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15개語 해독하는 鬼才… "일하다 지치면 사전 읽습니다"


입력 : 2016.10.19 03:00

['콩글리시 찬가' 펴낸 번역가 신견식]

스웨덴·라틴·히브리·터키어… 30년 된 웹스터 등 사전만 100권
다른 번역가들 SOS에 적극 도와 '번역계의 귀인'이라 불리기도

대전=어수웅 기자
대전=어수웅 기자
대전행 KTX에서 떠나지 않던 궁금증이 있었다. 어떤 기질이 사람을 이토록 언어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네덜란드어·스웨덴어·이탈리아어·러시아어 등 10개 언어를 사전 없이 읽는다는 번역가 신견식(43)씨. 라틴어·핀란드어·터키어 등 사전 참고해 독해 가능한 수준까지 확장하면, 15개 언어를 해독하는 '언어의 귀재'다. 그의 별명 또 하나는 '번역계의 귀인'. 아랍어 등 낯선 언어의 '외래어 표기'에 자신 없는 번역가들이 그의 페이스북으로 'SOS'를 보내면, 명쾌한 설명과 함께 올바른 표기를 알려준다고 했다. 돈 한 푼 생기는 일이 아닌데도. 하긴 이해관계를 따지고 움직인다면 그건 이미 본능이 아닐 테니.




대전시 용운동에 그의 '번역 아지트'가 있었다. 초등생 시절부터 살았다는 30년 훌쩍 넘은 주공아파트. 주공아파트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영영(英英)사전부터 서아프리카 섬나라 카보베르데의 최신 사전까지 종이사전 100여 권이 도열해 있다.




'○○w ○○○ld Dict○onary.' 마치 십자말풀이 게임처럼 단어 철자들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낡은 표지. 1988년판 웹스터 영영사전 'New World Dictionary'다. 앞뒤 표지 모두 사라진 옥스퍼드 스페인어-영어사전은 아예 누더기다. 1850쪽 분량의 이 '벽돌'은 손때 묻다 못해 네 귀퉁이가 다 말려 올라간 상태. 사전 주인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저는 주술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사전을 씹어 먹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국어가 좋았다고 했다. '초등생 신견식'은 여러 나라말로 된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에 반색하며 영어와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어휘와 어순 차이에 탐닉했고,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영어 잡지 '타임' 읽을 때 '고교생 신견식'은 독일어 잡지 '슈피겔'을 더듬거리며 읽었다. 두꺼운 사전 대여섯 권을 늘 들고 다녀야 했던 외대 스페인어과와 서울대 언어학과 대학원 시절에는, '팔운동'도 할 겸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는 청년이었다.




번역가 신견식씨의 집은 동시에 사전의 성채.
번역가 신견식씨의 집은 동시에 사전의 성채. 노르웨이어·히브리어·카탈루냐어·핀란드어 등 100여 권의 사전이 그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인구 10만명의 서아프리카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어-독일어 사전. 아쉽게도 아직 그 나라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대전=신현종 기자



어떤 기질이 당신을 '언어 귀재'로 성장시켰느냐는 질문에, 그는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언어를 공부하며 가장 즐거웠던,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에 대한 대답에 힌트가 있다.



영어 black(검정)과 프랑스어 blanc(하양)이 한 뿌리임을 알게 됐을 때의 감동. 하양과 검정이 한 뿌리라니. 독일어 blank(빛나는·반짝이는)에 원뜻이 남아 있듯, 프랑스어 blanc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빛나다·불타다'의 의미라는 것. 하얗게 불타는 존재와 다 타서 검게 그을린 존재가 나란히 있는 세계. "그때의 감동을 잊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어학과 번역도 최고 수준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해진 산꼭대기가 아니라, 드넓은 바다나 우주를 항해하는 마음으로 쭉 갑니다. 그러고 보니 아랍어 카무스(사전)는 그리스어 오케아노스(대양)에서 왔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태도와 진정한 즐거움도 여기 있지 않을까. 셈 계산에는 뒤처질지라도, 인간과 신화의 시원(始原)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 그는 "언어는 인간 정신과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면서 "언어의 뿌리를 캐다 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최근 그는 생애 첫 저서인 '콩글리시 찬가'(뿌리와 이파리)를 펴냈다. 본지 Books에서도 소개했지만, 요약하자면 100퍼센트 한국어는 없으니 영어 강박에서 벗어나 외래어의 역사와 현재의 쓰임을 두루 살피자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첫 책 원고를 탈고한 뒤, 신씨는 며칠 좀 쉬겠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르네상스인 인터뷰 시리즈에 등장했던 동료 번역가 노승영씨(본지 3월 16일 자 A23면)도 외래어 표기와 관련해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 댓글로 물었다. "설마 사전이나 언어학 논문 읽으면서 쉬시는 건 아니죠?"



