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Statistics(영) 또는 Statistik(독)의 어원은 국가(state)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status이다. 즉 Statistics는 국가의 기술(記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Statistik 이란 용어를 처음 학문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독일 Gottingen대학의 Achenwall, Gottfried(1719-1772)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Conring, Hermann (1606-1681)이 1660년에 국가의 학문인 국상학 Staateskunde라는 명칭의 강의를 하였다. 그는 Aristoteles(B.C. 384-322)의 4원인설을 따라 실질인(판도(版圖), 인구), 형식인(政體, 행정), 유력인(재정, 군비), 목적인(국가목적)의 형태로 국가에 관한 기술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통계학은 영국의 정치산술(政治算術), 독일의 국상학(國狀學), 프랑스의 확률론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각기 흘러온 이 3개의 지류가 "통계학"이라는 큰 강에 합류하는 모습을 간단히 보기로 한다. 원래 Statistics(영) 또는 Statistik(독)의 어원은 국가(state)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status이다. 즉 Statistics는 국가의 기술(記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일의 국상학
Statistik 이란 용어를 처음 학문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독일 Gottingen대학의 Achenwall, Gottfried(1719-1772)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Conring, Hermann (1606-1681)이 1660년에 국가의 학문인 국상학 Staateskunde라는 명칭의 강의를 하였다. 그는 Aristoteles(B.C. 384-322)의 4원인설을 따라 실질인(판도(版圖), 인구), 형식인(政體, 행정), 유력인(재정, 군비), 목적인(국가목적)의 형태로 국가에 관한 기술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국상학을 Statistik 이라 부르고 국가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기술하는 학문으로 정의한 사람은 Achenwall 로, 그는 1748년 통계학 강의를 개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통계학은 국상학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고 기술은 수량이 아니라 서술적이었고 수학적 사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국가에 관한 통계자료의 정비, 증대와 함께 국가에 관한 수량적 기술이 통계학을 의미하게 되고 총인구의 추계, 다른 제국과 면적, 인구, 군대, 재정 등의 수량적 비교 등 영국의 정치산술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파가 독일 국내에 태두하였다. 표식통계학파라 불리 우는 사람들이다. 창시자는 덴마크인 Anchersen G.P.(1700-1765)이다. 계량가능한 사실을 표식으로서 배열하므로 각국의 인구, 종교, 재정, 군대, 행정조직, 화폐등을 비교하고자 한점이 특색이다.
표식통계학파의 세력은 18세기말엽까지 독일국내에 꽤 침투하였다. 대표적 학자로 Crome, A. F. W.(1753-1833)가 있다. 그러나 1804년 표식통계학파와 Gottingen학파라 불리 우는 Achenwall 나 Schlozer,A. L.(1735-1809)의 후계자들 사이에 격렬하고 신랄한 논쟁이 일어났다. Gottingen학파는 표식통계학파를 평하여 그들은 "형식도 방법도 갖고 있지 않고",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형식에 얽매인 노예로 기술적 사실이라는 살"을 붙이지 않은 "통계의 형핵(形骸) " 에 지나지 않고, "국민정신, 자유에의 사랑, 천재등의 기술에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Gottingen학파의 통계학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과학의 하나"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Gottingen학파의 선언도 결국 현실인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끝나고, Gottingen학파의 몰락은 논쟁에서가 아니라 현실에 뒤쳐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 역사학파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Knies(1812-1898)가 1850년 통계학이란 명칭은 정치산술학파와 Quetelet, Lambert Adolphe Jacques (1796-1874)의 영향을 받은 계량학파에 돌려야만 하고, Achenwall나 Schlozer파의 학과에는 국상학 또는 이것과 유사한 호칭을 주어야 한다고 단정한 것은 자심들의 학문체계에 통계학이란 명칭을 이용하려한 Gottingen학파에의 장송곡이었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Quetelet파 통계학이 융성하게 된다. 결국, 독일 국상학은 statistik 이란 명칭만을 남기고 내용적으로는 영국 정치산술학파에 압도되어 Ahenwall의 통계학(국상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 독일 국상학을 삼켜 버린 영국의 정치산술학파란 어떤 학파인가?
