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수기

 

…꼭 한걸음씩!!!

 

송 연 경

(제10회 시험합격)

 

 

 

 

 

 

1. 올해 봄쯤 이었다.

 

 

 

어느 시사프로에서 신림동 고시촌을 찾아가 고시생들만의 생리를 이모저모로 비춰준 적이 있다. 일년 사시사철 츄리닝과 슬리퍼가 이용되는 곳. 봄이 와도 맘이 추운 사람들이 있는 곳... 이렇게 설명하던 나래이터의 목소리와 인터뷰에 임했던 10년차쯤의 한 노익장의 말이 아직 선연하다. 그는 쓸쓸하고도 담담한 말투로 그간의 수험기간을 오욕과 회한의 세월이라고 표현했다.

 

 

 

내 삶이 그러했노라고는 말하진 못한다. 그러나 공부에서 손 놓은지 1년이 다되가는 지금에도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올 만큼은 나도 수험생활이 어떤건지 안다. 가난한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컵라면과 분식점에서 파는 라면 중에서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은 컵라면을 먹고말던 기억. 겨울에 추운 독서실을 견디고자 내복에 두터운 츄리닝을 입고 낡은 파카까지 껴입고 자판기 커피한잔에 맘을 달랬던 기억들. 직장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저 할말이 없어 묵묵하게 있다가 더 허전한 맘으로 돌아왔던 기억들... 아직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회상되지 못하는 그 시간들을 되짚어볼 때가 온 것 같다. 아무쪼록 이 어설픈 합격수기가 지금 불안한 미래와 팍팍한 삶에 지쳐가는 얼굴을 알지못하는 많은 “나”에게 작은 힘이나마 되었으면 한다.

 

 

 

 

 

 

 

2. 1년차 -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나는 성심여자 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4년. 친구따라 멋모르고 들어간 동아리와 학생회 활동은 내 4년간의 생활 전부를 차지하는 중심이 되었고 말 그대로 코피쏟으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공부만큼은 나 몰라라 했던 배제했던 탓에 평점 3점이 안되는 성적표를 가진 백수의 신분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생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할 줄 아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그간의 학창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도 풀며 천천히 해야할 일과 하고싶은 일의 성격을 모두 충족하는 직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빈둥거리며 한 3-4개월 지내고 있었는데 이런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아버지께서 감정평가사 시험을 말씀하시며 그 방법론으로 건대 부동산학과 편입을 해보라고 하셨다. 여전히 뭔가 하고 싶은일이 생긴건 아니었지만 그간 단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소모성에 지쳐 장차 뭘 하던 전문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에 그저 전문직이라는 말만 듣고 뭘 하는 직업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다만 다시 대학교를 다니는 일은 시간과 비용이 불필요하게 많이 소모될 것 같아서 단념하고 대신 그 해 11월에 있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나의 수험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3. 1년차 시작 - 미미한 시작

 

 

 

예상외로 무지막지하게 어려웠던 중개사시험을 어찌어찌합격하고나서 95년 12월 30일쯤 N학원에 등록하고 1월부터 1차 강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리 숫자감각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경제는 그렇다치고 회계는 거의 강의내용이 감이 안 잡힐정도로 막막한 과목이었다. 한두번 들어보고나서 “이거 강의 1회독으로는 안되겠구나”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깨닫고 나서는 회계와 경제를 아침저녁으로 이론강의를 들었으며 3~4월달에는 회계, 경제를 문제반과 이론반으로 겹쳐 들으며 중개사공부 덕분에 어느정도 자신이 있던 민법과 부관법은 문제반만 가볍게 들었다.

 

 

 

 

