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징세·징병,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호적이나 토지대장을 만들어 이것을 근거로 통계를 작성한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다. 고대 로마에서의 인구에 대한 신고조사(申告調査)'센서스'라 불렀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전한다. 또 중국에는 전한말기(前漢末期) 이래 '호수인구수(戶數人口數)'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국가가 무너지고 봉건적 분권화가 진행된 중세에는 신뢰할 만한 인구통계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근대적 통계는 19세기 초의 유럽에서 성립되었으며, 이때부터 인구의 정확성이 구축되어 갔다. 정부통계의 개선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L.A.J.케틀레로서 그는 1853년 제1회 국제통계회의를 개최하고 통계의 보급과 발전에 힘썼다. 19세기 중엽 선진국들의 통계제도는 정비되었으며, 통계의 대상도 인구·범죄에서 폭을 넓혀 산업·무역도 포함하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특히 사회문제가 중요시되어 가계조사 등의 통계까지 등장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선진국들의 통계는 더욱 확충·강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국가가 경제정책·사회보장정책 등 국민생활의 여러 부문에 걸쳐 정책적 개입을 다면화함에 따라 각종 통계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통계들은 국민경제 계산론·산업연관론 등 국민경제 전체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확립됨으로써 통계의 체계가 특히 경제면을 중심으로 정비되어 갔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 국가는 국민경제계산에 있어 상호 비교 가능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일부 개발도상국 중에는 인구·중요물자 생산량 등 기초적 통계에 있어서도 국제적 신뢰를 얻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

 

 

 

 

통계는 재정부담이나 프라이버시 의식의 발달로 조사실시에 어려움이 더욱 증대되고 있으며, 이에 대비 앞으로의 통계는 조사의 개폐·신설과 컴퓨터 등 새로운 정보기술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추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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