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독서의 마음을 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읽되 읽은 것을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
나는 읽은 것들을 저장하는 단순한 ‘정보입력장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는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이야기이고 이제는 단순한 정보입력장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책을 읽는 바로 현재 바로 그 순간을 느끼고 이를 더 나은 사유를 위한 기초가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책을 읽는 순간 나와 또 다른 세계사이의 소통이 되는 것이며 그 순간 그것을 시발점(trigger)으로 하여 폭발하듯이 아이디어가 창궐하는 순간을 향유한다.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읽은 것들에 기대어 천천히 사유하고 음미하며 명상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 인식이 점점 명징(明徵)해짐을 느끼며, 내부에서 무언가가 계속 솟구쳐 오르는 힘을 느낀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을 마스터하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10년째 꾸고 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고통을 감내해가면서 까지 이를 이루기 위해 매달려 살았다.
지금은 현재 잿빛의 삶을 살고 있지만, 고통과 허무와 좌절의 막(幕)을 찢고 나아가 솟구치고 싶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때 나는 이를 이해할 능력이 0이었다. 2003년 한번 슥 읽어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한번 도전해 봐야 겠다
고 생각하고 이의 이해를 위하여 알랭 바디우, 로널드 보그, 마이클 하트, 폴 패튼, 알베르치 괄란디, 클레어 콜브룩, 존 라이크만 들
의 책을 먼저 읽었고 그 다음 <천 개의 고원> 텍스트를 같이 옆에 두고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 때 감정평가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때 내가 존경하는 혹은 두려워하는 이진경님의 <노마디즘 Nomadism> 이 나왔고 이때 정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유목이란 주체 외부의 존재인 길을 내부화 하는 방식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움직여라
제자리에서라도 움직여라.
끊임없이 움직여라.
움직이면서 다양한 탈주선을 준비하라.
지각의 촉수들을 뻗어 나아가되 몸은 이동하지 않는 여행을 하라.
지층화의 예속을 끊고 나아가는 탈주체화의 운동을 하라.
우연과 우발성에서 전환과 도약의 계기들을 포획하라. 점에서 선으로. 흐름에서 흐름으로 나아가라.
내가 <천개의 고원>의 책을 어려워했던 것은 쓰여있는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나무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애기이다.
리좀(Rhizome)은 탈중심화와 비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다. 리좀(Rhizome)은 나무나 뿌리와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사유의 재현모델을 따르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구현된 규범적 질서를 해체하고 생성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한다.
가족, 사회, 국가라는 영토에 귀속시키거나 환원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로 환원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은 이미 가족, 사회, 국가에 의해 포획되어 지층을 이루고 있다.
생성은 포획된 이것들이 지층을 벗어나 새로운 탈주선들을 만듦으로써 시작된다. 탈영토화의 운동이 그것이다.
리좀(Rhizome)은 나무가 가진 위계적 질서의 독재를 깨뜨린다. 리좀(Rhizome)은 무질서이며 혼돈(chaos)이다.
리좀(Rhizome)은 중앙집중화, 위계적 질서, 조직화된 기억들을 거부한다.
리좀(Rhizome)은 욕망과 무의식을 억압하는 규범적 사유체계를 거부하고, 일자적 권력을 해체하며, 모든 종류의 생성을 포획하고 포획된 그것으로 제 몸을 만든다.
뿌리(Root) 말고 리좀(Rhizome)을 만들어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리좀과 나무의 이항대립은 탈영토화 와 재영토화
사본과 지도
무리와 군중
소수와 다수
유목주의와 정주주의
전쟁기계와 국제장치
등과 같은 천 개의 고원의 가장 중요한 중추적인 개념들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이것들은 다시 다양한 변이들을 만들어낸다. 이것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하나로 순환하며 이어진다.
천개의 고원은 읽으면 읽을수록 중심도 줄기도 토대로 갖지 않은 리좀개념이 보여주는 놀라운 발상에 감탄하곤 한다.
진정으로 내가 생각했던 삶의 모습이 바로 리좀(Rhizome)의 그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들뢰즈의 노마디즘 (Nomadism)은 벽암록의 공안(公安)과도 같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최치원이 말한 접화군생 (接化群生)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계속 이 책을 통해 사유의 방법론을 배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법고(法古)를 탈영토화 함으로써 창신(創新)에 이를 것이다.
내가 들뢰즈에게 배운 것은 바로 옛 것을 익히고 배우되 그것을 지층화 하지 않고 새로운 탈주선을 만들어 횡단하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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