강의를 듣는 시간이 너무 많아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그래도 4월말경에는 「김대식외 2인공저」를 4~5회독 정도 하고 각 과목의 학원교제를 3~4회독 정도해낼 만큼은 공부가 되어 있었고 5월초쯤에 본 처음 본 모의고사는 평균 60점으로 4등에 오르는 의외의 결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하도 하면 되는구나 싶은 맘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남은 기간동안 ‘남들보다’는 아니라도 ‘남들만큼’은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5월의 최종점검 강의를 앞자리에서 듣기 위해 아침 7시 40분 경이면 학원에 도착했고(우리집에서 노량진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심야강의건 새벽특강이건 국제경제학이건 그 강의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학원 강의는 빼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버스안에서 책을 펼칠정도로 그악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강의 외 시간들은 대부분 독서실에서 공부할 정도로 무난한 수험생활이었다. 덕분에 시험전까지 나의 원칙 - 과목당 3권정도의 문제집을 푸는 것 -을 지킬 수 있었고 학원모의고사에서 10등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었기에 ‘나 떨어지면 다 떨어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시험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험생은 시험장에서 합격여부를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1차 시험을 처음 볼 때 호르라기 소리와 함께 와들와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민법 부관법을 풀고 나서 보니 평상시보다 시간이 조금 많이 걸렸으나(약 45분정도) 어차피 잘 못 푸는 회계학은 무시하고 경제문제를 보니 그다지 어려워보이지 않았기에 이정도면 합격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 모의고사보다 조금 까다로웠다는 생각을 했으나 사람들은 많이 어려웠다는 평판이었고 그 해 시험에 바로 91명이 합격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나는 경제 60 회계 47.5 민법 70 부관법 62.5로 평균 60을 받아 간신히 합격했다.

 

 

 

 

 

 

 

4. 2년차 시절 - TV도 울면서 보았다.

 

 

 

2년차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처음 접하는 3과목이 생소하긴 했으나 그럭저럭 익숙해질 수 있었고 소수의 합격자만이 누리는 우쭐함은 자신감의 배경이 되었고 그해 가을 3년차 고수를 모시고 나를 비롯한 초짜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개별 스터디를 하며 2차 논술의 맛을 조금씩 알아갔다.

 

 

 

1월에 N학원에 개설된 스터디에 응시해서 누구나 그렇듯 초반엔 합격의 꿈을 키우며 열심을 내었으나 숙제와 시험과 또 개별공부에 치여가며 1, 2월을 보내고 3월 봄기운이 따뜻해질쯤 2차 공부의 깊이와 그에 비해 부족한 내 한계를 알게되면서 점차 전의를 상실했다.

 

 

 

알겠지만 그 해에는 순수 2년차들이 거의 없고 1, 2차 동차생 특히 3년차 이상 되는 고수들이 학원가를 주름잡고 있었다. 고수들과 나는 실력면에서 비교도 안되고(나의 오판이었다. 2년차나 3년차나 막판에 가면 실력이 거의 비슷해진다) 또 1,2차를 동시에 준비하는 이른바 ‘쌩차’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상황이 내 슬럼프의 주 원인이었다. 나와 같은 조건의 사람들과 공부하고 경쟁하면서 비교우위를 누려야 자신감을 얻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는데 스터디에서도 잘한다는 칭찬한번 못듣고 매번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훌륭한 남들의 모범답안만을 보다보니 가뜩이나 주눅이 잘 드는 편인 나는 올해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 4~5월까지 그렇게 힘들었고, 그 시간은 지금도 가장 되살리기 싫은 기억이다. 매일 독서실에 가서 일단 펑펑 울고나서야 책을 잡던 그 심정. 뭔가 너무나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을 채우고자 TV앞에 매달려 동해물과 백두산의 노래를 들을때까지 눈을 못 떼던 기억. 술이 고파 캔맥주를 사가지고 혼자 집에와서 먹었던 경험도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반쯤 단념하고나서야 슬럼프는 벗어났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자세나 열의가 합격까지는 한참 미달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시험장에 도착.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리지는 못하는 것이 수험생의 본능이다. 공부를 안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험문제는 반이상 아는 문제들이 나오는 법. 실무 대강 풀고 이론 얼추 쓰고 법규에서는 시계를 잘못 봐서 20분먼저 답안지 메꾸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와서 같이 공부했던 보현언니 명희언니와 속초로 3박 3일의 여행을 떠나서 올해 시험은 마음을 비우고 내년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하고 돌아왔다.

 

 

 

그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아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그간 따두었던 자격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10월, 11월에는 경제와 회계 강의를 들으며 동차 합격의 준비를 했다. 12월 합격자 발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에 부응하여 불합격하였으나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시험의 의외성과 불확실성이다.

