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수기

 

처음 감정평가사를 알게 된 시기는 대학교 1학년(19984월경) 때였습니다. 원래의 전공은 교통공학 이었으나 입학을 함과 동시에 도시공학과와 통합되어 건축공학과와 토목공학과 등 다른 학과보다 훨씬 큰 학과(200여명)과 되었습니다. 그 때 도시공학과 전공의 동기가 지인 중에 감정평가사가 있는데 한달 수입이 약 5000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는 근처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놀라움만 표시했습니다. 대학생활을 충실히 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3, 4학년으로 복학했을 때는 장학금도 받을 정도로 학업에 전념했습니다. 4학년 3학기에 교수님의 권유로 교통영향평가회사에 취업을 하였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교통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교통기사로서의 업무는 수면시간이 지나치게 부족(15일 철야 경험)하는 등 점점 이 직업의 미래가 어두워 보였습니다.(이 시기 교통영향평가를 폐지하려는 국회의 움직임이 있었음) 그래서 대학졸업 후 6개월이 지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집에서 15일간 티비보고 피자와 치킨, 중국음식 등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하고 15일 후의 내 모습을 보니 실망스러웠습니다. 몸무게는 대학교 1학년 때와 비교하여 10kg 쪄있었고, 집에만 있다보니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외의 공기가 그리워 향한 곳은 서점이었습니다. 평소 교보문고를 자주 찾았기에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한 종각의 교보문고로 향했습니다. 베스트셀러와 카세트테이프 등을 아이쇼핑하며 피서를 하던 중 감정평가 가이드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나와 감정평가가 만난 최초의 연이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시험과목, 합격관련 통계, 감정평가사가 하는 일, 업계의 비전, 합격수기 등이 종합정리되어있었습니다. 그 책에 몰입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3시간 정도만에 3분의 2 가량을 읽었습니다. 합격수기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감동적이었고 읽으면서 눈물을 닦기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읽고 서점을 나오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감정평가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회사를 나올 때는 사장님께 쉬다가 한국도로공사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장래의 진로를 바꾸게 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20057, 8월경 서울법학원의 2차 기본강의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수험생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 때의 실무는 이홍규 평가사님, 이론은 조국현 평가사님, 법규는 김성훈 평가사님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공부가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실무가 재미있었고 이론과 법규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실무는 감정평가실무강의를 2회 정도 풀었으나 보상평가는 하지 않았고, 이론은 안정근 교수님의 부동산평가이론 3판과 조국현 평가사님의 써브노트를 보았습니다. 법규는 박균성 교수님의 행정법론 3판을 보면서 김성훈 평가사님의 써브노트를 보았습니다. 1차시험 공부는 시중의 기출문제집과 연습문제집을 보면서 실제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당시 집이 부천 중동에 있었으므로 근처 꿈빛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초반에는 아침 7시부터 도서관 마감시간인 11시까지 알차게 공부했습니다. 꿈빛도서관은 현대식의 신축도서관으로 인기가 많아 7시에 도서관에 도착해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날이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지 3개월 정도가 지나자 피곤함이 몰려와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려워졌고 따라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어 더욱 공부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상황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2월의 영광에 개별스터디 모집공고를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3명의 스터디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3명 모두 1년차이고 그 중 성실하게 참여하려는 사람은 1명 뿐이어서 공부효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박성식 평가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공부를 시작하는 스터디원이었고 신림동으로 가서 개별스터디를 하겠다며 짧은 만남을 끝으로 헤어졌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저에게 말을 걸어주시며 자기가 소중하게 여긴 영어단어장을 빌려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아직까지도 돌려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1차시험과 2차시험을 동시에 공부하며 1년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1차는 동강을 들으며 기본 이론을 익히고 문제집을 풀며 실전감각을 배워나갔습니다. 2차는 문제상평가사님이 녹음하신 카세트테이프로 법규의 개별법을 공부했고 행정법을 읽었으며 실무는 감정평가실무강의의 문제를 답을 안보고 풀어보려 노력했습니다. 감정평가실무강의의 문제는 1점에서 20점대의 문제가 대부분이었기에 어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고 1년 동차도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빙산이 일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기 스터디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법학원의 시험을 봤는데 1번문제에서 헤매다가 1번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답안지를 뺏기게 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1기 스터디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1기 스터디에 참여하고 싶어서 세종법학원에서 스터디를 했습니다. 여기서도 충격을 받게 됩니다. 법규시간에 무인가를 써야 하는데 열심히 쓰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저는 1페이지 쓰기도 벅찼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1년 동차의 꿈을 접고 1차에 매진하기 위해 세종법학원의 1기 스터디를 일부 환불받고 나오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 2회 정도 참여하고 나왔습니다.

