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발견

저자
배상문 지음
출판사
북포스 | 2014.08.21
형태
판형 규격外 | 페이지 수 364 | ISBN
ISBN 10-8991120792
ISBN 13-9788991120792

 

 

책소개

100개의 비유를 만나다, 100개의 문을 열다!

디지털은 문학보다는 수학에 가까운 세계이다. 문학과 수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모순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데, 수학에서는 모순을 용납하지 않지만 문학은 그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도 그에 가깝다. 문학은 디지털 세계에 함몰되어 정답과 오답 찾기에만 길들여진 머리를 바꾼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문학의 자리에 ‘비유’를 놓아도 좋다.

『비유의 발견』은 독서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다독가인 저자가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고심해서 만들어 놓은 100개의 비유를 정리한 책이다.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은 비유이지만, 읽다보면 감각의 문이 하나씩 둘씩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잘 만들어진 비유를 통해 자기만의 비유를 찾기 위해 세계를 더 골똘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저자소개

 

 

저자 : 배상문
저자 배상문은 197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열한 살 이후로는 줄곧 대구에서 살고 있다. 열여덟 살 때 스티븐 킹의 《신들린 도시》를 읽고 충격을 받은 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갖게 된 ‘제대로 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욕망에 오늘날까지 붙들려 있다.
10년이 넘도록 해마다 1,000여 권의 책을 읽으며 다독(多讀)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른바 생체실험(?)을 해 오고 있다.
스티븐 킹,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 나쓰메 소세키, 김원우, 이동하, 윤흥길, 이창동, 김승옥, 이태준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 창작에 관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http://blog.naver.com/uvz
출간한 책으로는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2009), 《아이디어 에러디어》(2011), 《창작과 빈병》(2012)이 있다.

목차

머리말

- 문학은 모순을 견디는 힘을 길러 준다. 이것이 누군가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문학의 진정한 가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결론이 뭐야? 여기에선 이런 애기를 허다니 저기에선 저런 애기를 하네. 어떤 말이 정답인 거야? 답답해 죽겠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돕니다. 디지털 세계에 함몰되어 정답과 오답찾기에만 길든 머리를 바꾼다. 실제 세계에는 정답보다 현답을 요구하는 일이 훨씬 많다. 현답은 정답과 오답 사이의 어정쩡한 지점을 가로지른다. 2분의 1이나 5분의 3도 포획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비유를 들을 때, 우리는 갑자기 하나의 세계가 육박해 들어옴을 느낀다. 감각의 문이 벌컥 열리는 경험을 한다. 더 많은 문을 가진 사람이 더 넓은 인생의 폭을 갖는다. 세계를 100개의 문으로 감각하는 사람과 1,000개의 문으로 감각하는 사람이 같은 수준일 수 없다. 보통 더 많은 문을 가진 사람이 더 현명한 사람이 된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의 양 보다 감각의 양을 쌓아야 한다. 지식인 중에 지혜로워 보이는 인물이 드문 까닭은 그 때문이다. 감각의 경험치가 부족한 것이다.

 

 


제1부 행복 없이도 산다
since 2002 | 최신작 | 생나무 | 불행 | 불안 | 가짜 | 꾀꼬리 | 불편한 진실 | 동전의 양면 | 골룸 | 샤덴프로이데 | 비교 | “부자 되세요!” | 질투 | 느낌 | 골프공 | 고독 | 비 오는 날 | 정신적 땀구멍 | 자유 | 자연산 | 괴짜 | 왼손잡이 | 잔치 | 상식

제2부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남이다!
비밀 | 사생활 | 여시아문 | 감정이 배제된 소리 | 혼잣말 | “설날 아침 같은 영화” | 소통 | 머리냄새 | 마음의 시차 | 오해의 인큐베이터 | 뒤끝 | 서로 뜯어먹고 산다 | 상처(1) | 상처(2) | 개미 | 물동이 | 이끼 | 대표명사 | 가해자, 피해자, 수혜자 | 내재된 폭력성 | 쇠팔걸이 | 버려진 에너지 | 사생아 | 생략된 존재 | 창피

제3부 말랑말랑하게 나이 드는 법
슬픈 동물 | 한가로움 | 잉여 | 무용성 | 영양가 | 콩나물 | 회로 | 5퍼센트 | 궤도 | 역사 | 문학 | 역사와 문학 | 깊은 바다 | 빗자루 | 캐릭터 | 시와 인생 | 브레이크 | 쓰러질 줄 안다 | 말랑말랑 | 힘 빼기 | 선배 | 권위주의 | 가족주의 | 국가주의 | 전체주의

제4부 틀에 박힌 사람이 되자
포인트 | 남의 신발 | 동지 | 기도(1) | 기도(2) | 물음표 | 상상력 | “두 번 본 것” | 명료함 | 향수 | 여백 | 제한하기 | 없는 게 장점 | 미루기(1) | 미루기(2) | 프라이팬 이론 | 한 번에 하나씩 | ‘하지 말라’ | 속옷 뒤집어 입기 | 로스팅 | 허물벗기 | 취향 | 위험한 모험 | 나만의 1등 | 2층

상세이미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4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인류사 최고의 소통 기기들을 가지고서도
소통 능력은 왜 갈수록 더 떨어질까


배달되어 온 신문을 펄럭펄럭 넘겨가며 읽지 않더라도, 침 발라 우표를 붙여 보내 온 편지가 아니어도 우리는 ‘알 만한 것은 다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것도 손끝으로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 말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심지어 지구 반대편 뒷골목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에 대해서든, 모두가 자기 생각을 내놓고, 그것은 모두에게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공개된다. 그 공개된 생각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의견이 꼬리표처럼 실시간으로 따라붙는다. 이 공방전을 만약 화살표로 나타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온통 얽히고설킨 화살표투성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참 잘 통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도리어 곳곳이 꽉 막힌 불통의 시대라고 입을 모은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를, 오히려 멋지게 발달한 소통 환경에서 찾는다. “인터넷은 디지털로 짜인 그물이다. 씨줄인 0과 날줄인 1로만 엮여서 그물코가 매우 성글다. (…)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라. 찬성과 반대. 공감과 비공감. 추천과 비추천. 올려와 내려. 철저한 이분법의 세계다. 아무리 둘러봐도 2분의 1을 위한 버튼은 보이지 않는다.”



사고하는 방법의 차이가 의사 전달력의 차이다
‘공감의 남발’보다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생뚱맞게 들릴지 몰라도 소통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두 사람이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소통이 된다. (…) 소통을 잘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아느냐 하는 게 아니다.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첨단 소통 기기가 인간의 소통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도리어, 넘쳐나는 가십 정보 탓에 안으로 향해야 할 시선을 자꾸만 빼앗기고 만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잡식을 잡식하며 지적 허영에 빠지는 동안 내면은 점점 비어간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모르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몸과 마찬가지로 정신도 딱딱해진다. “일상의 권위주의자, 익숙한 표현으로 ‘꼰대’가 된다.”

 

 

 


몸에 탄력이 있어야 젊다고 할 수 있듯이 정신도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해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주 쓰는 반대쪽으로 뻗어” 스트레칭을 해주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고 상대편에 날카로운 화살표를 쏘아대기 전에 정신의 근육을 반대쪽으로도 써봐야 한다. 그래야 그간 수없는 투망질로도 건져내지 못했던 2분의 1들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책속으로

모든 동물은 공통으로 밥에 대해서 생각한다. 유독 인간만이 밥 이외의 것도 생각한다. 일생을 밥과 그것을 사 먹을 수 있는 돈밖에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원시인도 비 오는 날에는 사냥 생각을 접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 증거가 당신과 나 아닌가. 우리는 비 오는 날 공상에 잠겼던 원시인의 창작물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실재가 아니다. 원시인이 만들어 낸 허구다.
― 71쪽, 「비 오는 날」 중에서

 



물리적인 시차만 있는 게 아니다. 심리적인 시차도 있다. (…)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전화 받기에 곤란한 시간만 아니면 상대도 그럴 거라고 미뤄 짐작해 버린다. 이쪽에 해가 중천에 떠 있으면 그쪽도 마찬가지이므로 별생각 없이 일단 통화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대낮이라고 모두 전화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그쪽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쪽도 그럴 것이라는 짐작은 착각이다. 우리는 가끔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학교 동창이나 군대 동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저쪽에서는 막 반갑다고 난리인데 사실 나는 썩 반갑지 않다. 그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이라서 이제 추억 속의 인물일 뿐 굳이 다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반갑다 만나자 밥 한번 먹자 이렇게 나오면 참으로 난감해진다.


― 127~128쪽, 「마음의 시차」 중에서

뒤끝 보존의 법칙도 성립한다. ‘솔직을 빙자한 무례’를 범하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그로 인해 골병이 드는 사람이 있다. 피해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인 경우가 많아서 감히 표현을 못 하고 있을 뿐이지. 자기가 ‘뒤끝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뒤끝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곡해하면 안 된다. 꽁한 마음을 품었다가 나중에 복수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애초에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는다.

 


자신을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무례함을 솔직함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상처받는 능력이 모자라는 자는 본인이 행복한 대신 반드시 그만큼의 불행을 주위에 떠넘긴다. 내 몫의 불행은 내가 떠안는 것이 세상에 대한 예의다. 동시에 내 몫의 행복은 누군가에게서 빼앗아 왔다는 ‘진실’을 상기하는 일도 중요하다.

 


― 134쪽, 「뒤끝」 중에서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남자가 절규한다. “저는 그저 회사를 위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죄란 말이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했으니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회사는 원래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절대로 회사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지 않는다. 회사가 그럴 만한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진즉 안다.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으니 대책을 미리미리 세운다. 지금 튼튼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하게 은행 빚을 내서 집을 사거나 자식을 해외로 조기유학 보내지 않는다. 대책 없이 있다가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회사에서 잘리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다.


― 183쪽, 「슬픈 동물」 중에서

 

 


내가 약하고 외롭고 슬프고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수록 ‘희망’은 더욱 간절한 무엇이 된다. 정치꾼들은 그 점을 잘 이용한다. ‘오징어떼’를 한목에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 눈부시고 화려한 불을 하나 켜 두면 가장 약하고 외롭고 슬프고 괴로운 오징어부터 모여든다. 가난한 노동자가 부자 정당을 지지하는 것도 그런 심리다. 일단 노동자 정당은 강렬한 불을 켜 놓을 정도의 자금력도 인원 동원력도 없다. 그에 반해 부자 정당은 자금과 인력이 풍부한데다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는다. 왜 계급 투표를 안 하느냐고 힐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약한 자가 강한 쪽에 줄 서는 건 생존 본능에 가깝다. 오징어에게 계급은 멀고 본능은 가깝다.


― 265쪽, 「전체주의」 중에서

 

 

 

 


누가 음식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할까? 지금 한창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다. 그에게 다이어트를 그만두고 음식을 마음껏 먹으라고 한다면? 꿈에 삼겹살이 등장하진 않을 것이다. 욕구가 충족되면 갈망도 퇴색된다. 푸드 칼럼니스트가 되려면 맛집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이어트 상황처럼 음식과 완전히 단절된 혹독한 경험이 일정 부분 있어야 한다. 정확한 정보는 경험에서 오지만 강렬한 필력은 결핍에서 나올 수 있다. 연애편지 고수는 연애 고단자가 아니다. 얼굴이 미남이라든가 해서 연애를 쉽게 할 수 있는 사내가 연애편지 따위를 잘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핍이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 307쪽, 「제한하기

250년만에 詩로 부활…조선후기 요절한 천재시인 이언진

경향신문 | 2009.11.28 00:42

▲골목길 나의 집 이언진 | 돌베개
▲저항과 아만 박희병 | 돌베개

 

 

 

"이따거의 쌍도끼를/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손에 칼을 잡고/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이 시를 남긴 이언진(李彦 ·1740~66)은 학계에서 '요절한 천재시인'으로 통한다. 중인 출신이었던 그는 독특한 시풍으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2000여수가 넘는 시를 쓴 것으로 전해지지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병약했던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다행히 300여편의 시문이 그의 아내에 의해 불타지 않고 남아 후손 등이 문집으로 엮었다.

 

 

 

< 골목길 나의 집 > (8500원)은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이언진의 < 호동거실 > 에 담긴 연작시 170수를 처음으로 온전히 번역하고 짤막하게 해설을 붙인 시집이다. < 저항과 아만 > (1만8000원)은 이언진 시의 맥락과 의미를 촘촘히 분석한 것이다.