 

 

 

그해는 실무가 특히 점수가 낮아서 소문으로는 130명만 면과락을 하였다 한다. 나는 실무 40, 이론 49, 법규 48로 평균미달이었다. 주위의 고수들은 고득점하고도 실무 과락으로 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나는 평상시 공부의 차이가 시험장에서 점수로 반영되는 확률는 상당히 미미하거나 불확실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5~6년씩 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을 공부했으나 그 사람들과 열심히 한 2년차와의 실력차이는 실지로 백지 한장차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 같다.

 

 

 

흔히들 우리 공부는 학문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수험생의 수준에 맞게 하면 된다고 말을 한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폭넓고 깊게 (오래)공부하는 사람이나 기본적인 내용을 충실히 하는 사람들이나 합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슷비슷하다고 생각된다. 2년차를 비롯한 초짜들은 자신감을 잃지말고, 4년차이상의 고수들은 자만하지 말것. 이것이 내가 후배님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수험생활의 비결이다.

 

 

 

 

1998년 3년차를 시작하며 S학원에 1,2차 동시반 스터디를 시작했으나 1월엔 김영오 회계사의 원가회계 강의를 듣고 중개사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부는 2월부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S학원 스터디는 3년차 이상의 모임을 기대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처음 준비하는 쌩차들이 더 많았고 같이 어울릴만한 여자도 없어서 이래저래 내 기대에는 못 미치는 점이 없지 않았으나 그간 아는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6명 정도가 개별적으로 스터디를 꾸려 일주일에 한번씩 3과목을 100분씩 쓰고 돌려읽고 토론하고 모범답안을 만드는 작업을 2월부터 5월까지 계속해나갔다.

 

 

 

기본 4년차 이상의 고수들이라 또 주눅이 들게 되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얻는게 훨씬 많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 모임 자체도 즐거워서 내게 큰 힘과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5월말까지는 회계만 기본서 「송상엽 중급회계 上下」와 문제집을 사서 틈틈히 보고 거의 2차만 집중적으로 준비하다가 6월들어서 2차책은 다 치워버리고 한달동안 1차에만 전념했다. 1차는 96년도의 경험으로 보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으나 그래도 3년차의 특성상 세상없어도 붙어야 했기에 하루에 12시간 과목당 3시간씩 매일 사수해가며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민법은 「권용우 문제집」을 3회독했고 경제는 「정병렬, 주한광 문제집」. 회계는 학원교재와 「이효익 송상엽 문제집」과 기업회계기준을 되풀이해서 보았고 법규는 「조병욱」 교재를 중심으로 「임호정 손성태」 문제집을 보았다. 그리고 부동산고시의 1차 모의고사를 2년치 이상 풀었다.

 

 

 

내가 객관식 시험을 준비하며 두는 포인트 두가지는 첫째 문제집을 많이 푼다는 것이다. 보통 과목당 2권에서 3권정도 2회독씩 하고 들어가는데 1차 시험의 경우 시간이 별로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빨리 문제를 푸는 연습이 매우 중요시 되는데 이는 문제집을 평소에 많이 풀어보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또다른 하나는 학원내 모의고사를 응시하는 것이다. 학원 모의고사가 그대로 실제 시험성적과 같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시험상황과 똑같은 상황에서 대비를 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상대적 순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달려온 한달여끝에 응시한 98년도 1차 시험은 예상외로 상당히 쉬웠고 나는 민법 77.5 법규 82.5 경제 75 회계 77.5 평균 78.125라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2차. 당시 4년차이던 보현언니와 둘이서 한주일에 한두번씩 만나 하루종일 시험보고 바꿔보며 2차의 쓰는 연습을 하고 남은시간은 2차과목 총정리에 몰두했지만 시험을 목전에 앞둔 6월부터 2차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자신감 상실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불안과 초조 또는 혹시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등으로 뒤섞인 시간들을 보내고 2차 시험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1교시 실무와 2교시 이론 시험을 끝내고 나는 “법규 시험만 잘보면 합격이다!”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법규문제를 받아드는 순간 생전 처음보는 문제들에 당황해서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흔히들 어떤 거짓말을 해서라도 10장을 채우라고 하지만 되는대로 목차를 구성하면서도 그 안을 채울 말들을 찾지 못했고 나는 억울하다는 마음과 자포자기 그리고 남들도 나와 같았겠거니 하는 실마리 같은 기대를 안고 서울대를 터덜터덜 걸어내려왔다. 그해 가을은 주택관리사 시험을 준비하며 보냈고 드디어 12월 2일 종로 5가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공중전화를 붙잡고 불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후 확인한 그해 2차의 결과는 실무 53, 이론 52, 법규 39.5로 법규 과락에 119등이었고 눈물은 그제서야 나왔다.