'번역계의 귀인'의 대답은 "그것만 하는 건 아닙니다"였고, 그 아랫줄에는 "저희 집에 감시 카메라 다신 줄…"이라는 댓글이 따라붙었다. 영상 번역을 하는 아내 정경진씨의 재치이자 확인이었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며, 잘하면 주변에서 찾게 된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여기에 있다.



다음은 일문 일답

ㅡ어떻게 하면 '외국어 사전 읽기'가 취미가 될 수 있나요.


낱말 안에는 사회와 역사가 담겨 있죠. 물론 겉의 더께를 들춰야 비로소 속이 드러납니다. 많은 언어의 낱말들을 엮으면서 역사책과 소설책을 읽듯 저만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재밌습니다. 고등학교 땐 반 친구들에게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영한사전들을 빌려 읽으면서 사전마다 다른 특징을 즐겼죠. 지금도 대형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사전들을 꼭 살펴보곤 합니다. 주술적이지는 않아서 사전을 씹어 먹진 않습니다.


15개 국어를 하신다고 들었다. 내가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던 첫 번째 순간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꾸준한 관심과 흥미 때문이라고 봐요.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사주신 영어회화 교재에 나온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인사말에서 상상 이상의 재미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6학년 때 아버지가 가져오신 유럽 각국 화폐 포스터의 여러 언어와 옆집 아저씨가 주신 영한사전과 독한사전의 어원 설명을 보면서 더욱 흥미를 느꼈죠. 그 독한사전은 지금도 있습니다.



여럿 중에 하필 언어를 욕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습득에 들인 구체적 노력이 궁금하다.



언어는 인간 정신과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천착하게 됐습니다. 언어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함께 살피는 재미도 있고요. 그 뿌리를 캐다 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데도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교 시절 독일어를 배우면서 다 이해도 못할 슈피겔지를 사 읽던 것도 돌이켜 보면 큰 도움이 되었고요. 제대 후 학교 인터넷으로 유럽연합 사이트에 들어가 여러 언어로 된 문서를 출력해 사전을 뒤적이며 공부했죠. 두꺼운 사전 대여섯 권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느라 무거웠지만 팔 운동이라 여겼어요. 어학은 결국 관심과 노력입니다. 얼마나 관심을 갖고 시간과 애정을 들이느냐에 따라 정직한 결과가 나와요. 궁금한 단어가 있을 때 문맥에서 추측한 뒤에 사전을 찾아 읽고 부지런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죠.




각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으신지. 핀란드어 라틴어와 영어 서반아어 수준이 다를 텐데.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크게 막히는 것 없이 대화가 가능합니다. 다른 언어는 간단한 주제로 의견을 말할 만한 수준이고요.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등 게르만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 러시아어, 일본어는 사전 없이 읽고 라틴어, 그리스어, 핀란드어, 터키어, 중국어 등은 사전이 필요합니다. 현재까지 출판 번역은 스웨덴어, 영어, 프랑스어를 했고 실무 번역은 거의 모든 유럽 언어를 다룹니다.



외국 문화와 언어를 공부하지만 어쩌다 보니 밖에 나간 것은 삼십대 후반 유럽 신혼여행이 처음이었어요. 독일과 스페인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베로나에서 이탈리아어로 길을 물었다가 반쯤만 알아듣고 엉뚱한 길에서 한참을 헤매기도 했죠. 영어권은 안 갔으나 영어가 통하는 데선 아내가 영어를 맡고 저는 딴 유럽 언어들을 맡았는데 외국어로 처음 겪은 두 달의 좌충우돌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전 읽기와 수집이 취미였다는데, 어느 정도신지. 구체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언어 사전은 거의 다 있습니다. 스페인어-영어, 체코어-독일어처럼 여러 방향도 포괄하고 동의어, 속어 사전도 있다 보니 종이책으로도 백 권이 넘습니다. 다소 특이한 언어로는 프랑스 알자스의 독일어 방언, 이디시어(유대인이 쓰는 독일어 변종), 서아프리카 카부베르드 크레올어,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크레올어 사전도 있고요. 엘제비어(Elsevier) 출판사에서 나온 자동차, 범죄학, 출판, 재무 등 다언어 전문용어사전도 여럿 모았습니다. 하도 들춰보다 보니 상당수 사전이 누더기가 돼서 걱정입니다.


