피우고 사랑을 나누려는 아이들이 아니라 돈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된다면 더없이 무시무시하지요. 아무리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을 정부에서 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이 억눌리거나 짓밟히는 모습이라면, 아이들은 오직 돈만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왜 우리는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주장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왜 우리는 부당한 지시에도 충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 않던가! (168쪽)
교사 황주환 님은 이녁이 학생일 적에 ‘저항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교사로 학생을 마주하는 오늘날에도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 얼거리에서는 ‘저항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예나 이제나 학교 안팎에서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생’만 기르려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교사를 비롯해서 ‘어른 자리’에 있다는 이들은 학생과 어린이와 젊은이가 ‘공손한 태도’이냐 아니냐만을 따진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바라는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나 어른이 너무 적다고 털어놓습니다.
문득 높임말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립니다. 높임말이란 서로서로 높이려고 쓰는 말입니다만, 어느 때에는 낮춤말로 탈바꿈하기도 해요. 한쪽만 높이도록 하는 높임말일 적에는, 다른 한쪽은 어느 한쪽을 낮추는 말이 되어요. 어느 한쪽은 나이가 많대서 높임말을 받고, 높임말을 받으면서 나이가 어린 사람한테 반말(낮춤말)만 쓸 적에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공손하게 높임말을 안 쓴다’고 하면 아무리 ‘바른 말(정당한 요구)’을 한다고 하더라도 ‘버릇없다’고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귀를 닫기 일쑤예요.
왜 교사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을까? 왜 교사는 학생의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를 논의하기보다 학생이 공순하냐 아니냐에 민감할까? (172쪽)
‘묻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묻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는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학교가 아이들을 ‘묻는 사람’으로 키운다고 한다면, 학교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묻지 않는 사람’으로 길들이려 한다면, 이는 아이들을 ‘생각을 잃어버린 채 고분고분하기만 한 기계’로 길들이려 한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시골학교에서도 도시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골교사 한 사람뿐 아니라 도시교사 누구나 아이들한테 ‘생각하기’를 가르치고 ‘생각하는 사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묻는’ 사람이 되어서, 새롭게 꿈을 꾸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