 

 

 

 

1차시험에 매진하기 위해 한성학원이 모의고사를 봤는데 40~50점대의 점수가 나왔습니다. 이 때 너무 당황해서 이러다가 1차시험도 떨어지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체력이 고갈되며 처음의 공부시간은 확보가 되지 않고 꿈빛도서관에서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하게 되어 도서관을 부천대학도서관으로 옮기기도 하며 공부를 이어갔지만 공부를 하려고 책을 보면 귀에서 하는 소리가 나는 등 힘든 나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부모님도 저를 겪려하시고 건강을 염려하셔서 헬스클럽에 다닐 돈을 지원하셨습니다. 공부보다는 헬스장에서 댄스를 하는 것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댄스로 거의 매일 3시간 정도 보냈습니다. 땀을 빼고 샹워를 한 후에는 몸을 만든다는 이유로 치킨을 시켜 밥 대신 먹었으며 그 이후시간에 공부를 안한 때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치킨을 먹으며 나중에는 맥주 한캔, 한병, 두병, 피쳐 한병으로 늘어났습니다. 몸무게는 줄고 몸은 탄탄해져서 탤런트 부럽지 않은 6팩도 소유할 정도가 되었으나 1차시험이 다가올 때까지도 1차 과목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2005년 서울대학교에서 쳤던 1차 시험에 58.5(3문제 차이)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때의 시험이 전년도보다 조금 어려웠다는 얘기를 유도은 평가사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은 크게 실망하셨으며 저도 당황스러웠습니다. 평소 큰 시험에 강했던 제가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수 등으로 여행을 다니며 머리를 식히고 부천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의 권유로 직장을 알아보게 됩니다. 감정평가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인란의 몇 개의 평가법인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감정평가사의 꿈을 결심하면서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친구들에게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누구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어리석게도 합격하면 만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써브감정평가법인에 취업되어 역삼동으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강남으로 출근한다는 자부심과 야근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회사생활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써브감정평가법인 인천지사로 발령을 받아 4년 정도 경력을 쌓았고 한국부동산연구원과 프라임감정평가법인에서 1년 정도 경력을 쌓아 감정평가사 시험의 1차 면제라는 성과(2011)를 얻었습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들도 키우면서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했지만 제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프라임감정평가법인에서 제 생각과는 다르게 저의 감정평가 실력이 경력보다 낮다라는 자괴감이 들어 감정평가업계를 떠나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1차 면제를 받음과 동시에 시험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작은 사업을 하며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후 1년이 지나 최영태 직장선배가 감정평가사시험에 최종 합격했다고 연락을 받게 되고 감정평가사 시험에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의 수익성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일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20127월 서울법학원의 기본강의를 실강으로 신청함과 동시에 감정평가사 시험에 대한 2번째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의 실무는 유도은 평가사님, 이론은 이충길 평가사님, 법규는 정희웅 평가시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공부를 했던 과목들이라 이해가 쉬었습니다. 실무는 기본강의를 듣기 전에 이용훈 평가사님이 집필하신 기출문제를 2~3회독 하였기 때문에 강의내용은 쉽게 느껴졌습니다. 기본강의를 실강으로 들으며 감정평가실무강의를 기본서적으로 개별스터디를 경희대에서 하였고, 공부는 동대문정보화도서관에서 주로 했고, 손님을 위해서 사업장 내에서 공부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간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구립건강센터의 작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하며 충실히 기본강의를 따라갔습니다. 모르는 부분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꼭 표시를 하여 기본강의 때에 질문했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좋게 보아주셨는지 모르겠지만 기본강의가 끝나고 유도은 평가사님이 강의실에서 수강생들 모두에서 통닭파티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그 때 제 옆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했던 지금의 김봉훈 평가사님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10월부터 0기스터디가 시작되었는데 의욕이 넘쳤기에 0기부터 4기까지 한번에 접수하고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공부는 아침 9시부터 밤 10~11시 까지 하였고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와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순수 공부량이 증가했고 평균 10~12시간 공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0기 스터디에서 예상과 유사하게 항상 상위권에 있었고 나중에 7등으로 아쉽게 장학생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0기 때부터 김봉훈 평가사님과 함께 공부하며 힘들 때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2기 때까지 김봉훈 평가사님과 저는 항상 상위권에 있었기에 ‘2년차로 합격하겠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기부터 상위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며 4기 때에는 중위권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김봉훈 평가사님은 상위권에 있었습니다. 1, 2기 때에는 서로 경쟁하며 실력을 키워왔는데 4기 때에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며 난 떨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기부터 사업을 정리하며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공부장소는 광명의 철산도서관이 되었습니다. 최첨단시설로 되어 있어 공부하기에 적당했습니다.