다른 번역가들의 질문을 꼼꼼히 대답해주고 있다 들었다. 가장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책에 나오는 폴란드 지명이 독일어식으로 대강 표기한 것이라 아리송했는데 여러 정황을 살펴 비슷한 지명들 사이에서 제대로 짚어줬고, 영어 중역의 노르웨이어 책 관련 질문 때문에 노르웨이어 원서 및 스웨덴어와 독일어 역서까지 확인해서 답해준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공부를 계속해서 학교에 남을 수도 있고, 희귀 언어 재능을 살려 지역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문 번역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물론 노승영 선생은 '번역계의 귀인'이라며 고마워했다.



그쪽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혼자 하는 공부가 좋아 번역가라는 직업도 성격에 맞는 편입니다. 물론 독학자의 한계도 있으니 전공과 관심분야의 책과 논문은 꾸준히 읽습니다.


이 공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과 가장 즐거웠던 순간,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말씀해 주신다면.(물론 앞의 둘은 같은 순간일 수도 있고 다를 수고 있겠지만)



6백쪽 가량의 장편소설을 2년에 걸쳐 옮겼는데 그간 독일어나 영어에서 중역되던 스웨덴어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원어에서 번역해 뿌듯했죠. 한 낱말의 역사를 봐도 여러 언어의 교차가 보이고 무관할 것 같은 말들이 알고 보면 관계가 있어요. 영어 black(검정)과 프랑스어 blanc(하양)이 한 뿌리임을 알고 느낀 감동은 잊기 힘든데 독일어 blank(빛나는, 반짝이는)에 원뜻이 남아 있듯 프랑스어 blanc은 게르만어에서 유래했죠.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빛나다/불타다'의 뜻이라 하얗게 불타는 것과 다 타서 검게 그을린 게 함께 있습니다. 딴 공부나 일도 그렇지만 어학과 번역도 최고 수준이 산꼭대기처럼 정해진 게 아니잖아요. 가끔 힘들긴 해도 드넓은 바다나 우주를 항해하는 마음으로 쭉 갑니다. 아랍어 카무스(사전)가 그리스어 오케아노스(대양)에서 왔으니 통하는 구석이 있죠.





콩글리시 찬가가 선생의 첫 책으로 안다. 이 주제를 첫 번째 책의 주제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



콩글리시를 비롯한 외래어를 엉터리 영어 또는 한국어를 더럽히는 국적 없는 말로 좁게 보지 말고 넓게 보자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차용어의 변용은 모든 언어에서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콩글리시를 비롯한 외래어가 한국 근현대 문화 발전의 산물이라는 적극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했죠. 몇 해 전 망간, 메탄, 비닐, 비타민, 칼륨이 망가니즈, 메테인, 바이닐, 바이타민, 포타슘 등 영어식으로 바뀌었는데 영어만 바라봐서도 안 되고요. 한국 화학용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기반의 독일어 차용어가 많기에 오히려 수많은 언어와 더 비슷합니다. 외래어와 외국어는 다른 거죠. 영어의 영향이 커지는 상황도 인정해야겠지만 영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도 필요합니다.




국립국어원이 최근 우리말샘을 오픈했다. 주지하다시피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이다. 혹시 지지나 비판이 있으신지.



네이버 개방형 사전의 허점에서 드러나듯이 언어를 깊이 공부한 여러 사람이 함께 관리해 줘야 사전의 구실을 제대로 할 겁니다.



인터넷 세대의 언어는 점점 외계어가 되고 있다는 비판과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적극적·탄력적 적응이라는 지지가 있다. 물론 균형감각이 중요하겠지만, '콩글리시 찬가'의 저자로서 당신의 의견은.



언어는 늘 변하고 또 방언, 속어, 은어 등 여러 양상이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 없애기보다는 적절히 잘 살려서 각 영역에 맞게 제대로 쓴다면 말글살이가 풍요해지겠죠.



15개 국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점과 (혹시 있다면 )불편한 점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창이 많아서 좋습니다. 겨울에 그 창문으로 찬바람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좋아요. 딱히 불편한 점은 없지만 많은 사전을 언제나 찾아야 하니 번거로울 수는 있겠죠?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영상번역을 하는 아내도 언어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일하면서 서로 도움도 주고받고 공통 관심사로 얘기도 함께 나눌 수 있어 즐겁습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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