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는 선택

 

 

 

제 1편 절실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안녕하세여 제 36회 수습변리사 장유진입니다. 제게 합격수기를 쓰게되는 영광을 갖게 해주신 부모님 및 언니, 오빠 형부들 및 그외의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전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우선 글의 형식은 일기형식으로서 존칭어를 생략함에 양해해 주시고, 이수기는 솔직한 저의 감정 및 공부방법등을 진솔하게 기술하겠습니다. 수험생 여러분께 많은 도움이 될수 있으리라 봅니다.

 

 

내가 변리사를 알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변리사에 대한 막연한 지식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되어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는 변리사의 수험길을 선택하였다.

 

 

제 33회 변리사 1차 합격, 2차는 하루만 보고 나왔다. 점수는 기억이 안난다. 혼자 공부를 하려니 어떤식으로 공부를 해야할지, 답안작성은 어찌하는 것인지 조차 모르고 무작정 시중에 있는 여러책을 사서 읽기만 했다. 우둔한 방법이다.

 

 

 

그러다가 학원에 스터디 모집을 위한 스티커를 붙이고 그로인해 여러 멤버가 스터디를 결성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자신이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잘하고 있는줄 알았다. 그러나 첫 번째 스터디를 하는날 나는 무너졌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해

 

 

모의고사 스터디였는데 나는 아무준비도 없이 그냥 갔다. 평소와 같이 책을 좀 읽고서, 그러나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처음보았다. 답안지 쓰는 형식을 서론, 본론, 결론, 너무나 정형화되어이쓴 답안지와 거의 완벽해 보이는 충실한 답안, 나는 내 답안지가 너무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았는 그대로 인정하고 스터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갈길이 너무 멀었다. 스터디를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지쳤갔고 나의 한계를 깊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배변리사의 자문을 받아 선택과목 두 과목을 미련없이 바꾸었다. 이유는 내가 화공과라서 무기 및 유기화학을 선택했으나 공부량이 너무많고 합격하기에 적합치 않다는 결론 때문이다.

 

 

 

선택과목을 바꾸어 공부하니 기본3법도 제대로 못하면서 선택과목에 매달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도 나느 붙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내방에서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집앞의 전문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금요일엔 스터디를 하러 신림동으로 향했다. 힘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드디어 시험일, 이틀동안 열심히 시험을 보았고, 셋째 언니와 형부가 집을 사기위해 든 적금을 해지, 마련해 주신 소중한 돈을 가지고 모든 것을 잊고 유럽으로 떠났다. 45일간의 여행후 한국에 돌아와 발표를 들었다.

떨어졌다. 스터디 멤버중 한 사람만이 이 터널에서 빠져나갔다. 난 좌절했다.

 

 

 

다시 1차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난 1차가 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에겐 차선의 길이 없으므로 다시 일어섰다. 곧 공부를 시작했다.

 

 

 

내방에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2차스터디를 우선적으로 했다. 1차 공부는 시험전 45일 작전을 세워서 그 기간에는 1차만 했다. 기간이 짧으므로 난 하루하루를 1초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입주위가 터져서 밥도 제대로 먹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난 붙어야 했기에 열심히 공부했다.

 

 

 

1차시험을 보고 결과에 대한 미련없이 2차공부를 바로 시작했다. 전 과목 서브를 만들었다. 한달동안, 그러고 나니 발표가 났다. 1차에 합격, 만족스러운 점수였다. 곧 2차공부에 몰입했고, 동차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스터디를 하러 신림동으로 갈수는 없었다.

 

 

 

학교가 2분거리도 안되지만, 그 시간이 아까워서 내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버지가 내 좁은 방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셨다.

 

 

 

집앞에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나와 떠들면서 나는 귀를 막고 공부했다. 부모님은 둘째 언니집에 계시고, 내 수험생활을 뒷바라지 해줄 사람은 마땅치 않아, 더욱 어렵게 공부를 해야했다. 그리고 2차시험을 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잘 보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시험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우리나라 남쪽지방을 여행했다. 부모님의 연세가 느껴졌다.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여행이었다.

 

 

 

발표무렵, 나는 부모님과 함께 둘째 언니집에 있었고, 11월 16일 나의 조카 성은이가 태어났다. 발표일 앞으로 3일, 아이와 언니의 곁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수 있었다.