 

 

 

'이언진'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는 하나의 범주로써 다가온다. 윤동주와 이상 등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한 출중한 시인들을 일컫는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페이소스'(비애감)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재시인은 왜 요절하는 것일까? 시대를 앞서 읽은 천재시인은 문단을 전복시킬 태세로 혁신적인 글을 쓰지만 당대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경우가 많다. 시대와의 불화 혹은 내면과의 불화가 그의 생애를 단축시켰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문학적 재능을 불사르다 일찌감치 가버린 그들이 좀더 오랫동안 살았다면 후세는 그의 면모를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지만 그럴수록 신비감은 덜해진다.

 

 

 

 

 

이언진은 이런 요소를 두루 갖췄다. 20세에 역관이 된 그는 1763~64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을 얻거나 필담으로 학술교류를 했다. 일개 통역관이었던 이언진은 직책상 이 자리에 낄 처지는 아니었지만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며 일본인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이 소문이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졌어도 그가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류층에선 중인 출신 문인의 활약에 대한 불쾌감과 위기감마저 나돌았다.

 

 

 

배척당한 시인의 선택은 두갈래다.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만의 성을 굳게 쌓고 그들을 조롱하고 허위와 부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대개의 천재시인이 그러했듯 이언진이 택한 것도 후자다. 그는 시의 형식에서부터 철저한 비주류의 길을 택했다. < 호동거실 > 은 여섯 글자씩 끊어지는 '6언시'로 이뤄져 있다. 5언시나 7언시 중심이던 한시의 전통에서 탈피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구어인 '백화(白話)'를 많이 구사했는데 이 역시 관습에서 한참 벗어난다.

 

 

 

맨 앞에 인용된 시는 이언진의 '불온성'을 드러낸다. 이 시는 108명의 호걸들이 관(官)과 맞서는 내용의 중국 소설 < 양산박 > 을 차용해 체제전복을 꿈꾼 것인데 신분제를 부정함은 물론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읽힌다.

 

 

 

 

 

 

 

이언진은 '호동(골목길)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이라며 소똥·말똥 냄새나고 시끌벅적한 도시 서민들과 주거지를 정감 어리게 바라봤다. 사진은 이언진이 살던 시대보다 100여년쯤 뒤인 구한말 서울의 골목길 풍경이다. 돌베개 제공 < 호동거실 > 은 "새벽종이 울리자/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만인의 마음을 나는 앉아서 안다"라는 시로 시작했다. '호동'()은 이언진이 스스로 붙인 호인데 '골목길'이란 뜻이다. '호동거실'은 바로 '골목길 나의 집'이란 의미. 당시 호동은 상인·중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 호동거실 > 의 시들은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이 공간을 긍정하고 서민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별칭을 골목길이라고 지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신분적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에게는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세태는 요랬다조랬다 하고/이내 몸은 고통과 번민이 많네/높은 사람 앞에서 배우가 되어/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그는 자신을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동급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배척한 주류사회에 투항하지 않는 자존감과 주체성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교만이라는 게 역자인 박희병 교수의 해석이다.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인 류우이칸이 쓴 책에 담긴 이언진의 초상화.이언진 평전도 준비 중인 박 교수는 기존 학계의 접근이 너무 단편적이고 표피적이었다며 이언진을 동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과 짝패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박지원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가 '개량적 개혁'으로 보인다면, 이언진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는 '혁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문단의 이단아이자 괴물이었던 이언진이 250여년이 지난 뒤 우리 앞에 돌연히 나타났다. 그를 다시 요절시켜 관으로 돌려보낼 것인지, 온전한 천재시인으로 자리매김해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눈밝은 문화기획자들에게 이언진은 보물창고로 보일 수 있는 면모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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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은 연암 박지원의 글 「우상전」을 통해서 존재가 알려진 천재 시인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을 다룬 책이다. 그간 몇몇 학자에 의해 조금씩 다뤄진바는 있지만, 이번처럼 이언진의 작품 전체를 완역한 책은 없었다.

 


18세기 조선의 문단 상황에서 이언진의 존재는 파격이며, 존재만으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골목길 나의 집』은 이언진의 존재와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다.

 


이 책은 《우리고전100선》 제12권으로, 이언진과 그의 시집 ‘호동거실’을 소개하기 위해 전체를 완역하고 매수마다 작품 감상 및 짧은 평 위주로 수록한 책이다. (좀더 전문적인 평설이 필요한 독자는 이 책과 동시 출간되는 『저항과 아만』을 참조.)

 



조선문단의 새로운 유형의 이단아 이언진의 발견


중인(中人) 신분의 요절한 천재 시인 이언진(李彦?, 1740∼1766). 이언진은 동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의 「우상전」(虞裳傳)이라는 글을 통해 현재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다. 우상은 이언진의 자(字)이며, 「우상전」은 연암 박지원이 이언진을 입전(立傳)한 글이다.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은 그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장편 연작시다. 이 시에 관류하고 있는 인간의 평등,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항거, 다원적 가치의 옹호, 개아(個我)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존중 등은 기존의 조선 문단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모습이다.

 


‘호동거실’은 그간 ‘동호거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호동거실 157수 중 특징적인 몇 수만이 몇몇 연구자에 의해 연구·발표된 바 있다.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호동거실은 오류가 많은데다 그간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언진이라는 인물의 전모를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필자 박희병은 고려대 소장 필사본 《송목각유고》를 발견, 판본비교 및 고증을 통해 170수의 시를 완비하고 이를 최초로 완역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천재 시인 이언진을 선보이게 되었다.

 


이언진은 누구인가?


이언진(李彦?, 1740∼1766)은 20세인 1795년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중국에 두 번, 일본에 한 번 다녀왔다. 역관 이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63년의 일본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이다. 조선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씨를 얻으려 하거나 필담(筆談)을 통해 양국의 학술문화를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응대하는 일은 서기(書記)와 제술관(製述官)의 몫이었다.

 


이언진은 한학 압물통사(漢學押物通事)의 직책으로 일본에 갔다. ‘한학’은 중국어, ‘압물’은 물건 관리, ‘통사’는 통역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직책으로 본다면 이언진은 일본 문사나 학자들과 시를 주고받거나 필담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언진은 성대중(成大中), 남옥(南玉) 등 유수의 서기, 제술관을 제치고 일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의 문학적 천재성 때문인데, 이언진은 일본인이 시를 청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하루에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박지원의 「우상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언진은 1764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일본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는 소문은 서울의 사대부 사회에 쫙 퍼져나갔지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이언진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차별과 부조리에 이언진은 깊은 좌절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언진은 원래 몸이 건강하지 못했는데, 일본에 다녀온 후 급격히 병이 악화되었다. 지나친 독서와 공부로 몸을 상했으며, 역관으로서의 잦은 해외 출장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신분차별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좌절감과 분노는 그의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지 채 2년이 못 되어 죽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1. 이언진에 대한 당대 문인의 평가

 


일본 사행(使行)에서 높은 문명(文名)을 거둔 이언진에 대한 평가가 당대 조선 문인들의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당대의 보수 지배층은 이언진에 대해 일말의 위기위식을 느꼈다. 금석(錦石)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이 그 형인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 말이 보인다. “이번 통신사행에 역관 이언진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스무 살 남짓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귀국했다는군요. (…)지금 여항에 이런 기재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월사(月沙)나 간이(簡易)의 시대에 외국에서 홀로 문명을 날린 역관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늘, 이로 보면 세도가 낮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기이한 재주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역관배 따위가 외국에서 독보하다니, 참으로 말세야’ 하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당대인 가운데 이언진의 스승인 이용휴, 그리고 성대중, 박지원, 이덕무, 김숙 등의 문인이 이언진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이용휴는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언진을 사랑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언진의 재능에 대해 묻자 벽을 가리키면서, “벽을 어떻게 걸어서 통과할 수 있겠소? 우상은 바로 이 벽과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성대중은 1763년에 이언진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절로 다녀왔다. 그는 이때 처음 이언진을 알게 되었는데, 귀국 후에 이언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며 원고를 보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성대중은 이렇게 해서 얻은 이언진의 글을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유통시켰다.

 


박지원과 이언진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박지원은 이언진보다 세 살 많다. 박지원이 스물아홉일 때 이언진은 그에게 몇 차례 자신의 글을 보낸 적이 있다. 박지원은 그 글들에 대해 ‘자잘하여 보잘것없다’라고 혹평하였고, 이언진은 박지원의 이런 혹평을 전해 듣고 분노하고 또 낙담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하였고, 박지원은 「우상전」을 통해 이때의 일을 기록하며 이언진의 재능이 자못 크고 높아 짐짓 눌러주려 한 것이라며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한다.

 

 


이덕무도 이언진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책 《이목구심서》에는 이언진에 대한 기사가 종종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 또한 성대중처럼 이언진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2. 저항과 아만의 시인 이언진

 


이언진은 저항시인이다. 이언진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그의 시에 담아냈다. 그러므로 ‘저항’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호동거실’은 바로 이 저항이 빚어낸 아름다운 보석이다. 이언진은 저항함으로써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언진은 이 당당함 때문에 결국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작(詩作)은 거대한 벽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병은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고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든 듯하다.

 


이언진의 요절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 하나의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시작(詩作)을 통한 이언진의 저항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사는 그 심부에서 심각한 균열과 파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껏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주자학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이탁오를 대놓고 찬양한 이는 없었다. 오로지 유교만이 최선은 아니며, 유불도 삼교 회통을 주장한 이도 없었다. 마치 사대부의 철학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인과 평민들의 삶에서 도(道)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인 셈이며, 균열과 파열의 시작인 셈이다. 이 균열과 파열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의 값진 출발점이다. 이 점에서 이언진의 저항은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제104수〕

 

 


‘호동거실’에서 보여주는 ‘저항’은 시인의 ‘아만’(我慢)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아만’은 불교 용어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른다. 불교에서의 ‘아만’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부정정인 의미로 쓰이지만, 이언진에게서 느껴지는 아만은 자의식 내지 주체의식이 아주 큰 것이다.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과 높은 자존감,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려는 태도, 좀처럼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자신을 동급이라 하였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단순이 ‘높은 주체성’ ‘강렬한 자의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아만’이라는 용어는 이언진이 지녔던 넘쳐흐르는 주체성과 강한 주체에 동반되는 그의 그늘까지 포괄한다.



이백(李白)과 이필(李泌)에다
철괴(鐵拐)를 합한 게 바로 나라네.
옛 시인과 옛 산인(山人)과
옛 선인(仙人)은 성이 모두 이씨라네. 〔제111수〕

 


이언진에게 있어 저항과 아만,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그의 저항은 아만에서 나오며, 아만은 저항의 내적, 심리적 원천이다.

 


이언진은 종래 ‘천재문인’으로 불려왔다. 이언진이 천재인 것은 맞지만, ‘천재’라는 단어는 자칫 이언진의 인간적, 사회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당대 사회에서 이언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문제적 ‘현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에게는 ‘천재’라는 수식어보다는 ‘괴물’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이언진이 이단아인 것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되는 이념과 위계적 질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언진과 같은 이단아는 조선 시대 역사에서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역관 출신의 문인은 이언진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에 홍세태(洪世泰, 1653∼1725)라는 저명한 문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언진 사후 한 세대 뒤에는 중인층 출신의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대표적인 집단이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이다. 이들의 시문에도 신분적 제약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심사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양반이 되고자 했고, 그들을 따라하고자 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언진처럼 자신을 체제 밖에 세우고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19세기에도 중인층 문인들의 문학적 동인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역시 이언진 같은 인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호동거실’ 같은 시집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 점에서 이언진은 공전절후의 문학가이다.

 

 


‘호동거실’, 호동에서 꿈꾼 조선의 전복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글을 모두 불에 태웠다. 다행히 그의 작품 ‘호동거실’을 포함한 일부만이 그의 아내에 의해 불태워짐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문집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의 ‘신여고’ 뜻이 바로 불태워지고 남은 원고라는 말이다.