 

 

 

 

 

 

5. 4년차 시절 - 한번도 떨어질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12월은 놀며 쉬며 그렇게 보내고 1월에 N스터디에 참여하면서부터 또다시 공부가 시작되었다. 평가사 2차 시험은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하려고 들면 해야할 내용이 많고 또 어찌보면 그다지 할 내용이 많지가 않다. 4년차때의 공부는 이제까지 공부내용을 되살리고 다시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격이라고나 할까. 매일 아침 실무 문제를 서너시간 풀고 점심겸 저녁을 먹고 이론과 법규 공부를 밤까지 나누어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3월까지는 스터디에서 내준 숙제를 해내느라 바빴고 4~5월은 그 숙제를 바탕으로 서브노트를 만들며 한편 학원․개별 스터디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다시 모범답안으로 작성하는 일을 하며 빠듯이 보냈다.

 

 

 

실무는 100점짜리 모의고사형 문제들을 중심으로 시간내에 실제 답안과 동일하게 구성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고 이론과 법규는 기본서들을 주로 읽으며 밑줄을 치거나 내 서브노트에 빠진 판례나 개념 정의 등을 옮겨 적는 방법을 사용했다. 2차에서는 쓰는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6개월간 1주일에 두번씩 스터디를 통해 전과목을 실제와 같은 상황으로 답안을 작성하면서 아는 문제거나 모르는 문제거나 어떤 문제라도 10장을 메꿔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그에 비례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4년차때 슬럼프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원래 슬럼프는 자신감 상실에서 오고 공부를 자신의 목표만큼 하지 못하거나 자기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자신감을 잃어가게 된다고 한다. 스터디를 가지 않는 날들은 매일 아침 9시 30분경이면 독서실에 도착했고 3~5시까지의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하다 지겨워지면 만화책을 읽었고 평상시 군것질을 좋아하는 터라 간식을 먹으며 피로를 달랬다. 또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시간날때마다 영화나 비디오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2차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고 느끼게 된 후로는 실력은 빵빵한데 연차도 역시 헤아리기 어려운 이른바 강호의 고수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종종 들었으나 누구나 공부한 만큼의 댓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4년차 공부에서 기억나는 일은 독서실 책상옆에 붙여놓은 달력에 매일 공부한 시간에 따라 다른 색의 별모양 스티커를 붙이며 (예컨데 12시간 이상 공부한 날은 금색, 6시간 이하는 빨간색) 공부시간을 확보하려고 했던 일과 3기 스터디의 첫 모의고사를 보면서 한계를 박박 긁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고 집에 오며 펑펑 울었으나 뜻밖에 계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일이다.

 

 

 

드디어 시험날. 언니의 남자친구가 우리집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 서울대에 데려다주는 덕분에 몸도 맘도 편히 갈 수 있었고 1교시 실무 시험이 끝난 후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으며 이번엔 합격임을 확신했다. 평안한 맘으로 2, 3교시 시험을 치르고 나서 감정평가업계의 선배가 된 보현언니와 형부가 사주는 회를 실컷 먹고 오래간만에 평안한 맘으로 비디오를 보며 푹 쉬었다. 그리고 발표일까지 불안하기는 했으나 단 한번도 떨어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해 겨울 실무 43.5 이론 62. 법규 51. 96등으로 합격의 소식을 들었다.

 

 

 

 

좀 식상하지만 나 역시 끄트머리에 주위 분들에게 고마운 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공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셨던 우리 부모님. 용돈에 간식에 내 생활필수품까지 챙겨주었던 언니 그리고 수험기간 동안 정신적으로 큰 의지가 되었던 보현언니. 그리고 이모저모로 도와주었던 준수오빠, 두형이 오빠, 윤배 오빠... 우리 스터디 팀원으로써 부족한 팀장의 실력을 탓하지 않았던 조동현, 박엘리아, 박창서, 김병규 그 외에 많은 수험생 여러분이 올 겨울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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