 

 

 

발표일 , 점심식사후 샤워를 하고 내방에 들어가 떨이는 마음으로 학원에 전화를 했다. 낯익은 목소리가 나의 탈락소식을 들려주었다. 믿을수 없었다.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목을 놓고 울었다. 부모님과 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좌절하는 모습을 내눈으로 볼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발표결과를 묻는 부모님의 목소리

 

 

 

나는 거짓말을 했다. 발표가 늦어진다고, 내일 발표가 난다고, 그리고 가족과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부은눈을 가라앉히고 식사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부모와 언니, 목구멍까지 서러움이 차 올랐지만, 아무일이 없는 듯, 웃으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이제 내 방에 앉아 난 생각했다.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새벽이 오

 

고 있었다. 빨리 모든 것을 수습해야할 시간이었다.

 

 

결론은 난 죽어도 변리사다

 

될 때까지 한다. 입술을 깨물고 편지를 썼다.

 

부모님 떨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그리고 새벽 3시 37분 나는 짐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가족들이 깰까봐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10층을 한발한발 힘겹게 내려왔다. 초겨울 새벽은 너무 추웠다. 마땅한 겨울옷도 가져가지 않았기에 얇은 가을옷을 입고, 부은눈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나왓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돈도 없었고, 길눈이 어두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 편지를 보면 곧 따라 올것이므로 하여튼 빨리 이동을 해야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택시를 잡았다. 터미널까지 5000원이라는데 서울로 가는 버스비를 빼면 2600원이 남았다. 그래서 운전사 아저씨께 2600원 거리만큼 태워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수능을 보러가냐면서 새벽에 위험하게 혼자 택시 잡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냥 터미널까지 태워주시며, 추운 테서 떨지 말고, 100미터 아래 편의점에서 사발면 사먹으면서 터미널이 열릴때까지 있으라면서 1000원을 주셨다 감사함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것두 잠시,

 

 

형부나 언니가 일찍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 드디어 서울행 첫 버스를 타고, 나는 그렇게 서울로 왔다. 춥고 배가 고팠으나 돈이 없었고, 갈곳도 없었다. 그래서 지하철에 앉아있었다.

 

 

며칠을 고생하고 나는 이제 성남 집으로 왔다. 방황의 시간을 접어야 할 시간이 촉박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편이어서 그간에 고시원에 가겠다는 말을 못했으나 이번에는 너무나 절실했기에 가족들에게 부탁을 드렸다.

 

 

 

언니들과 형부, 오빠가 IMF로 힘이 들었지만 돈을 모아 부쳐주셨고, 나는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1년 계획을 세우고, 하루계획을 세우는데 1주일이 지났다. 모든 정리가 끝난후 나는 공부에 몰입했다.

너무나 행복했다. 밖에서 떠드는 아이들도 없었고, 고시원의 규칙적인 생활은 내가 공부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할수 있었다.

 

 

 

 

스터디를 결성하여 1주일에 한번씩 모의고사를 보았다. 나는 새로운 서브를 만들기 시작했기에 스터디에 충실하지는 못했으나 서브가 끝나면 그때는 금방 진도를 따라갈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루에 14시간씩 서브를 작성했다. 손목의 인대가 늘어났다.

 

 

그래도 계속했다. 결국 서브는 끝났고, 4개월을 남겨두고 나는 암기에 들어갔다. 7권의 서브만을 들고다니며..

 

 

7월이 되니 무척 더웠다. 그래서 독서실을 다녔다.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으므로 남들보다 열심히 해야했다.

 

 

대전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많은 비가 왔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난 계속 공부를 했다. 그리고 3일간의 시험, 시험이 끝났고,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8월 28일, 나는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인도를 갈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콕에 가서 한 여행객을 만나 터키의 아름다움에 대해 듣고 터키로갔다. 그 당시 이즈미르쪽의 지진으로 터키 여행을 말리는분도 있었으나 그냥 떠났다.

 

 

 

처음엔 지중해 에게해 주변을 돌다가 이스탄불에서 만난 여행객의 이야기를 듣고 터키 동부를 돌았다 아름다웠다. 흑해쪽이 좋았고, 노을이 지는 RIZE의 바다는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다.