 


이언진의 대표작 ‘호동거실’은 한국문학사의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정신적 가치와 문제성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호동거실’은 형식과 내용 모두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아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호동거실’은 호동의 거실이라는 뜻이다. ‘호동’은 서민이나 중인이 사는 골목길을 이르는 말이고, ‘거실’은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호동은 ‘여항’(閭巷)이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한편 ‘호동’은 이언진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골목길’이라는 뜻의 ‘호동’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참 특이한 발상이라 하겠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신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판단된다. 자신이 사는 공간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이 공간적 동일시는 사대부 계급에 대한 대립의식의 자각적 표출일 것이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했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1) 호동거실의 형식적 특징

 


첫째, 6언으로 이루어진 170수의 연작시이다. 6언시는 그리 흔한 형식은 아니다. 한시는 대개 5언이나 7언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6언시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한국에서 창작되어 왔지만 대개 희작(戱作)이 많고, 5언이나 7언만큼 비중 있는 형식은 아니었다. 그러니 5언시나 7언시와 달리 6언시는 명시(名詩)라 할 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이언진이 6언시 장르를 택한 것은 희작(戱作)을 짓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주변부 장르를 선택한 것은 5언과 7언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대부들의 한시 창작 관습에 도전하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감수성과 사유를 담기 위해서였다.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달리 작시법(作詩法)이 그리 까다롭지 않고, 형식적 구속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언진은 6언시를 통해 퍽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한국문학사에서 두어 편이나 너댓 편 6언시를 쓴 시인은 더러 눈에 띄지만, 170수나 되는 연작을 창작한 시인은 이언진 말고는 없다.

 

 


둘째, 『호동거실』에는 백화(白話, 중국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호동거실』에는 특히 『수호전』에 보이는 백화 단어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이언진은 『수호전』이나 『서상기』 등 중국 소설이나 희곡을 애호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사대부적인 취향이 아니라, 평민적·시정적(市井的) 취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언진이 중국의 이런 속문학서(俗文學書)의 언어를 자신의 시어로 구사한 것은, 사대부 문학이 아니라 호동의 문학을 자각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제82수 참조〕

 

 


2) 호동거실의 내용적·주제적 특징

 


첫째, 호동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다. 호동은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서민들의 삶을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털보, 곰보, 혹부리, 청계천 광통교로 물구경 가는 사람들 등 ‘호동거실’에는 호동에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서정적 열전’(抒情的 列傳)이 담겨 있다. 〔제67수 참조〕

 


둘째, 사대부 계급에 대한 날선 비판과 야유를 보여준다. 이언진은 비주류, 주변부의 인간으로서, 주류 계급이라 할 사대부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사대부들은 무능한데 부귀를 누리는 반면, 하층 출신의 인간들은 유능한데도 사회적으로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에 깊은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제104수 참조〕

 


셋째, 시인 자신의 내면초상(內面肖像)을 다양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즉 『호동거실』에는 시인의 자기서사(自己敍事)에 해당하는 시들이 아주 많다. 시인은 이 자기서사를 통해 스스로를 응시하거나 위로하고 있다고 보인다. 〔제111수 참조〕

 


넷째,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 및 신분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담겨 있다. 이언진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조선이 국시(國是)로 삼고 있는 주자학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으며, 이단 사상인 양명학(陽明學)으로 주자학을 대체시키고 있다. 골목길 사람들은 모두 성인(聖人)이라거나, 골목길 사람 누구에게나 양지(良知=양심)가 있으니 그 모두가 성인과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대체함으로써,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반역의 사상가 이탁오를 극찬한 이는 조선 사람 중 오직 이언진 한 사람이다. 〔제19수, 제95수 참조〕

 


다섯째, 유불도(儒佛道) 3교를 공히 인정함으로써 다원적 사회를 모색했다. 『호동거실』에서는 유교=양명학과 나란히 불교와 도교가 똑같이 긍정되고 있다. 이언진은 유교만이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을 배격했으며, 유불도의 공존과 회통(會通)을 통해 진리가 추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특정 사상의 배타적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유로운 사유를 전개하면서 새로운 진리 구성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제120수 참조〕

 


『골목길 나의 집』의 성과


(1) 호동거실의 제 이름을 찾고 그 가치를 인정하다.

 


이제껏 모든 연구자들은 ‘호동거실’을 ‘동호거실’이라고 불러 왔으나, ‘동호거실’이라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호동거실은 이언진의 문집에 실려 있는 백수십 수의 연작시로서, 이언진의 대표작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를 하나의 시집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으나, 그 규모로 볼때 문집에서 분리해 하나의 시집으로 봐야 한다.

 


(2) 철저한 고증과 판본 비교를 통해 최초로 완역하다.

 


이언진의 유고집으로는 1860년에 나온 두 가지 간본이 전하는데, 그 하나는 역관인 김석준 등이 엮은 《송목관집》이다. 여기에는 ‘호동거실’의 시들이 대거 산삭되고 고작 20수만이 실려 있다. 내용의 불온성 내지 과격성으로 대부분 산삭되고 겨우 몇 수만이 소개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간본은 이언진의 집안에서 간행한 《송목관신여고》다. 여기에 수록되 ‘호동거실’은 총 157수인데 오류가 적지 않고 배열도 얽혀 있다.

 


이 두 간본과는 별도로, 간본보다 앞선 시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이 연세대 도서관과 고려대 도서실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연세대본인 《송목각시고》는 《송목관신여고》의 ‘호동거실’ 시의 편수와 배열순서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고려대본인 《송목각유고》는 ‘호동거실’의 시가 165수 실려 있는데, 이 책에만 보이는 작품이 13작품이고, 이 13작품의 경우 그 각각에 ‘산거(刪去)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 체제를 도끼로 부숴 버리고 싶으며, 강호의 녹림객들과 결교하고 싶다고 하거나 조선 국왕과 관리를 원수로 간주해 저주하면서 조선의 지배구조, 조선의 수탈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시도 있는데, 이들 시는 그 반체제성과 과격성 때문에 유고집에서는 탈락된 게 아닐까 추정된다. (판본 비교는 이 책과 동시 출간되는 『저항과 아만』 470쪽 부록 참조.)

 

 


지금까지의 ‘호동거실’에 대한 모든 논의는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것을 텍스트로 삼아 이루어졌기에, 이 때문에 착오가 없지 않았다. 이번에 펴낸 두 종의 책은 저자가 새로 발견한 《송목각유고》에 실린 ‘호동거실’을 텍스트로 삼되 《송목관신여고》에만 보이는 5작품을 보충해 넣었다. 그 결과 이 책에 수록된 ‘호동거실’은 총 170수이다.

 



(3) ‘호동거실’ 전체를 분석·조망함으로써 전방위적인 이언진 평가를 해내다.

 


이 시집에 대한 연구는 그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번의 경우처럼 ‘호동거실’ 전체를 완역하고 연구한 경우는 이제껏 없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서들은 완역의 바탕 없이 특징적인 몇 수만으로 이언진의 연구가 이루어지다 보니, ‘근대’, ‘중세적 가치와 이념의 부정’ 등만을 오로지하여 연구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전체 시의 문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해낸 것에 불과하다. (이언진의 생애는 이 책의 부록 ‘이언진 연보’ 참조)

 

 

 

 

 




일지 15

전복의 질문 17
무한의 작은 한계 29
지면, 단어와 여백의 전복의 장소 36
시간의 바깥, 책의 꿈 39
고독, 문체의 공간 44
거처에 앞서 51
재현 금지 55
모래에게 바쳐진, 닮음의 책의 세 가지 ‘서평 의뢰서’ 78
생각, 단어를 통한 존재의 창조와 파괴 84
열쇠-말, 생각을 통한 존재의 창조와 파괴 89
기원으로서의 부재, 혹은 인내하는 최후의 질문 93

모래 103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 123
옮긴이 말 216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시인들의 시인, 에드몽 자베스 국내 첫 출간!
모든 한계를, 모든 담장을 무너뜨리는 전복의 글

“모든 책은 자신들의 원천이 될 최후의 책 속에 남을 것이다. 책들에 앞선 책. 책들이 그토록 닮으려 하는 닮을 길 없는 책. 어떠한 모방으로도 필적 못 할 내밀한 모범. 신화의 책. 유일무이한 책.”
‘?다’를 통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에드몽 자베스의 작품. 그동안 국내 작가나 평론가들의 글이나 입으로만 전해져 국내 문단에 풍문처럼 떠돌던 에드몽 자베스. 시집 《예상 밖의 전복의 서》는 작가 생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으로, 그는 파울 첼란과 함께 서구 현대시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예상 밖의 전복의 서》는 평생 한 권의 거룩한 ‘책’을 ‘짓고’ 싶었던 자베스의 세계와 문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책이다.

“진정한 시인은 거처가 없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 국적을 가졌으며, 반면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쓰고 사용하던 에드몽 자베스.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던, 결국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고, 1957년 결국 자베스는 이집트에서 추방돼 프랑스로 망명을 간다. 프랑스에 안착한 자베스는 자신에게 부과된 ‘유대인’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는다. 이때 유대인으로서의 운명이란 자베스에게 특정 종교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자베스에게 유대인과 신이라는 단어는 은유다. 신은 공허의 은유요,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공허로부터 비롯한 고통인 것이다. _‘옮긴이 말’ 중에서

자신의 고유 집단과 언어를 벗어나면 누구나 ‘정체성’이라는 난관을 맞닥뜨리게 된다. 자베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프랑스에서의 불안한 삶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던 자베스는 매일의 단상을 지하철 표에 빼곡히 기록해둔다. 마침내 1959년, 첫 시집 《내 거처를 짓다》가 발간되고 프랑스의 저명한 문인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진정한 시인은 거처가 없다"며 자베스를 높이 평가했다.
후에 자베스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드높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책으로의 회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나는 나 자신이 작가인줄 알았으나, 이윽고 나는 나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안에서 작가와 유대인은 분간이 가지 않게 되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배지의 백성으로 거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유대인이다”라고 자베스는 말한다.

글은 거울이 아니다. 쓰기란, 미지의 얼굴을 맞닥뜨리는 행위다._‘본문’ 중에서

이방인의 삶을 인정하고 자처하는 그의 글은 언어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문학의 한계, 언어의 한계를 벗어난다. 모든 한계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담장을 허물어버리려는 전복의 글. 그런 그의 글들은 프랑스 현대시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의 책에서 우리는 ‘미지의 얼굴’을 맞닥뜨리고,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 우리의 한계로는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선사한다.

‘전체로서의 책’,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자베스는 《예상 밖의 전복의 서》에서 유일한 ‘책’을 말한다. 책의 물성이나 역사가 아닌 오로지 한 권의 책, 책들의 이데아와 같은 책을 완성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 질문 자체가 책의 몸이고 정신이기에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읽게 된다. 문체에 대해서,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삶에 대해서. 이 책은 자베스의 대표적인 일곱 권의 《질문의 책》과 세 권의 《닮음의 책》과 공명한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 이미 그 제목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을 가로질러, ‘질문의 서書’ 열 권과 관계한다. 이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전복에 속한다. _‘본문’ 중에서

《예상 밖의 전복의 서》는 그의 역대 작품들을 완결하는 책이자, 에드몽 자베스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유일무이한 책이다. 이방인이라는 신분과 생계가 까마득했던 극한의 현실 속에서도 계속 글을 써내려간 그의 힘은 바로 이 책에서 드러나는 질문들이지 않았을까. ‘삶’은 순간의 전복, ‘죽음’은 영원의 전복이라 했던 에드몽 자베스. 1991년 삶을 마감한 그는 《예상 밖의 전복의 서》로 그 ‘순간의 전복’을 해냈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자신이 느꼈던 그 ‘전복’의 순간을 함께 나누고자 이 책을 남겼으리라.