 

 

 

 

이 때까지 실무는 감정평가실무강의 5~7회독, 패스 3회독, 기출문제 3(유도은, 김사왕, 이용훈) 3회독, 종합문제(유도은) 2회독, 플러스 초급 2회독, 플러스 중급 1회독 하였고, 이론은 에이플러스 3회독, 이충길 평가사님 써브 5회독 하였습니다. 법규는 정희웅 평가사님 써브 7회독, 행정법 1회독(발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든 써브 목차노트를 걸어다니면서 무한반복 하였고 오답노트 약 7회독, 스터디자료 요약본 2회독 정도 하였습니다. 3기 때에 욕심을 부려서 한림법학원의 매실, 매론, 매법을 수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서울법학원 자료만 충실했었어야 그 당시의 김봉훈 평가사와 비슷한 실력을 가질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기부터 자신감이 상실되고, 혼란스러운 정신상태가 되어 결국 24회 시험에 실무 과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내는 1년 반만에 얻은 성과로는 대단한 점수라며 위로했지만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막노동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공병이 병과였으므로 막노동은 자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건축하는 곳이 많지 않아 결국 거제도의 조선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은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노동의 기쁨이 컸고 야근이 없어서 정신수양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룸메이트 중에서 험악한 동생의 폭행으로 안경이 부러지는 등의 사건을 계기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음식점 설거지와 택배 상차작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다음 시험을 준비하던 중 광명에서의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결심하게 되는데 신림동으로 와서 원 없이 공부하자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신림동의 작은 빌라에 전세로 들어왔습니다. 공부는 독서실에서 시작하고 9시부터 1230분까지 약 15시간 정도 공부를 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과 저녁에 산책하는 30분 정도를 제외하고 책상에 앉아 쉴세없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힘들 때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난 지금 공부가 직업인 거야. 오늘도 야근중이고 나중에 꼭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야.’ 1년 동안 술은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오로지 합격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때까지 실무 기출문제는 20회독 정도 하였고, 플러스 중급 2~3회독, 서울법학원과 한림법학원의 스터디자료도 발췌하여 풀어보았습니다. 법전을 찾아볼 때마다 중요 키워드에 밑줄을 그었고 여러번 본 경우 형광펜으로 다시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광펜 부분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게 정리했습니다. 박균성 교수님의 행정법강의 9판은 2~3회독(발췌)하였고, 써브노트는 필요할 때마다 무한반복하여 보았습니다. 법전은 각 개별법을 안 본 부분이 없을 정도로 밑줄과 형광펜이 표시되었고 이 책은 나의 재산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학원 스터디는 1기부터 서울법학원에서 시작하였고 1~4기까지 10등 안에 들었던 경우도 많았고 법규는 늘 5등안에 들었으며 1~2등도 여러번 했고 최고답안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정희웅 평가사님께 질드리러 갔었는데 법개정된 부분이 반영되어있지 않고 오타도 많아서 이번에 정리해서 책을 내려는데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받았습니다. 3~4기가 되어도 흔들리지 않고 상위권을 유지했고 김봉훈 평가사와 스터디를 같이 하는 도중 김승일 평가사가 합류하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금승일 평가사는 실무의 베타로서 실력자였습니다. 세명이 같이 식사를 하며 서로 실력을 다져갔으며 서로 자극하며 경쟁했습니다. 김봉훈 평가사는 전체 1~2등도 많이 했으며 김승일 평가사는 항상 전체 10등안에 있었고 최고답안을 자주 내었습니다. 전과목이 골고루 우수한 수험생이었습니다. 4기 때가 되어서 긴장이 최고조가 되었고 합격할 자신이 없어 이충길 평가사님께 저의 심경을 이메일로 알려드렸습니다. 이충길 평가사님은 힘들더라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보라격려의 답문을 보내주셨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1230분 독서실에서 나와서도 집에서 천장을 보며 조문을 중얼거리며 외었으며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공부량을 더 늘려갔습니다. 밑 빠진 독에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물을 다 채울 것이라는 각오로 공부량을 늘렸습니다. 김승일 평가사는 우리 세명은 다같이 붙을 것이다.’라고 용기를 주었고 실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험기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난 지금 아무 쓸모 없는 사회적 쓰레기가 되었있다.’라고 생각되었던 점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2년차 때 이를 물면서 공부하다가 치과치료를 받아야 했던 경험도 있었고 나중에서 잇몸을 어서 고름을 빼야 했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했고 후회없이 공부했습니다. 사회적 쓰레기가 되지 않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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