영국의 정치산술
정치산술의 요람은 런던, 명칭은 Petty, William(1623-1687)에 기인한다. 그러나 Petty이전에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Graunt, John(1620-1674)의 "사망표에 관한 자연적 및 정치적 제 고찰"(1662)이 있다. 자료의 제약상 충분히 관찰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까지 전혀 시도해보지 않았던 인구의 추정, 출생, 사망에 관한 통계적분석, 통계적 규칙성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다루었다.
Graunt의 영향은 프랑스, 네델란드등의 유럽제국에도 파급되었지만 영국본토에 있어서는 Graunt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Petty의 영향이 크다. Petty의 "정치산술"이 출판된 것은 그가 죽은 후 명예혁명의 약 2년후인 1690년이지만 집필된 것은 1671-1676년경이라 추정된다. "정치산술"은 당시 영국을 뒤덮고 있었던 비관적 국운, 네델란드, 프랑스에 추월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논박하고, 영국은 네델란드,프랑스를 능가하여 세계무역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논증하고자 한 책이다. 정신을 고무시키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정렬을 끓어 오르게 하므로써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책이 아니다. "정치산술"의 방법은 (1) 형이상학적, 사변적 논의를 전면적으로 배제하여 [수(Number), 중량(Weight) 또는 척도(Measure)]라는 수량적 표현을 이용하고, (2) [자연에서 실현 할 수 있는 기초를 갖는 요인만을 고찰"하여 [개개인의 변덕, 의견, 취향, 격정]과 같은 주관적요소에 좌우되는 요인은 고찰하지 않는 다는 점이 특색이다. 더구나 소박한 귀납론이 아니라 [노동가치의 이론을 근거로 하는 산술]이었으므로 Petty는 막-스에 의하여 [근대 경제학의 건설자, 가장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경제학자의 한 사람]이라 칭찬받았다. 물론 Petty의 수량적 관찰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 배경으로 모든 것에 화폐적 표현을 주는 상품생산의 사회로 영국이 옮겨 가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Graunt, Petty로 시작하는 정치산술은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Graunt로 시작하는 인구통계분석은 영국의 천문학자 Halley, E,(1656-1742)에 의하여 높은 수준에 달하고, 도박적 사업이라 일컬어지던 생명보험도 Halley의 생명표를 기준으로 보험료가 산정되도록 되었다. 수학자 라이프니치(1646-1716)도 정치산술에 흥미를 갖고 "정치산술의 여러 문제"를 저술하고, 인구통계를 다루는 중앙통계기구의 설치를 요망하였다.
18세기 초기의 정치산술에 공헌한 사람은 프랑스의 Vauban(1633-1707), 영국의 Gregory King(1648-1712) 및 Devenant(1656-1714)이다. Vauban은 "왕국충분의 일세론"(1707)이란 저서에서 프랑스의 면적, 인구를 추정한다. 그러나 이 책은 프랑스 국민의 우민(憂悶)을 노골적으로 서술하여 하층계급의 부담경감, 과세의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불태워 졌고, Vauban은 왕의 역정을 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Devenant는 "세입론"(1698)에서 정치산술을 "정치에 관한 여러 사항을 ......숫자에 의하여 논의하고 연구하는 기술"이라 정의한다.
King은 "영국 국세에 관한 자연 및 정치적 관찰과 그 결론"(1699)이란 저서에서 인구추계, 연령별 인구분포의 추계를 발전시켰다. 토지면적, 지가, 각종 생산물, 조세공과의 상승정도도 산정하였다.