책속으로

글은 거울이 아니다. 쓰기란, 미지의 얼굴을 맞닥뜨리는 행위다. _7p

나 도처에서, 담장을 무너뜨리리라. 그리하여 내 작품에, 그 고유의 공간은 물론이요, 금지된 공간의 무한을 제공하리라. _10p

살기란 순간의 전복을 제 것으로 행하며, 죽기란 돌이킬 수 없는, 영원의 전복을 제 것으로 행한다. _11p

전복은 질서 없음을 증오한다. 전복 그 자신이야말로, 반동하는 어떤 질서에 맞서는 유덕한 질서다. _12p

“우주란 한 권의 책으로, 한 장 한 장이 매일이다. 네가 그곳에서 읽는 것이란 한 장의 빛이요―각성이요―그리고 어둠이요―잠이요, ―여명과 망각의 단어다.” _14p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위협한다. 전복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_17p

사람은 사람에게, 기원이자 동시에 그 너머다. _18p

모든 책은 자신들의 원천이 될 최후의 책 속에 남을 것이다. 책들에 앞선 책. 책들이 그토록 닮으려 하는 닮을 길 없는 책. 어떠한 모방으로도 필적 못 할 내밀한 모범. 신화의 책. 유일무이한 책. _81P

“나는 밤을 질문으로 가득 채웠다. 다만 어떤 이들은 반짝이는 데만 열중한 별들을 바라보고자 할 뿐이었다. _109p

무한한 책이 끝을 맺는 것은 오직 자신의 예측 불가능한 연장 속에서만 가능하다. _111p

“나는 분명 내 책들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의 책들은 어디까지 내 기억이었던가?_111P

생각은 낮에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낮이다. _111P

신을 신에, 생각을 생각에, 책을 책에 맞서게 하여, 너는 하나로 다른 하나를 소멸시키리라. / 그러나 신은 신을, 생각은 생각을, 책은 책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바로 그들의 생존 속에서 너는 계속해서 그것들에게 도전하리라. 사막이 사막의 뒤를 잇는다. 죽음이 죽음의 뒤를 잇듯이. _120P


  • [CEO 인터뷰] 인지과학 학습법…안까먹는 영어공부 비결이죠
  • 2017-02-13 조회 50
  • 출처: 서울경제

    이준엽 한국카이스 대표 "인지과학 학습법…안까먹는 영어공부 비결이죠"

    차별화된 모바일 영상으로 올해 매출액 100억 돌파한 뒤 3년내 국내 증시 상장 추진

     


     

    “기억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학습법과 모바일에 최적화된 강의 영상을 제공해 국내 온라인 영어·중국어 교육 시장에서 빅3 업체로 도약하도록 하겠습니다.”



  • 모바일 영어·중국어 교육업체인 한국카이스의 이준엽(사진) 대표는 12일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장기 기억 학습법을 토대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마풀(마법처럼 풀리는) 영어’와 ‘마풀 토익’, ‘마풀 중국어’ 교육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며 “회원들의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화면 분할 기법 등을 도입하는 등 모바일 영상도 차별화 했기 때문에 2~3년 안에 국내 온라인 외국어 교육 시장에서 강소 업체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자신한다”고 밝혔다.



  • 한국카이스의 교육 커리큘럼인 마풀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인지과학 학습법에 따라 강사들이 강의를 마치면 바로 회원들이 시험을 쳐서 배운 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게 특징이다. 이 대표는 “국내 온라인·모바일 강의 사이트 대부분은 문제풀이 기능이 없어 자기주도학습이 어렵고 강사 중심의 주입식 강의가 대부분”이라며 “한국카이스의 마풀은 인지과학자들이 밝혀낸 최고의 공부법인 ‘공부 이후 바로 시험’ 방법에 따라 학습 시스템을 구성해 배운 것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 7개국어 구사로 유명한 방송인이자 작가 조승연씨는 한국카이스의 사업 모델을 높이 평가하고 최근 이 회사에 지분을 투자하기도 했다. 유명 배우 다니엘 헤니도 영어 강사로 참여한다.



  • 이 대표는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나서 올해 매출액 100억원을 넘긴 뒤 2018년에는 250억원, 2019년에는 380억원 달성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으면 3년 안에 국내 증시 상장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카이스는 앞서 2015년 미래에셋증권(현 미래에셋대우)과 기업공개(IPO) 대표주관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한동훈기자 hoon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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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아름다운 책 1위(상하이 신문 선정)
    신경보 선정 ‘올해의 좋은 책’ | 씨나닷컴 선정 ‘올해의 10대 도서’
    봉황TV 선정 ‘소장하고 싶은 책’, ‘올해의 책’ | 중화독서보 선정 ‘올해의 책’
    중국신문출판망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50권’ | 텅쉰닷컴 선정 ‘올해의 좋은 책’

    ★ 아마존 리뷰 526개
    ★ 중국 문화 포털 더우반 리뷰 4,075개
    ★ 중국 대표 온라인 서점 당당왕 리뷰 23,495개


    [리뷰 & 추천사]
    95세 노인이 그 많은 일들을 세세하게 기억하다니, 두 사람의 정이 얼마나 깊은 걸까.
    어쩌면 그 시절의 사랑은 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평생 단 한 사람만으로 충분한 사랑 말이다.
    -독자(당당왕)

    나이 들며 많은 걸 잊지만 그리움만은 잊히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책 -田不?(더우반)

    입소문을 듣고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추억이 방울방울 맺힌 삶의 소품 같은 이야기들
    -Moshiland(중국 아마존)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당신과 나의 몇 십 년 후를 생각하게 된다.
    처음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今天小熊不吃糖(더우반)

    오래도록 깊은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그리움의 책 -muxiaoni(중국 아마존)

    **찬사가 너무 많아 생략합니다.

    “평생 사랑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실화 ... 설레는 연애 감수성이 폭발했다


    2013년 중국에서 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아흔의 할아버지가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만든 화첩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손으로 들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18권의 화첩에는 부부의 어릴 적 에피소드, 처음 만남과 결혼하고 터전을 잡는 과정, 타의로 22년간 떨어져 살았던 순간 등 인생의 우여곡절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60여년 넘게 사랑한 아내와 함께한 순간들은 직접 그린 수채화로 담겼다.

    시작 _ 1946년 메이탕과 만났을 때 핑루는 26세의 군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끼리 약속되어 있던 상대였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메이탕에게 반지를 끼워주었고, 그것이 약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핑루는 이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 _ 1947년 결혼 후 핑루는 메이탕과 함께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했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 전쟁 직후라 직장 구하기가 힘든 때였다. 당시 비람이 불면 창문이 와르르 떨리는 허술한 판잣집에 살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시절의 세세한 이야기는 모두 추억이 되었다.

    이별 _ 1958년 핑루는 국민당 군대에 있던 경력 때문에 노동 교양 대상자가 되어 안후이성으로 보내졌다. 사방에서 메이탕에게 핑루와 헤어지라고 종용했지만 메이탕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집에 돌아가는 건 1년에 딱 한 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핑루는 아내가 보낸 편지를 모두 화첩에 붙여 두었다. 22년을 그렇게 살았다.

    만남 _ 1979년 핑루가 풀려나 이제야 부부와 아이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다. 살면서 가장 평화로운 10년을 보냈다. 핑루는 인생에 나쁜 날이 있으면 이렇게 좋은 날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2년, 메이탕의 신장병이 악화되었다. 핑루는 모든 일을 접고 아내를 돌보았다.

    죽음 _ 2008년 2008년 3월 19일, 긴 투병 끝에 메이탕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반년 동안, 핑루는 가눌 길 없는 슬픔 속에 살았다.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깬 뒤에도 매일 괴로워했다. 예전에 아내와 둘이 갔던 모든 곳들을 찾아다녔다. 그곳에 앉아 추억을 떠올리며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하나씩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8권에 이르는 화첩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는 18권의 화첩을 한 권으로 모은 책이다. 한 사람이 또 다른 단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낸 60년에 대한 기록이다. 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평범한 노인이 속 깊게 간직한 평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는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중국 전역에서 뜨거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60년간 한 사람만을 지고지순하게 바라본 사랑은 감동을 넘어서 믿기지 않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는 요즘, 이렇게 뿌리 깊고 단단한 사랑은 비현실적인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연애결혼도 아니고, 그저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핑루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그저 계기일 뿐, 나중에 그 긴 시간을 함께한 건 두 사람의 결정이라고, 바로 그것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이라고.

     

     


    이 책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다가올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사랑의 형태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사랑의 힘을 믿게 하는 진짜 연애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장을 넘겨보시길. 60년간의 연애 화첩 속으로 초대한다.

    그 안락과 평화 !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만일 이것으로 족해
    게으름의 자리 위에 길게 드러 눕는다면
    내 생명의 끝이 되어 그렇게 누워 쉬게 되리라
    네가 그럴싸하게
    나를 부추겨 스스로 만족하게하고
    쾌락으로 내 혼을 빼앗아간다면
    그것이 내 최후의 날이다
    내기를 하자
    ...
    이렇게 한 이상 다른 말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순간을 향해 말하노니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라고 말하면
    네가 나를 사슬로 친친 묶어도 좋다
    나는 기꺼이 멸망해 주마
    장송의 종이 울려 퍼지고
    너는 종자의 임무로부터 해방된다
    시계는 멈추고 바늘은 떨어진다
    나의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이 대사는 괴테의 '파우스트' 중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입니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이기도 합니다.   지식으로도 쾌락으로도 심지어 순결한 소녀 그레트헨과 신화 속의 미녀 헬레나와의 사랑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라고 외치는 순간 죽어 그 영혼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상국가를 실현해 가던 파우스트는 결국 이렇게 외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신은 천사들과 함께 그를 구해 냅니다.

     


      악마가 도전하고 신이 수락한 내기에서 신이 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악마는 신의 사업에 대하여 도전하고 간섭을 하지만 신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고, 결국은 그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될 뿐이며, 신은 항상 멋지게 국면을 전환시켜 악마 스스로 목을 매도록 밧줄을 제시합니다.   성경 '욥기'의 주인공 욥의 경우든 파우스트의 경우든 모두 신은 승리합니다.   이 내기에서 극의 주역을 맡은  인간은 신과 악마 사이에서 고뇌하고 쓰라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 신화적 이야기는 적당히 단념하고 손쉽게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번이나 되풀이된 빙하시대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난 무리들은 '달아난 원시인들'이 아니다... 난관을 뚫고,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자들은, 앉은 나무조차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들이며, 나무 열매가 익지 않자, 짐승을 잡아 고기로 배를 채운 무리들이며, 햇볕을 따라 후퇴하는 대신 옷과 불을 만들어 낸 무리들이다"

     

      
    자기 경영은 불리한 역경 속에서도 살아 내겠다는 결심과 고집입니다. 그것은 자기 안의 신을 믿는 것이며, 시련을 성숙으로 전환시켜내는 것입니다. 자기 경영은 자신이 주역인 인생의 무대에서 퇴각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뜻대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참 아름답구나"

     



    [어수웅의 르네상스人] 15개語 해독하는 鬼才… "일하다 지치면 사전 읽습니다"


    입력 : 2016.10.19 03:00

    ['콩글리시 찬가' 펴낸 번역가 신견식]

    스웨덴·라틴·히브리·터키어… 30년 된 웹스터 등 사전만 100권
    다른 번역가들 SOS에 적극 도와 '번역계의 귀인'이라 불리기도

    대전=어수웅 기자
    대전=어수웅 기자
    대전행 KTX에서 떠나지 않던 궁금증이 있었다. 어떤 기질이 사람을 이토록 언어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네덜란드어·스웨덴어·이탈리아어·러시아어 등 10개 언어를 사전 없이 읽는다는 번역가 신견식(43)씨. 라틴어·핀란드어·터키어 등 사전 참고해 독해 가능한 수준까지 확장하면, 15개 언어를 해독하는 '언어의 귀재'다. 그의 별명 또 하나는 '번역계의 귀인'. 아랍어 등 낯선 언어의 '외래어 표기'에 자신 없는 번역가들이 그의 페이스북으로 'SOS'를 보내면, 명쾌한 설명과 함께 올바른 표기를 알려준다고 했다. 돈 한 푼 생기는 일이 아닌데도. 하긴 이해관계를 따지고 움직인다면 그건 이미 본능이 아닐 테니.




    대전시 용운동에 그의 '번역 아지트'가 있었다. 초등생 시절부터 살았다는 30년 훌쩍 넘은 주공아파트. 주공아파트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영영(英英)사전부터 서아프리카 섬나라 카보베르데의 최신 사전까지 종이사전 100여 권이 도열해 있다.




    '○○w ○○○ld Dict○onary.' 마치 십자말풀이 게임처럼 단어 철자들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낡은 표지. 1988년판 웹스터 영영사전 'New World Dictionary'다. 앞뒤 표지 모두 사라진 옥스퍼드 스페인어-영어사전은 아예 누더기다. 1850쪽 분량의 이 '벽돌'은 손때 묻다 못해 네 귀퉁이가 다 말려 올라간 상태. 사전 주인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저는 주술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사전을 씹어 먹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국어가 좋았다고 했다. '초등생 신견식'은 여러 나라말로 된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에 반색하며 영어와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어휘와 어순 차이에 탐닉했고,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영어 잡지 '타임' 읽을 때 '고교생 신견식'은 독일어 잡지 '슈피겔'을 더듬거리며 읽었다. 두꺼운 사전 대여섯 권을 늘 들고 다녀야 했던 외대 스페인어과와 서울대 언어학과 대학원 시절에는, '팔운동'도 할 겸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는 청년이었다.