 

 

 

계속 큰 트럭을 히치하면서 다녔는데 인심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거의 숙식에 대한 비용은들지 않았다. 터키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깨끗하고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동부를 35여일 여행을 하고, 아쉬움을 남기며 시리아로 넘어왔다.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아랍어를 처음 접하게 되고 표지판도 영어가 아닌 이상한 그림같은 아랍어에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터키에서 시리아로 걸어서 국경을 넘었기에 지도도 없었고 시리아에 관한 책자도 없고 아무 정보없이 맨몸으로 낯선땅에 던져졌다.그래도 사람은 살아지기 마련이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리아를 여행했다. 시리아 사람들은 다혈질이다. 시리아는 물가가 저렴하여 여행하기엔 적소이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10여일 정도만 머물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요르단으로 넘어왔다. 쉬어가고 싶어서 요르단에서는 AMMAN과 PETRA에서만 10여일을 머물렀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많이 배우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그동안의 내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이집트로 넘어왔다. 홍해의 아름다움과 좋은 수단친구들을 만나서 계획에 없던 시나이 반도에서 15일나 머물렀다. 정든 사람들과의 아쉬운 이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 카이로로 왔다.

발표는 19일이라서 20일쯤 돌아가려 했는데, 이집트의 매력에 비자를 연장하여 12월 중순에 들어가기로 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여행중에 오른쪽 다리를 다쳐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리를 절며 다녔다. 잘곳이 마땅치 않아 노숙도 여러번, 그러다가 시험결과 날짜는 다가오고 나는 여행의 절정기에 접어들었다.

사막으로 갔다. 파라프라에서 바하리아 사이의 백사막, 흑사막, 크리스탈 사막, 투어를 하지 않고 걸어서 사막을 횡단했다.

 

 

 

다친다리의 통증, 한낮의 무더위, 바람소리 이외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져간 물이 없어서 너무 갈증이 심했다. 어쩌다 차가 지나가면 물을 얻어 마시고,

 

 

 

사막중간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며칠을 같이 생활했는데,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피리와 북을 치며,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슴으로 알수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그 따뜻함을

 

 

 

그런데 이집트의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보호해준것임을 후에 알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우신 분들이다.

 

 

 

100미터쯤 되는 모래 언덕을 기어오르다가 손목의 인대를 다시 다쳤다. 오른쪽손은 이제 움직일수가 없었다. 맨발로 사막을 걷다가 왼쪽 새끼 발가락을 심하게 다쳤다. 그래서 나는 잘 걷지도 못했고, 왼손만으로

모든 것을 해야했다.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글을 쓰고 있었을까?

 

 

 

드디어 사막에서 11월 19일이 왓다. 발표에 대해서는 이미 초연해 진 후이다. 확인을 해볼수도 없었지만,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에 간다면, 그것으로 나는 내 삶을 재 정비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떨어진다면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한국을 떠나려고 했다. 내게는 인연이 없는곳이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에 가서 키부츠 생활을 하다가 블랙잡을 하든지 하여 돈을 벌어서 여행을 계속하려 했다. 만약 붙는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최고의 변리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던중 다시 지중해 쪽을 돌기위해 카이로에 왔다. 그날 새벽 나는 복통으로 쓰러졌고,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에 실려갔다. 문제는 신장, 물을 마시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다. 하루의 병원치료로 남은 여행비용을 다 쓰고, 병원에서도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 정밀검사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모든 여정을 포기하고 비행기 날짜를 당겨서 한국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경로는 카이로에서 터키로, 터키에서 홍콩, 홍콩에서 방콕, 그리고 서울이었다.

내가 합격소식을 알게 된 것은 터키에 도락해서다. 그때가 11월 27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11월 30일 서울에 왔다. 그리고 지금은 수습변리사로 이렇게 글을 쓴다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난다. 내가 붙었다는 사실이. 같이 동고동락했던 스터디 멤버들, 강화도에서의 즐거운 추억과 힘겨웠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에 두려움도 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절실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제 2편 공부방법

 

 

들어가며

 

 

 

공부를 어느정도 해보신 수험생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1차가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1차를 소홀히 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2차시험을 볼수 있는 기회조차 없으니, 1차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가장 효율적인 1차 합격방법

 

 

 

단기간에 1차에 붙기 위해서는 물론 기본서를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시험의 형태를 알아야 한다. 변리사 시험 문제 분석이 중요하다, 기출문제를 보고 어떻게 공부를 할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1.처음에는 수험생들이 많이 보는 기본서를 사서 1회독 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어느정도 파악이 되면 학원강의를 듣는것도 바람직 하다

 

 

3.그리고 기출문제 위주로 역으로 공부를 한다. 나의 경우 시중에 돌아 다니는 문제지는 거의다 풀어보았다. 결과적으로 문제지의 문제는 대동소이함을 알았다. 그러나 기본서를 다회독하는 방법보다는 여러문제지를 다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유는 어차피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므로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수 있는 기술적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다 한들 시험에 적용할수 없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4. 나의 경우 5년전부터의 기출문제 및 학원모의고사 문제를 모두 모아서 45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10시부터 12시 40분까지 내방에서 혼자 시험을 보았다.