새로운 발상은 없고 통계적 관찰도 비교적 부족했던 18세기 초기의 침체를 거쳐 정치산술은 18세기 중엽 인구통계의 정비, 사망표의 정밀화등 인구통계분야에 있어서 진보하였다. 인구문제가 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라 생각되었던 18세기 학문의 집대성은 Sussmilch(1707-1767)의 "신의 질서"(1741, 1761 증보판)이다. 그는 대량 관찰에 의하여 인구현상에서 보이는 통계적 규칙성을 실제로 입증하였다.
Graunt, Petty를 창시자로 하는 영국의 정치산술학파는 수 많은 분석가와 업적을 세상에 내놓아 독일 국상학을 끌어넣는 기세를 보였지만 Petty의 후계자들은 수량적 측면을 너무 강조하여 질적 및 이론적 측면을 잊어 버린 것이다. Sussmilch가 사망한 1767년에는 산업혁명의 진전,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정치산술은 인구통계학과 경제학으로 분화되어 가게 된다. Adam Smith의"국부론"은 1776년, 통계학에서 Quetelet시대를 창출한 Quetelet의 저서 "인간에 관하여"는 1835년에 출판된다. 이 저작 이후 정치산술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정치산술학파의 체계는 통계학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확률론과 통계학
정치산술학파의 통계적 분석과 확률론과의 연결은 18세기초기 까지는 전무하였다. 확률론은 초기에는 오직 우연게임의 해법에 일관하여, 정치산술학파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Jakob Bernoulli(1654-1705)의 "추론법"(1713)제4판에서 확률론이 시민적, 도덕적,경제적인 것에도 응용되어 처음으로 확률론과 통계학과의 관련을 볼 수 있다.
De Moivre의 "우연론"(1718)에는 다음 제목으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 2항식 (a+b)n을 급수전개하여 항의 합을 근사하는 방법. 이 방법으로부터 실험이 주는 동의(同意)의 정도를 추정하는 몇 가지 실용적인 규칙이 유도되는 것"
2항분포의 극한으로서 정규분포를 유도한 De Moivre는 이 결과를 남녀의 출생성비와 같은 실제문제에의 적용가능성에 관하여 충분한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일정한 법칙을 가정하고, 이 법칙에 따라 모든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실험 또는 관찰의 회수를 증가시킴에 따라 사건 발생비율이 가정한 법칙에 끊임없이 접근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역으로 만약 무수한 관찰로부터 사건의 비율이 일정 양에 수렴하는 것을 발견한 경우에는 이 비율이 사건발생을 규정하는 일정법칙을 나타낸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여기서 대량관찰에서 얻어진 Sissmilch의 통계적 규칙성의 이론적 기초가 확률론에 의하여 보여진 것이다. 이와 같이 Jakob Bernoulli 나 De Moivre에 의하여 확률론은 우연게임의 해법에서 탈피하여 응용범위를 넓히고, 통계학과의 연결을 깊이하게 되었지만, 확률론과 정치산술 사이의 교류는 없었다. 정치산술과 확률론이 의식적으로 연결된 것은 Laplace(1749-1827)의 "확률의 해석이론"(1812)이 효시이다. 그는 인구동태의 통계적 규칙성이나 천체관측에 있어서의 오차문제(예를 들면 유성의 궤도계산을 할 때 오차를 갖는 관측치로부터 어떻게 하면 "참 값"을 끌어낼까)에 확률론을 적용하였다. 통계적 연구에 대한 확률론의 응용이다.
Jakob Bernoulli나 De Moivre, Laplace를 거쳐 확률론을 기초로 한 근대통계학이 성립된 것은 Quetelet을 중심으로 하는 1830년부터 20년간, "통계만능시대"라 불리 우던 시기이다.
이렇게 하여 각기 흘러온 통계학의 3개의 부류는 독일의 국상학이 정치산술에 합류되어 통계학이 되고, 19세기 중엽에 드디어 프랑스 확률론과 합류하여 확률론을 기초로 둔 근대 통계학이란 큰 강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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