    번역가 신견식씨의 집은 동시에 사전의 성채.
    번역가 신견식씨의 집은 동시에 사전의 성채. 노르웨이어·히브리어·카탈루냐어·핀란드어 등 100여 권의 사전이 그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인구 10만명의 서아프리카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어-독일어 사전. 아쉽게도 아직 그 나라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대전=신현종 기자



    어떤 기질이 당신을 '언어 귀재'로 성장시켰느냐는 질문에, 그는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언어를 공부하며 가장 즐거웠던,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에 대한 대답에 힌트가 있다.



    영어 black(검정)과 프랑스어 blanc(하양)이 한 뿌리임을 알게 됐을 때의 감동. 하양과 검정이 한 뿌리라니. 독일어 blank(빛나는·반짝이는)에 원뜻이 남아 있듯, 프랑스어 blanc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빛나다·불타다'의 의미라는 것. 하얗게 불타는 존재와 다 타서 검게 그을린 존재가 나란히 있는 세계. "그때의 감동을 잊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어학과 번역도 최고 수준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해진 산꼭대기가 아니라, 드넓은 바다나 우주를 항해하는 마음으로 쭉 갑니다. 그러고 보니 아랍어 카무스(사전)는 그리스어 오케아노스(대양)에서 왔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태도와 진정한 즐거움도 여기 있지 않을까. 셈 계산에는 뒤처질지라도, 인간과 신화의 시원(始原)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 그는 "언어는 인간 정신과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면서 "언어의 뿌리를 캐다 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최근 그는 생애 첫 저서인 '콩글리시 찬가'(뿌리와 이파리)를 펴냈다. 본지 Books에서도 소개했지만, 요약하자면 100퍼센트 한국어는 없으니 영어 강박에서 벗어나 외래어의 역사와 현재의 쓰임을 두루 살피자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첫 책 원고를 탈고한 뒤, 신씨는 며칠 좀 쉬겠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르네상스인 인터뷰 시리즈에 등장했던 동료 번역가 노승영씨(본지 3월 16일 자 A23면)도 외래어 표기와 관련해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 댓글로 물었다. "설마 사전이나 언어학 논문 읽으면서 쉬시는 건 아니죠?"



    '번역계의 귀인'의 대답은 "그것만 하는 건 아닙니다"였고, 그 아랫줄에는 "저희 집에 감시 카메라 다신 줄…"이라는 댓글이 따라붙었다. 영상 번역을 하는 아내 정경진씨의 재치이자 확인이었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며, 잘하면 주변에서 찾게 된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여기에 있다.



    다음은 일문 일답

    ㅡ어떻게 하면 '외국어 사전 읽기'가 취미가 될 수 있나요.


    낱말 안에는 사회와 역사가 담겨 있죠. 물론 겉의 더께를 들춰야 비로소 속이 드러납니다. 많은 언어의 낱말들을 엮으면서 역사책과 소설책을 읽듯 저만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재밌습니다. 고등학교 땐 반 친구들에게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영한사전들을 빌려 읽으면서 사전마다 다른 특징을 즐겼죠. 지금도 대형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사전들을 꼭 살펴보곤 합니다. 주술적이지는 않아서 사전을 씹어 먹진 않습니다.


    15개 국어를 하신다고 들었다. 내가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던 첫 번째 순간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꾸준한 관심과 흥미 때문이라고 봐요.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사주신 영어회화 교재에 나온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인사말에서 상상 이상의 재미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6학년 때 아버지가 가져오신 유럽 각국 화폐 포스터의 여러 언어와 옆집 아저씨가 주신 영한사전과 독한사전의 어원 설명을 보면서 더욱 흥미를 느꼈죠. 그 독한사전은 지금도 있습니다.



    여럿 중에 하필 언어를 욕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습득에 들인 구체적 노력이 궁금하다.



    언어는 인간 정신과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천착하게 됐습니다. 언어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함께 살피는 재미도 있고요. 그 뿌리를 캐다 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데도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교 시절 독일어를 배우면서 다 이해도 못할 슈피겔지를 사 읽던 것도 돌이켜 보면 큰 도움이 되었고요. 제대 후 학교 인터넷으로 유럽연합 사이트에 들어가 여러 언어로 된 문서를 출력해 사전을 뒤적이며 공부했죠. 두꺼운 사전 대여섯 권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느라 무거웠지만 팔 운동이라 여겼어요. 어학은 결국 관심과 노력입니다. 얼마나 관심을 갖고 시간과 애정을 들이느냐에 따라 정직한 결과가 나와요. 궁금한 단어가 있을 때 문맥에서 추측한 뒤에 사전을 찾아 읽고 부지런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죠.




    각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으신지. 핀란드어 라틴어와 영어 서반아어 수준이 다를 텐데.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크게 막히는 것 없이 대화가 가능합니다. 다른 언어는 간단한 주제로 의견을 말할 만한 수준이고요.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등 게르만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 러시아어, 일본어는 사전 없이 읽고 라틴어, 그리스어, 핀란드어, 터키어, 중국어 등은 사전이 필요합니다. 현재까지 출판 번역은 스웨덴어, 영어, 프랑스어를 했고 실무 번역은 거의 모든 유럽 언어를 다룹니다.



    외국 문화와 언어를 공부하지만 어쩌다 보니 밖에 나간 것은 삼십대 후반 유럽 신혼여행이 처음이었어요. 독일과 스페인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베로나에서 이탈리아어로 길을 물었다가 반쯤만 알아듣고 엉뚱한 길에서 한참을 헤매기도 했죠. 영어권은 안 갔으나 영어가 통하는 데선 아내가 영어를 맡고 저는 딴 유럽 언어들을 맡았는데 외국어로 처음 겪은 두 달의 좌충우돌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전 읽기와 수집이 취미였다는데, 어느 정도신지. 구체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언어 사전은 거의 다 있습니다. 스페인어-영어, 체코어-독일어처럼 여러 방향도 포괄하고 동의어, 속어 사전도 있다 보니 종이책으로도 백 권이 넘습니다. 다소 특이한 언어로는 프랑스 알자스의 독일어 방언, 이디시어(유대인이 쓰는 독일어 변종), 서아프리카 카부베르드 크레올어,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크레올어 사전도 있고요. 엘제비어(Elsevier) 출판사에서 나온 자동차, 범죄학, 출판, 재무 등 다언어 전문용어사전도 여럿 모았습니다. 하도 들춰보다 보니 상당수 사전이 누더기가 돼서 걱정입니다.


    다른 번역가들의 질문을 꼼꼼히 대답해주고 있다 들었다. 가장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책에 나오는 폴란드 지명이 독일어식으로 대강 표기한 것이라 아리송했는데 여러 정황을 살펴 비슷한 지명들 사이에서 제대로 짚어줬고, 영어 중역의 노르웨이어 책 관련 질문 때문에 노르웨이어 원서 및 스웨덴어와 독일어 역서까지 확인해서 답해준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공부를 계속해서 학교에 남을 수도 있고, 희귀 언어 재능을 살려 지역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문 번역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물론 노승영 선생은 '번역계의 귀인'이라며 고마워했다.



    그쪽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혼자 하는 공부가 좋아 번역가라는 직업도 성격에 맞는 편입니다. 물론 독학자의 한계도 있으니 전공과 관심분야의 책과 논문은 꾸준히 읽습니다.


    이 공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과 가장 즐거웠던 순간,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말씀해 주신다면.(물론 앞의 둘은 같은 순간일 수도 있고 다를 수고 있겠지만)



    6백쪽 가량의 장편소설을 2년에 걸쳐 옮겼는데 그간 독일어나 영어에서 중역되던 스웨덴어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원어에서 번역해 뿌듯했죠. 한 낱말의 역사를 봐도 여러 언어의 교차가 보이고 무관할 것 같은 말들이 알고 보면 관계가 있어요. 영어 black(검정)과 프랑스어 blanc(하양)이 한 뿌리임을 알고 느낀 감동은 잊기 힘든데 독일어 blank(빛나는, 반짝이는)에 원뜻이 남아 있듯 프랑스어 blanc은 게르만어에서 유래했죠.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빛나다/불타다'의 뜻이라 하얗게 불타는 것과 다 타서 검게 그을린 게 함께 있습니다. 딴 공부나 일도 그렇지만 어학과 번역도 최고 수준이 산꼭대기처럼 정해진 게 아니잖아요. 가끔 힘들긴 해도 드넓은 바다나 우주를 항해하는 마음으로 쭉 갑니다. 아랍어 카무스(사전)가 그리스어 오케아노스(대양)에서 왔으니 통하는 구석이 있죠.





    콩글리시 찬가가 선생의 첫 책으로 안다. 이 주제를 첫 번째 책의 주제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



    콩글리시를 비롯한 외래어를 엉터리 영어 또는 한국어를 더럽히는 국적 없는 말로 좁게 보지 말고 넓게 보자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차용어의 변용은 모든 언어에서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콩글리시를 비롯한 외래어가 한국 근현대 문화 발전의 산물이라는 적극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했죠. 몇 해 전 망간, 메탄, 비닐, 비타민, 칼륨이 망가니즈, 메테인, 바이닐, 바이타민, 포타슘 등 영어식으로 바뀌었는데 영어만 바라봐서도 안 되고요. 한국 화학용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기반의 독일어 차용어가 많기에 오히려 수많은 언어와 더 비슷합니다. 외래어와 외국어는 다른 거죠. 영어의 영향이 커지는 상황도 인정해야겠지만 영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도 필요합니다.




    국립국어원이 최근 우리말샘을 오픈했다. 주지하다시피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이다. 혹시 지지나 비판이 있으신지.



    네이버 개방형 사전의 허점에서 드러나듯이 언어를 깊이 공부한 여러 사람이 함께 관리해 줘야 사전의 구실을 제대로 할 겁니다.



    인터넷 세대의 언어는 점점 외계어가 되고 있다는 비판과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적극적·탄력적 적응이라는 지지가 있다. 물론 균형감각이 중요하겠지만, '콩글리시 찬가'의 저자로서 당신의 의견은.



    언어는 늘 변하고 또 방언, 속어, 은어 등 여러 양상이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 없애기보다는 적절히 잘 살려서 각 영역에 맞게 제대로 쓴다면 말글살이가 풍요해지겠죠.



    15개 국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점과 (혹시 있다면 )불편한 점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창이 많아서 좋습니다. 겨울에 그 창문으로 찬바람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좋아요. 딱히 불편한 점은 없지만 많은 사전을 언제나 찾아야 하니 번거로울 수는 있겠죠?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영상번역을 하는 아내도 언어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일하면서 서로 도움도 주고받고 공통 관심사로 얘기도 함께 나눌 수 있어 즐겁습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6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 ‘비정형(informe)’의 상상력-함기석·정재학·황병승 시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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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강일구]

    ‘비정형(informe)’의 상상력-함기석·정재학· 황병승 시의 경우

    1. 고유성으로 복귀해가는 비정형의 사유

    근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의 생활양식은 점차 합목적적 근대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편성되어 왔다. 시간과 공간은 분절되고 압축되었으며 제도를 포함한 일체의 지배방식 안에 수(數)의 법칙성이 가장 강력한 설득의 기술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근대국가가 지향했던 합리적 제도와 질서의 구축, 과학적 사고의 부양, 위생학적 사회의 확립, 표준화와 계량화에 의한 대량생산 시스템의 가동, 빅 데이터( big data)의 축적과 활용 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수의 법칙성에 의한 정형화(定型化)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정형화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한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그늘’이며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그 틀 속에 귀속시키려 하는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인간과 사물을 ‘상품’과 등질적인 기능과 수량, 교환가치로 파악하는 데 익숙해진 근원에는 이 같은 정형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 존재는 ‘익명의 대체 가능한 상품’처럼 소비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 내면을 은밀하게 훈육하고 강제하는 이 같은 정형의 메커니즘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그것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무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인간이 정형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졌을 때, 그 외의 것들이 지닌 가치는 왜곡되거나 소외되며 나아가 장애나 질병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처에서 신경증과 욕망의 비만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보존과 배려를 위한 생명체가 아닌, 정형의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체로부터 발생한 ‘오작동’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이러한 존재성을 추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격리 처리함으로써 현실의 표면을 매끄럽고 안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속해서 연예인의 환상과, 인터넷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 표준화된 미의 척도를 자연스럽게 우리의 내면에 침투시킨다.