 

 

 

5.시험문제중 틀린 것은 A4 용지 한페이지에 써서 완벽하게암기를 해서, 다음에는그와 같은 문제가 나올 때 절대 틀리지 않도록 했다.

 

 

 

6. 시험을 보고 모르는부분을 기본서 등을 찾아서 완전히 이해를 하고 넘어갔다.

 

 

 

7.가장 중요한 것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식을 준비하는 경우 짧은 시간동안 문제를 풀수 있는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단기간에 1차를 준비하여 합격할수 있는 방법이라고 자신한다.

 

 

 

8.기본적으로 특허법에서 90점이상, 민법은 8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자연과학개론 및 영어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 효울적인 2차 합격방법

 

~ 나의 경우

 

 

1. 서브를 만들었다. 물론 서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서브를 시작하지 않는편이 낫다.

 

 

 

2.서브를 만들기 위해 시중에 나와았는 책들을 거의 모아서 비교하면서 나에게 맞게 장유진만의 서브를 만들었다.

 

 

3. 그다음은 암기다. 변리사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력있는 답안이 아닌 정형화된 답안이다.채점자가 보기에 자신이 배점한 부분의 내용이 있으면 점수를 준다. 참신한 답안이 정형화되어 있는 답안에 패소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4.암기는 쉽지 않다. 우선 목차가 암기되어야 한다. 주어진 200분동안 어떠한 문제를 놓고 10장이라는 다안을 채우기 위해서는 목차가 선행되어야한다. 자신이 과거에 풀어본 문제라도 목차를 적지않고 적는 경우 대 목차를 빠뜨리게 되어 큰 점수를 놓친다.

 

 

5. 암기는 두문자가 좋다.

 

 

6. 의의 및 취지 역시 외워두는 것이 좋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외운다.

 

 

7.2차는 스터디가 필수다. 특히 케이스 문제의 경우 자기만의 독단에 빠져 논점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여러사람의 의견이 중요하다

 

 

8.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써보아야 흐름을 잃지 않는다

 

 

 

 

-그외의 방법

1.서브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2.시간이 별로 없다면, 시중에 판매중인 서브노트를 사서 자신이 첨삭을 하는것도 바람직하다

3.최후에는 자신의 서브또는 단권화된 책을 보게 되므로, 충실히 내용을 기재하는 것이 좋다.

 

 

 

 

-나의 하루계획 및 공부방법

 

 

 

하루계획

 

 

1.새벽 5시 기상, 전날밤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

 

2.7시 아침식사

 

3.7시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공부

 

4.11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점심식사

 

5.12시부터 5시 30분까지 공부

 

6.5시30분부터 6시까지 식사

 

7.6시부터 1시까지 공부

 

 

 

 

 

 

 

공부방법

 

1.서브작성

 

 

2.선택과목은 날마다 공부한다.

 

 

3.식사시간 및 깨어 있는 시간중에는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

 

 

4. 가능한 하루에 전과목을 공부하려고 노력

 

 

5.법전을 가까이 할 것

 

 

6.1차는 많은 문제를 물고, 2차는 답안지 작성을 많이 해본다.

 

 

 

 

제 3편 글을 마치며

 

 

수험생에게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가족도 없다. 오로지 공부만 있을뿐이다.

 

 

험기간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말라

 

 

모든 것을 잊고 공부만 해야 한다.

 

 

어느순간 내 자신이 비참해 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때가 있다.

 

 

그러면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참아야 한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소원해진다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라,

 

 

내가 시험에 합격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생활을 단순화 해라.

 

 

오로지 공부만 생각하고, 시험이 끝난후 다른 것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체력단력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규칙적인 운동과 생활습관을 가져야 한다.

 

 

수험생은 공부하는 기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개가 진주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다.

 

 

포기할것이라면 시작하지도 말라.

 

 

그러나 시작하기 전에 미리 충분히 앞으로의 힘든 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반드시

 

 

 

사람들은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결코 인간에게는 불가능은 없다. 머리도 좋지 않고 학부때 공부도 못한 나도 변리사가 되었다. 이글이 수험생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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