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알리기에리는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서른 일곱 살에 고향에서 추방되어 20년 가까이 객지를 떠돌다 라벤나에서 죽었지요. 그 곳 성 프란체스코 성당 옆에 있는 황제과 성인들의 무덤들 사이에 '고향 피렌체가 줄 수 있는 영광보다 더 영예로운 사람들을 벗 삼아'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추방은 사람을 소모시키지만 고도로 완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는 마뜩찮은 조건으로 피렌체로의 귀향을 제의 받자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 어디에 있건 나는 태양과 별빛을 볼 수 있다. 불명예스럽게 아니, 치욕적으로 사람들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그 어디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세계 전체가 내 고향이다"

고향을 잃었기에 단테는 세계적 관점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운 자는 타국에 있어도 이방인이 아니며,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친구가 없어도 그는 온 도시의 시민이며, 두려움 없이 운명을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을 즐기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어디에 자리를 펴든 그곳이 바로 고향이니까요.

추방에 즈음하여 단테의 정신적 확장은 '신곡'의 집필을 시작하게 했고 죽기 전에야 완성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시는 떠도는 자의 20년간의 고뇌였고, 분노였고, 주술이었고, 깨달음이었을 겁니다. 그는 '더 이상 명예가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명예를 갈망했으나' 그 무상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차치하고 그 문장의 힘으로 무찔러오는 단테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대중을 압도 했으니 당나귀 몰이꾼 까지 단테의 칸초네를 읊조렸다고 합니다.

만일 단테가 살아서 지금 고향 피렌체로 귀향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자신의 집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렌체의 거리는 700년 전의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지금 피렌체 사람들에게 700년 전의 언어로 말을 건네 온다하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토스카나의 방안은 이탈리아 언어의 이상어가 되었고, 그로 인해 비로소 사람들이 쓸만한 풍요로운 언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변화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변화경영전문가이며 변화경영 사상가가 되고 싶은 나같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컨텐츠는 영원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00년 동안 바뀐 것이 별로 없는 피렌체에 여전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피렌체 주민들은 그 몰려든 사람들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컨텐츠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를 보기 위해 피렌체에 가지는 않으니까요.

'신곡'의 구성과 기본 사상은 중세의 산물이지만 이 작품이 모든 근대시의 효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드러내는 대목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페이지 어느 대목에서건 인간의 모습과 정신이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니까요. 그가 내세의 일을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이승의 사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연구했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몸짓의 묘사 하나로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위해서 얼마나 삶에 대한 진지함이 깊었겠습니까? 모두 방랑에서 얻은 지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경영은 스스로를 추방하여 경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키워 온 뿌리에서 멀어져 스스로 벽으로 세워 둔 좁고 편안한 틀 안을 버리고 하나의 바람으로 떠나 보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텅 빈 열린 공간을 마련해 두어 새로운 바람이 그 속으로 들락거리며 들려주는 속삭임을 듣는 것입니다. 중세 천년의 엄격한 구조로부터 르네상스라는 불길을 타오르게 한 것은 바로 그 바람이었으니까요. 굽이굽이 세상의 모든 구석을 거쳐 까마득히 먼 과거에서 미래로 불어가는 바람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들어있을까요. 그 바람이 보고 듣고 전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세요. 그것은 아마 심장으로 들어야 들릴 것입니다.

가장 넓게 펼쳐지는 천계 밖으로

내 마음이 내보내는 한숨은 날아 올라가네.

슬퍼하는 사랑의 신이 낳은 새로운 지각이

낯선 길로 이를 인도하네.

그가 목적지에 도달해 머무를 때에,

경모(敬慕)의 광채로 둘러싸인 한 연인을 보네

마침내, 그 여인에게서 나오는 놀라운 빛에

얼굴 붉히며, 순례자 정신은 가만히 응시하네.

그녀의 상태를 본 대로 내게 얘기해주어도

그 말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기에,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네.

그러나 내 생각 속의 그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베아트리체를 떠올리게 하네.

나의 여인들이여,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오.

- 단테, <새로운 인생>

단테는 <새로운 인생>에서 이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의 대표작인 <신곡>의 탄생을 예언하는 듯합니다. 단테는 이 시를 쓰고 나서 “매우 경이로운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단테 연구가들은 이 환상을 <신곡>의 세 주제인 지옥, 연옥, 천국에 관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단테는 <새로운 인생>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내가 본 것들은 나로 하여금, 내가 그녀에 관해 좀 더 훌륭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더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도록 결심하게 했다. 이를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 그녀에 관해 여태껏 어느 여인에 관해서도 써진 적이 없는 바를 쓰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그런 후에 은총의 주인이신 주님의 선하심으로 내 영혼이 이곳을 떠나 그 여인의 영광, 즉 세세 만세토록 축복을 받으실 주의 얼굴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 복된 베아트리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단테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출간 한 후 공직에 몸을 담았고 피렌체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35세의 나이로 피렌체를 통치하는 자리에 올라 삶의 정점에 섰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는 느닷없이 추락했습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영원히 추방’ 당해 20년 동안 여러 객지를 방랑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한 채 귀환의 약속 없는 유배의 길에 오른 그는 빈곤과 함께 자신을 쫓아낸 이들에 대한 분노를 견뎌야 했습니다.

단테는 인생의 반환점에서 심각하게 추락했지만 '마음이 미리 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기억과 완전한 사랑의 비전을 붙잡았습니다. 팍팍한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천국에 있을 베아트리체를 떠올렸고, 언젠가 천국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베아트리체를 통해 본 사랑의 비전을 영적 활동의 중심에 두고,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영혼의 순례를 글로 적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신곡>입니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빈곤을 견디고 분노를 다스리고 지상의 사랑을 천상의 사랑으로 확장했습니다. 긴 방랑의 세월을 영적 생활과 글쓰기로 견뎌내면서 불멸의 사랑을 담은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내게도 '마음이 미리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 비전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비전이 과거를 재발견하고 현실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리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힘을 줍니다.

* 단테 알리기에리 저, 박우수 역, 새로운 인생,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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