    대부분 현대예술은 이러한 정형의 메커니즘과의 투쟁을 그 내용물로 담고 있다. 예술은 개별적인 인간 고유의 내면성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다. 이는 문학 또한 마찬가지이며, 특히 1990년대 한국 문단에서 대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라는 말들은 직접 정형의 메커니즘을 공격하는 방향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정형성은 그 견고성을 유지·보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포스트모던이나 해체라는 ‘말’이 주변성을 빈틈없이 재영토화하는 정형의 메커니즘에 흡수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내가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게릴라전이 소모적인 저항에 머물지 않고 이룩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함기석·정재학·황병승 시에 보이는 해체와 재영토화 간의 길항적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고뇌와 절망, 새로운 존재의 발굴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2000년대 한국시의 주요한 현상은 ‘파괴된 몸’의 형상과 ‘말이 될 수 없는 말들’로 요약된다. 이러한 특징을 보인 일군의 시인들은 신서정, 미래파, 뉴웨이브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들의 시가 지닌 난해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것들이 파악 불가능한 대중사회에 대한 절망의 결과인지, 세계와 대면하기를 포기하고 자폐적 언어에 갇혀버린 태만의 결과인지, 혹은 새롭고 유의미한 시적 상상력의 모색인지 판단해야 했다. 무엇보다 절감했던 것은 이들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아우를 수 있는 지평이 부재해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경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상상력의 지평을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회화 용어인 ‘비정형(informe/formless)’의 개념과 조우시키고자 한다. 바타유의 ‘비정형’이란 기획된 사물의 정형을 무화하는 운동방식이며 사물의 이름에 부여된 이성의 권위를 박탈하는, 고착된 ‘개념’을 부정하는 운동이다. 1929년 바타유는 앙드레 브르통과 결별하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대립했으며, 모더니즘 예술 전반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미셸 레리스 같은 동료와 함께 그는 '도큐망(Doocuments)'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정의된 '사전(Dictionnaire)'을 제시했다. 이 사전은 근본적으로 이성중심주의의 권위와 폭력성을 비판하는 한편, 그에 대항하는 모더니즘 예술 또한 이성의 기획에 불과함을 폭로하려 했다. ‘비정형’은 그 사전의 주요한 챕터를 이룬다.






    사전이라는 것은 단어의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단어의 직무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비정형은 주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형용사이면서도, 각각의 사물은 그 자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세상의 사물을 저급하게 끌어내리는(déclasser) 역할을 하는 용어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거미나 지렁이처럼 도처에서 짓눌릴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믹한 인간이 만족하기 위해서 우주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 전체의 목표는 이외에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프록코트를, 즉 수학적인 프록코트를 부여하는 것과 연관된다. 반면에 우주가 어느 것과도 유사하지 않고 비정형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주는 거미나 침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조르주 바타유, '사전' ,  '도큐망' 제1권 7호, 1929, p.382.(크라우스, 정연심 외 옮김,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미진사, 2013, p.4. 재인용)





    바타유가 공격하는 것은 ‘수학적인 프록코트’를 거치지 않고선 사물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근대의 로고스 중심주의이다. 근대의 이성적 합리주의는 사물의 추(醜)를 배제함으로써 아카데믹한 인간이 ‘만족’할만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인간 내면의 야생적 본성, 세계의 배설적 측면, 자연의 폭력성은 근대 바깥으로 내던지거나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카데믹한 인간은 웅변가의 입을 바라보는 동안 로고스적 행위인 ‘말’에 몰두할 뿐, 그의 혓바닥이 튕겨내는 ‘침’을 바라보지 않는다. 바타유는 형태가 ‘훼손된’ 혹은 ‘해체되는’ 사물들로부터 매혹을 느낀다. 그는 사물의 형태를 연기나 침과 같은 것으로 변형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최초의 순수지각으로 되돌아가는 예술의 표현방식을 고안한다. 그것이 비정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정형이 드러내는 사물의 ‘저급함’이다. 우주를 “거미나 침”의 형태로 되돌려놓는 것, 즉 정돈된 형상으로 귀결될 수 없는 불쾌하고 추한 ‘형용사’적 특성을 다시 존재의 본질로 되돌려놓는 것이 비정형의 임무다. 바타유는 사물 자체를 이성적 위계질서로 보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의 사상을 ‘저급유물론(base matérialisme)’이라 명명한다. 비정형은 사물을 순수감각적 원형(原形)으로 되돌려놓는 저급유물론의 핵심 개념이다. 이러한 바타유의 사유는 근대적 사유의 정형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비정형’을 통해 정형성을 공격하는 함기석·정재학·황병승 등 2000년대 저급유물론적 시의 상상 기저를 추적하고자 한다.



    2. 기호의 도식성과 투쟁하는 추(醜)


    최초로 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만든 18세기의 학자 바움가르텐에게 아름다움이란 ‘감성적 인식’을 뜻했다. 감성은 이성을 보완하는 도구였다. 그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감성적 인식을 시(詩)에서 찾았다. 시가 감성을 다루지만 이성에 가장 가까운 예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철저한 근대인이었던 그에게 시의 언어는 인식 가능한 ‘정형’의 세계를 드러내야 했으며, 현실에서 감각 불가능한 표현, 예컨대 ‘하얀 어둠’ 같은 표현은 사용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현대예술은 이와 같은 고전미학의 관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상대적 ‘무질서’를 추구함으로써 예술의 개념을 유동적으로 재조정해왔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한국시에 정형성의 대척점에 놓인 그로테스크와 추(醜)가 대대적으로 나타난 이후 이러한 경향은 이성중심적인 사유를 해체하고 공격하는 전위적 표현방식이 되었다. 1990년대 말 그로테스크와 추에 의한 해체 전략은 간혹 비정형의 사유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 분절의 지점을 점유한 것이 함기석의 상상력이라 판단된다. 그는 형용모순과 감각 불가능한 상태의 재현을 통해 억압적 ‘정형성’에 대한 공격적 인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고정된 정체성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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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기석에게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수학적 등식화(A=B)와도 같다. 이는 인간 존재를 해석 가능한 기호(sign)로 바꾸어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지 입은 여자”로 불리길 꿈꾸는 여성의 욕망은 그녀가 ‘직선’과 ‘밑줄’이라는 전혀 엉뚱한 수학적 기호들로 전환됨으로써 좌초된다. 연관공, 형사, 목수의 눈에 그녀의 육체는 해석해야 하는 도형으로 보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 분야의 지식을 통해서만 타인을 바라보며, 그들 자신의 직업이라는 사회적 규정 안에 갇혀 대상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피살자’로만 발견되는 여자의 육체는 검은 도화선, 사건의 단서, 줄자 등 이미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물에 불과하다. 여기서 함기석이 문제시하는 것과 바타유가 비판한 ‘수학적 프록코트’가 서로 일치됨을 알 수 있다. 여자의 몸을 가로지름으로써 그녀가 ‘태어남’을 가능케 하는 ‘직선’은 수학적 프록코트의 은유이다. 수학적 프록코트란 모든 존재를 규격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예측 가능하고 계량 가능한 사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함기석은 연관공, 형사, 목수 등이 드러내는 각기 다른 시각을 통해 현대 사회의 질서정연한 분업체계 안에 수학적 프록코트가 내장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분업체계는 인간을 그 영역으로부터 생성된 표준화된 지식과 획일적 관점 안에 가둠으로써 타자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직선을 그음으로써 여자가 “태어났”다는 표현은 그녀가 타인의 눈에 ‘피살자’로 발견된다는 상황과 모순된다. 이 역설은 인간이 사회 제도 안에서 정체성을 부여받는 순간 한 주체로 ‘탄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할 자유를 빼앗긴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직선’은 인간 정체성을 규격화하는 사회적 메스로서 정형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아울러 한 인간의 사회적 호칭이 기입될 빈칸으로서 개인의 억압된 장소를 보여준다.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배제된 것’, 즉 개인의 고유성이다. 이로부터 함기석의 비정형적 상상력이 시작된다. 그의 기본 전제는 인간이란 본래 규정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수학적 등식화를 총괄하는 대타자를 뭉개진 곡선()의 형상으로 그려낸 점이 이러한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특정 개인을 지칭하기보다 인간의 사물화를 기획한 제도를 상징하며, 나아가 수학적 프록코트를 초과하는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이때 유령처럼 생긴 곡선의 형상은 파악 불가능한 훈육권력의 속성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속하는 실체는 무엇으로 상징되는가? 함기석에게 그것은 수학적 등식화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편재된 도식화된 기호라 할 수 있다. '내가 잠들면''국어선생은 달팽이''수학시간'을 비롯한 여러 시편에서 함기석은 ‘교실’, ‘사전’ 등과 같은 사회화 장치들을 추적한다. 교실은 인간을 교사-학생이라는 일방향적인 관계로 지식을 주입한다. 사전은 사회적 약속에 의한 획일적 의미가 탈주하지 못하게 하는 감옥이 된다. 위 시 '○가 하루는’에도 직업명과 사물명이 개인의 욕망과 고유성을 거세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함기석은 기호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기호의 도구가 되는 상황을 문제시한다. 그는 종종 말놀이를 통해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한다. 함기석의 첫 시집의 제목이자 시 제목인 “국어선생은 달팽이”처럼 의미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말놀이를 통해 기호의 규약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는 시를 제도 언어의 도식성에 저항하는 게릴라로 인식한다. 함기석이 시 '고유한 방화범'에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이라고 말한 것은, 칠레의 시인 니카노르 파라가 “시인은 사물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이름 변경')라고 말한 것 보다 더 비장하게 기호의 도식성과 투쟁해야 하는 시인의 사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달린다
      사내는 가방 속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차가 눈보라를 끌고 달린다
      사내는 가방 속 하얀 지하실을 내려다본다
      기차가 눈보라를 끌고 빌딩숲을 달린다
      사내는 다친 발목과 하늘에 빨간 요오드팅크를 뿌리며
      사물들을 새롭게 명명한다


    오후 3시는 밤하늘이다 바람은 죽은 쥐
      백열등 불빛은 난쟁이다 연필은
      파란 눈의 밀랍인형 글자는 흰 칼이다
      천장은 토성 종이는 지하실이다


    (중략)


    사내는 밀랍인형의 머릴 잘라 들판으로 던진다
      들판으로 검은 쥐떼가 몰려든다
      사내는 지하실을 무너뜨리며 소리친다
      녹색의 시체들은 검은 말이야 언어야 흰 칼이야
      검은 녹색이 희다니 으악! 가방은 가방(假房)이야
      그럼 내가 앉아 있던 가방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기차가 들판을 지나며 들판으로 달린다

    '녹색의 시체들이 차례로 일어선다' 부분

     
    사물들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하고자 하는 ‘사내’는 시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사내는 명명을 위해 ‘요오드팅크’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인의 말바꿈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치유의 과정임을 암시한다. 즉 사물에 덧씌워진 기호가 사물의 본질을 기획된 의미 속에 고정해 버리고 ‘상처 입히는’ 것이라면, 시인의 말바꿈은 사물의 본질을 해방하는 저항인 셈이다. 독자는 이 시를 착란적이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따라 읽어가며 사전적 의미 규정에서 벗어나도록 유도된다. ‘오후 3시’가 ‘밤하늘’이 되고 ‘천장’이 ‘토성’이 되는 형용모순의 비약적인 은유들은 의미론적 차원에 대한 극단적 저항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내가 가방에 갇힌 채 ‘누운’ 자세로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저항의 활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주하는 기차는 사내의 무기력함을 부각시킨다. 기차는 압도적인 속도로 빌딩숲과 들판을 앞질러 가며 ‘눈보라’로 현실을 뒤덮는다. 기차와 사내의 대비 관계를 유의할 때, 이 눈보라는 시 '○가 하루는'의 ‘직선’처럼 인간과 사물을 압도하는 폭력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말바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동반함으로써 기호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필기구가 그로테스크한 사물로 명명되는 것이다. 연필은 ‘파란 눈의 밀랍인형’이라는 비생명적인 모조인간으로, 검은 글자는 ‘흰 칼’이라는 무기로, 종이는 ‘지하실’이라는 음습한 공간으로 대체된다. 이는 연필을 생명이 거세된 인간으로, 문자를 생명을 파괴하는 흉기로, 종이를 음습한 밀실로 이해하게끔 함으로써, 문서화의 과정이 곧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파괴하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사내는 필기구들을 파괴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전복시킬 가능성은 미미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가방(假房)’, 즉 거짓된 안식처에 머물러 있고 기차의 질주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은유로 전면화된 추는 함기석의 절망적인 현실 인식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에 동원된 추는 기호의 도식이 지닌 폭력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더러 은폐된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녹색의 시체들은 검은 말이야 언어야 흰 칼이야/검은 녹색이 희다니 으악! 가방은 가방(假房)이야”에 보이는 인식론적 깨달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함기석은 기호의 도식성이 지닌 추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바타유적인 저급유물론의 입구에 진입한다. 저급유물론은 관념을 배제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조차 사물의 추만은 허용하지 않은 채 세계를 보고자 했음을 비판하면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추의 주요한 본질 중 하나가 비정형인 것이다. 함기석은 '사라진 소녀' '하얀 새' '창문' 등 여러 시에서 인간과 세계의 표현될 수 없는 ‘여분’을 늘어진 창자, 시체 등 훼손된 육체성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의 시는 인간이 가진 비정형적 잠재 요인을 드러내기 위해 추와의 결합을 기꺼이 허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비정형’의 상상력은 주로 정형의 세계를 해체하고 비판하는 데 묶여 있는 듯하다.

     3. 감금된 게니우스의 고통

    ‘나’란 육체와 정신의 고유성을 통해서 인식된다. 생명 감각으로서 육체와 그 안에 지속하는 정신(기억)의 통일성으로부터 개인은 자아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학문체계가 분류와 분석을 지향한 결과 자연을 포함한 인간의 신체는 해부학적 패러다임에 귀속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달리 어떤 세계 질서에 구속되기 이전의 순수한 신체를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른다. 기관 없는 신체는 무엇으로도 실현될 수 있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다. 근대의 ‘신체’가 그렇듯이 정신 또한 결코 온전한 의미로 인식되기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도덕과 질서의 규율에 따라 인간은 ‘나’라고 호명되는 주체화 과정에서 자아로부터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배제한다.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은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그 무엇’을 게니우스(Genius)라고 부른다. 게니우스란 로마 신화에서 개개인에 내재한 수호신을 의미하지만, 아감벤은 이 용어를 제도 장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자아의 ‘이면’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정재학의 비정형적 상상력은 바로 제도 장치에 억압되어 있던 게니우스를 발굴하고자 한다. 그의 시에 억압 장치로 등장하는 건 바로 ‘나’를 규율하는 시선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 앞에서
      저 찍어준 것 기억나세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말이에요
      현상한 사진에 저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진에 담긴 편지' 부분

     
    사람들의 시선에 숨이 막혔네 그들은 나에게 파란색칠을 마구 해댔네 난 내 몸에 불을 지폈네 보라 연기가 피어오르네 그들은 여전히 파란색이라 하네

     
    '낡은 서랍 속에서 1' 부분

     
    ‘나’라는 노예, 메신저, 허상
      나는 당신을 거기에서 기다린다

     
    '모피 입은 비너스' 부분

     
    빌딩 꼭대기에서 배고픈 부리를 가진 새 한 마리 딱딱하게 나를 바라본다 눈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볼 수 있었지만 무엇 하나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응시' 부분

     
    정체성 문제에 대해 정재학은 함기석보다 비관적이다. 함기석의 ‘나’가 기호의 도식성에 의해 손상된다면, 정재학의 ‘나’는 아예 타자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타인들의 시선은 나를 미끄러지며 빗겨갈 뿐이다. 나는 발견되지 않거나 오인된다. 그들 눈앞에 있는 나의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나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사진에 담긴 편지')일 뿐이다. 나는 비어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은 나를 지워버리는 동어반복의 폭력이다. '낡은 서랍 속에서 1'의 ‘나’에게서 풍기는 ‘보라 연기’를 가두는 것은 타인의 색칠이며, '모피 입은 비너스'의 규정된 ‘나’는 노예에 불과하다. 이들 시의 화자인 ‘나’는 비어있으며 왜곡되어 있으며 수동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재학 시의 주된 문법이 대화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상호 이해에 대한 강한 회의감과 함께 타인과 대화하고 그들을 호명하면서 진정 이해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응시'에 보이는 서로 다른 눈들의 결합은 그러한 상호 이해에 대한 회의감과 소망을 모두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눈들’은 하나로 합쳐지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서로가 ‘타자’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나려는 상상이다. 그러나 하나가 된 시야로 사방을 볼 수는 있어도 “무엇 하나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호 이해의 실패를 뜻한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가 아닌 진정한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발견되지 못한다는 절망으로부터 정재학의 비정형의 상상이 시작된다.

      내 방에는 세 개의 시계가 있네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네 문 옆의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가까웠네 밖에 나가보니 모두들 우산을 쓰고 있었네 나만 비를 맞네 비는 수은으로 내 몸에 스며드네 방에 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안심했었네 수은독이 견디기 힘들었네 약속 장소는 너무 멀었네 택시를 잡았네 운전사는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보며 운전하네 그는 마구 달렸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물먹은 성냥은 켜지지 않았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속 말을 거네 알 수 없는 변성화음이었네 그는 앞차를 받았네 그래도 계속 나를 보네 택시에서 내렸네 다른 택시를 잡았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네 담배 연기는 오로라처럼 피어오르네 담배 연기가 아름다운 것을 처음 느꼈네 그는 외눈박이였네 약속 장소 반대 방향으로 가네 운전기사와 다퉜네 그는 담배 연기를 싫어하네 구토하네 나 그 냄새 견디기 힘들어 택시에서 내렸네 수은은 계속 내리네 다른 택시를 또 잡았네 그는 내 눈동자가 은색이라 하네 믿지 않았네 그 운전사는 눈이 네 개였네 거북하지 않았네 그는 약속 장소에 왔으니 내리라고 하네 생각해 보니 그에게 약속 장소 말한 적 없네 그는 요금을 받지 않네 내려보니 내 방이었네 방에는 아무도 없었네 침대 위의 시계는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네 거울을 보네 눈동자가 없었네 (중략)


    세 개의 시계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네

     

    '세 개의 시계' 부분

     
    정재학의 시에서 상호 이해에 대한 회의감은 종종 기형적인 눈의 이미지로 반복된다. ‘택시 기사’가 ‘외눈박이’였다가 ‘네 개’의 눈으로, ‘나’의 눈동자가 ‘은색’이었다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상호 이해의 시선이 과도하게 작동하거나 아예 작동이 정지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착 상황의 반복은 자폐적 존재의 가능태를 부추긴다. 더불어 방을 떠나 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화자의 상황과 경험 불가능한 이미지의 나열이 벗어날 수 없는 자폐적인 공간성을 강화한다. 이때 끊임없이 ‘내리는’ 수은비, ‘내리고 오르는’ 택시, 운전사의 불길한 모습 등의 전개는 불안을 야기하는 단문들의 강박적인 리듬과도 조응한다. 이 불길한 외부 공간은 화자의 ‘약속’을 무산시킨다. 이 시에서 끝끝내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은 불안에 뒤덮인 ‘방’이다. 이 ‘방’이란 ‘나’가 떠나고자 하지만 되돌아오게 되는 원형트랙이다. 결국 회귀할 수밖에 없는 자폐적 세계, 그러나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심연인 이 방은 '낡은 서랍 속에서 1'의 형태 없는 ‘연기’처럼 타자에게는 해석될 수 없는 ‘나’의 게니우스라할 수 있다.

    ‘약속’을 예고하는, 그리고 시의 끝에서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세 개의 시계를 주목해보자. 세 개의 시계라는 상징으로부터 쉽게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유추해볼 수 있다. ‘약속’과 결부된 죽은 시계들은 과거에 대한 추억과 현재에 대한 향유,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모두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폐적인 방과 죽은 시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박제된 존재다. 정재학의 시는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진실의 절망을 이같이 드러낸다. 이때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불안은 사회와 자아의 균열 지점에서 파생함과 동시에 그 자체로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내부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존재 내적 불안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한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정육점을 실은 버스가 오자 그녀는 소매를 흘리며 버스에 오른다 정류장의 휴지통에는 얼굴 없는 안경들이 담겨 있었다 버스는 왜 이리 늦는 것일까 야간약국으로 가려면 사진 현상소를 실은 버스를 타야 한다 하늘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잠시 후 비닐 공장을 실은 버스가 왔다 아까 보았던 여자가 담요에 싸인 아이를 안고 내렸다 그녀는 정류장 주위의 소금으로 된 돌들을 씻어 아이에게 먹였다 사진 현상소를 실은 버스가 오자 그녀는 함께 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아무 윤곽 없는 종이 헝겊 얼굴이 드러났다


    '야간약국 가는 길' 부분

     
    정재학은 인간을 한 꺼풀의 ‘비닐’, 한 겹의 ‘종이 헝겊 얼굴’이라는 두께로 표현한다. 또한 휴지통에 버려진 안경들이 담아낼 얼굴들처럼, 자아란 폐기된 배설물이 머문 장소로 소환되고 있다. 그의 해체된 형상들은 정형으로서의 사회적 자아를 부정한다. 그로부터 그는 절대 언어화되지 않는 인간의 육체성과 정체성을 끄집어낸다. 휘발될 것 같은 자아의 얇은 피부는 그가 도시적 질서 안에서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생존의 두께다. 그 배설물적 형상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정서는 실존적 감각을 연다. 이는 규율 사회 안에서 소외감을 내장한 도시인의 실존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 ‘비정형’이란 자유로운 자아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우리 자신이 예속되어있는 육체와 정신의 고유성을 지시한다. 그 고유성은 추하고 섬뜩한 비정형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존재의 진실은 인용한 시 ?야간약국 가는 길?에 등장하는 사물들에도 내장되어 있다. 규칙적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는 정육점, 사진 현상소, 비닐 공장이 실려 있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흔적을 거세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정육점은 짐승을 고깃덩어리로 해체하고, 사진 현상소는 현실을 이미지로 박제하며, 비닐 공장은 접촉을 차단하는 투명한 막을 생산한다. 정육점, 사진 현상소, 비닐 공장 등이 환기하는 기계적 시스템은 존재의 실체를 은폐하고 그것을 상품과 시뮬라크르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을 암시한다. 정재학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괴함’은 타자의 시선과 자기 육체 사이에 박락된 실존적 절규를 내포한다. 그 절규는 형상화될 수 없는 게니우스로서의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4. 저급유물론적 타자의 탄생

    유대-기독교 전통으로 보았을 때 언어의 다양성은 죄악의 소산이다. 바벨의 신화는 국민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는 일원적 언어 체계를 지향한다. 반면 비정형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워라무룽운지’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주 대륙에 최초로 발 디딘 워라무룽운지라는 신화적 여성은 자기 자식들에게 각기 ‘땅’과 ‘언어’를 정해준다. 갈등하고 반목하던 자식들은 다른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형제의 영토를 지날 때마다 그 영토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소수의 부족 사회를 이룬 호주 원주민들에게 땅과 인간, 언어는 하나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땅의 질서와 융합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이 고안한 낯선 언어는 일원적 가치를 해체함으로써 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황병승의 낯선 문법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도시라는 현대사회의 ‘대지’로부터 자라난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환영과도 같은 네온사인과 영상들, 파편화된 육체성이 그의 감각의 뿌리를 이룬다. 그의 언어에는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관념이 삭제되어 있다. 이장욱의 해설처럼 “이 시집의 흩날리는 상징들은, 할 말이 있는데 에둘러 말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물성을 잠시 빌린 것도 아니다.”. 황병승의 언어는 유형진이 일명 ‘모니터킨트’라 부른 고향상실의 세대가 가진 공통된 감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황병승은 현실과 시뮬라크르가 혼융된 대지로부터 고유한 영토를 만든다. 그가 실험하는 비정형의 상상력은 도시 내부에서 발견한 ‘바깥’이며, 진정한 의미의 타자성이다.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커밍아웃' 부분

     

    황병승은 자기 시의 주요한 테마로 거듭 ‘동성애’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동성애를 다루는 이상으로 신체의 상부와 하부, 인간성과 동물성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 시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획된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우리 자신에게서 배제된 추악이 외부(外部)가 아니라 이미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는 본성임을 드러낸다. 황병승이 ‘커밍아웃’시키고자 하는 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동성애의 욕망 이상의 타자성이다. 그는 ‘입술’을 뜯어낸 위치에서 항문으로 ‘배설하듯’ 대화하며 ‘당신’을 알아간다. 이는 동물성을 전면화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재위치화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처럼 뒤틀린 육체의 이미지는 새롭게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해체된 살, 즉 순수한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다른 시에도 인간의 배설적이고 짐승적인 측면이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누굴까, 빨간 눈 솟은 귀 바로 나라는 네발짐승의”('살인마(殺人魔)_Birthday Rabbit')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동시에 황병승의 시에는 강간, 살인, 거세와 같은 극단적인 범죄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는 마치 어디까지가 ‘인간’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에 소환된 동성애적 이미지들은 인간을 바라보는 도덕적 시선을 파기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다.

    황병승의 비정형적 상상력이 지닌 난해성은 바로 보편적 도덕률을 이탈하려는 시도에서 연유한다. ‘옳은’ 행동과 결정을 강요하는 도덕 원칙을 파열시킬 때 시의 맥락은 파편화되고 해석할 수 없어지는 극단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의 시는 언어를 추월하는 언어다. 시는 방언이 됨으로써 획일적인 생명정치학의 세계를 탈주한다. 이때 황병승의 주제의식을 ‘퀴어(Queer)’로 설명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고정된 사회적 성(gender)을 넘어설 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sex)의 규정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파열된 욕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실현 불가능한 짐승적 욕망을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리어 생물학적 조건으로부터도 탈주한 순수욕망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황병승의 도착지는 정재학의 경우와 달리 ‘나’가 아닌 바로 ‘타자’다.

     
    새 이름을 지어주러 왔니
      코를 만지며 내가 물었다

     
    대답 대신 소년이 건네는 한 장의 사진,


    시코쿠가 기차에 오르고
      잘 가 나를 잊지 말아라
      시코쿠였던 자가 역에 남아 손을 흔든다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나를 풍차의 나라로 혹은 정지

     
    (일 년 열두 달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금세 밋밋해지던 나의 목소리여 손바닥을 칼로 푹 찌르며 외로운 신사 시코쿠 시코쿠)

     
    당신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내 자리로 간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그른 일. 사로잡히다, 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아저씨의 세계를 내어주세요
      꿈속의 소년이 돌아섰다

     
    '시코쿠' 부분

     
    성(sexuality)과 짐승적 감각을 횡단하여 황병승은 타자를 향해 간다. 이 시에서 주목할 진술은 “당신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내 자리로 간다!”고 절규하는 대목이다. ‘시코쿠’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그가 사랑하는 타자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는 이성(異性)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상반되는 두 가지 독법이 가능하다. 즉 ‘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으며, 정반대로 ‘타자’로 인해 정체성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하나의 몸짓’이 타인의 호명에 의해 꼭 ‘알맞은’ 의미로 재탄생한다면, 황병승의 ‘나’는 타인에게 사로잡힌 순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을 비정형의 존재가 된다. 이 차이는 김춘수는 인식의 층위에서, 황병승은 욕망의 층위에서 타자를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성 정체성의 횡단은 인간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운동일 때에만 가능하다. 황병승은 순간순간 정체성이 변화하는 사건에 대해 말한다. ‘시코쿠’는 기차에 오르면서 동시에 자신을 배웅하는 모순된 포즈가 가능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 정체성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소년’은 끊임없이 꿈속으로부터 그에게 말을 걸어 내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상상계적 무의식이다. 그것이 근원적 욕망으로 ‘나’를 유도함에 ‘시코쿠’라는 정체성은 변주된다. 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사회적 규준에 구속되지 않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관계 맺음 속에서 변주된다는 인식을 통해 그의 시 이미지는 비정형으로 극대화된다.

    시인들이 비정형의 이미지를 활용할 때, 이는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대화하려는 시도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황병승은 ‘나’의 욕망과 세계와의 관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정확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는 타인과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명명된 남성-여성-시코쿠와 같은 명칭들은 다만 그것에 붙여진 순간의 명칭일 뿐이다. 성이란 결국 타자와 ‘알맞게’ 대화하는 방식을 찾고자 하는 자세 바꿈이다. 타자와의 내밀한 접촉을 예비하는 황병승의 언어는 항상 에로틱하다. 한편 황병승이 과감하게 ‘나’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식하는 ‘리얼리티’가 기존의 시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에게 현실이란 확고부동한 실재가 아니라 실재와 시뮬라크르가 중첩된 세계다.

     
    끝없이 새로운 도형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세계관도 종교도 자존심도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마리오는 단지 도형만을 바라보며
      마리오는 보여지고 있다 마리오가 새롭게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도형만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리오는 너무 많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마리오 속의 미란다가 미란다 속의 마리오가 마리오 속의 쟝이 쟝 속의 치타 씨가 존재감도 없이 의문을 품는 순간,

     
    하나이면서 모든 것들이, 한순간이면서 모든 순간인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페이지 속의 마리오와 녀석들은 입을 모아,

     (맛이 어떻든?!)

     이 모든 이야기 이 모든 픽션 이 모든 판타지가 순식간에 정지하고
      너무나도 허망하게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어딘가의 행간에 처박고,

    '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 부분

    이 시는 열아홉 소녀 ‘미란다’가 쓴 소설을 내포하는 일종의 메타시다. 소설은 ‘마리오’를 비롯한 방랑하는 악한들의 활극으로 펼쳐진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운 국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소설 속 인물 ‘마리오’가 작가 ‘미란다’의 ‘이야기 가죽’을 훔치기도 하고, 소설 안팎에 존재하는 ‘치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어느 순간 ‘페이지’의 순서 또한 뒤죽박죽인 것으로 선언된 뒤에 소설은 ‘정지’한다. 이러한 일련의 서사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없다. 만화, 영화,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 이미지들이 고유한 물리법칙을 가진 전혀 다른 세계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무질서는 하나의 욕망에 통합된다. 결국 수많은 인물과 사건이 ‘미란다’ 속에 중첩되면서 그녀가 소설로 쓴 ‘욕망’의 대리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세계관도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 상징인 ‘도형’이 등장한다. ‘도형’이란 기획된 시선의 도식성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운동하는 비정형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시코쿠'의 ‘시코쿠’처럼 ‘도형’을 통해 소녀는 ‘미란다’였다 ‘마리오’가 되고, ‘쟝’이자 ‘치타’가 되면서 자유로운 변신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정체성이 한 소녀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체는 다양한 가능태를 수렴한 ‘도형’, 즉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품은 ‘알’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발견은 인간에 대한 사회적 범주화를 벗어나 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황병승이 한 소녀의 욕망을 왜 이렇게 복잡한 형태로 표현했는지 되묻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시적 전략이 시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먼저 논리를 해체하고 감각을 전면화한다. 그 다음 감각적 유물론을 통해 허구와 현실을 혼합시키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황병승은 서사적 논리를 중단시키는 자리마다 “(맛이 어떻든?!)”하고 되묻는 목소리를 삽입한다. 다른 대사들이 큰따옴표로 처리된 것과 달리 이 부분만을 괄호로 구분한다. 이때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세계를 맛보는 ‘감각’이다. 다른 시 '버찌의 계절'에서 시인은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곧 달고 맛좋은 버찌의 계절”에 대해 말한다. 즉 그는 열매를 맛보는 감각의 향유 차원에서 시를 쓰는 유물론적 글쓰기를 추구한다. 이는 원초적 동물의 수준까지 인간 욕망을 노출하는 바타유의 저급유물론과 상통한다. 황병승은 이 저급유물론의 토대로부터 도약하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것이다.

    황병승의 시세계에서 '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와 같은 메타픽션의 환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혼다의 오·세계(五·世界) 살인사건'에서도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가 재구성되는데, 실상 이러한 혼종성은 그의 시 전체에 산포되어 있다. 이러한 환상성은 그의 유물론적 시 쓰기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황병승의 시에서 현실과 허구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한 똑같이 ‘리얼리티’로 의미 부여된다. 그는 200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을 발견하고자 하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가 가상이냐 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황병승에게는 그 이미지들을 타자와 나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재분배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는 그 지점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다.

    5. 21세기 존재론

    2000년대 들어 부각되는 비정형의 상상력은 현대사회의 정형성과 그에 깃든 획일적인 사유를 넘어서 새로운 생성과 발견을 이루려 하는 징후라 할 수 있다. 함기석은 기호로부터, 정재학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황병승은 성도덕으로부터 억압된 인간의 본질을 고민함과 동시에 이러한 억압을 벗어난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놓고자 한다. 함기석은 교실, 사전과 같은 훈육 장치와 도구를 인간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을 방해하는 기획 사회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유희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말바꿈을 통해 획일화된 의미 규정을 무효화한다. 그는 인간의 실현되지 않은 욕망의 가능태로서 비정형성을 주목하면서 인간을 억압하는 기획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정재학은 타인의 시선으로 발견될 수 없는 정체성의 여분, 즉 게니우스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현대 도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한계로 공허와 불안을 포착하며, 현대도시와 인간의 실존적 형상을 비정형의 이미지로 재현한다. 이로써 비정형은 인간의 실존적 토대로 환기된다. 황병승은 도덕적 규율 혹은 성 정체성으로 구속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추적한다. 그는 인간의 짐승적이고 배설적인 측면을 전면화하고, 시시각각 인간의 정체성을 파열시키고 재생하는 비정형적 운동을 통해 무한히 가변적인 내적 욕망을 그려낸다. 아울러 그는 ‘나’의 욕망 실현이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 모두는 ‘정형’의 억압으로 배제된, 더 나아가 추악한 것으로 선언된 인간 욕망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들은 직접 만지고 보는 세계로부터 시 쓰기를 시작하며 치열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성을 다룬다. 그 시도는 공적인 언어로부터 멀어지면서 간혹 ‘난해한’ 것이 된다. 그 난해성은 타자를 보는 내밀한 시선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호의 도식성과 존재를 왜곡시키는 시선, 그리고 세계의 치부에 관해서 쓴다. 또한 시뮬라크르와 몽상·현실이 뒤섞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인간이 욕망하고 실존하는지를 추적한다. 이로써 이따금 해석 불가능성에 직면케 하는 그들의 비정형적 언술의 세계는 가장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 소통불가능성이 번역될 수 없는 개별자의 욕망을 현시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침묵한 채 타자와 함께 놓여 있는 장소를 얻는다.


    시의 질료인 ‘말’은 정형과 비정형에 모두 걸쳐 있다. 세계의 정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현재의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언어는 세계를 자유롭게 사유하는 동시에 상징체계의 구속으로 되돌아와 그 자유의 내용물을 타인에게 전한다. 자아와 타자, 세계의 근원적 형상은 정형도 아니고, 비정형도 아니며 그 둘 사이의 왕복운동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근대문학의 탄생을 공식 언어와 카니발 언어의 대화 속에서 찾는다. 그것은 질서화된 공식 언어의 가치 체계와 그로부터 해방된 말놀이의 향연이 결합함을 뜻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부재했다면 중세를 초극하는 근대문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시는 현대 도시의 정형성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탄생한다.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의 형상을 해체할 뿐 아니라, 추악한 형태로 만든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금기를 위반한다. 이러한 금기 위반은 합목적적 질서 속에 파산한 자아의식과 전형화되어버린 타자성을 온전하게 재생하려는 모색인 것이다.

    개인들이 상호 공존하는 ‘함께-놓여 있음’이란 유대감의 확대이자 타자로부터 느끼는 불쾌함을 수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타자란 낯선 것이고, 자아란 위태로운 것이다. 비정형의 상상력은 자아와 타자, 세계가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불쾌한 심연이라는 사실을 함께 비춘다. 비정형을 사유한 시인들은 그 낯섦과 불안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2000년대의 시는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는 토대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토대이다. 이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양지하다'와 '양해하다'

    질문 : 공문을 접하다 보면 비슷한 내용들이 있어서 좀 헷갈릴 때가 있는데요, 특히 '양해'와 '양지'가 그중 하나입니다. '양해바랍니다.',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양해 양지 바랍니다.' 등 제 생각에는 '양해'는 '이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양지'는 단순히 통보하는 형식인지요?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라는 뜻인가요? 정확한 차이점은 무엇이며 '양해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처럼 같이 쓰는 이유는 뭔지요?


    답변 : ‘양지(諒知)하다’는 ‘살피어 알다.’라는 뜻이고, ‘양해(諒解)하다’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양지하다’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알고 있으라는 뜻을 전달하는 경우에 쓰고, ‘양해하다’는 상대방에게 어떤 사정을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게 이해해 달라는 뜻을 전달하는 경우에 씁니다. 따라서 표현 의도에 맞게 ‘양지하다’ 또는 ‘양해하다’를 쓰시면 됩니다. < 보기> 날씨 관계로 경기가 취소되었으니 이 점 널리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바빠서 그러니 좀 늦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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