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이라면 누구나 합격을 위하여 공부를 하고, 합격만을 원한다. 그런데 왜 불합격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해외여행 중에 만난 한 친구는 길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계획했던 장소만 가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길로만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지도 보는 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한번 갔던 길을 잘 찾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어제 갔던 피자집에 저쪽에 있으니까, 그 옆에 꽃가게를 끼고 돌아서 신호등을 건너면 박물관이 있을 거야"라는 계산은 그 친구에겐 불가능하다.
그는 한국에서 자신이 공부(?)한 루트 외의 길로 다니면 반드시 길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불안해해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내가 알려준 새로운 길을 찾아오라고 하면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 때마다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있다.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네가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야."
지난 달 다시 제21회 감정평가사 시험을 보고나서 4년 가까이 받던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렸다는 시원함과는 달리 공부가 부족했나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시험이란 잘 보았던 말았건 결과가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인 거 같다.
시험지를 보고 당황하며 허겁지겁 답안지를 작성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상승하는 혈압, 호흡곤란을 겪으며 잠을 깬 순간 머리가 정리되며 정답이 떠오른 시간은 새벽2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험지와 법전을 뒤적이며 3시간 가까이 답안을 새로 작성하였다. 일순간에 사라지는 자신감.
감정평가상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요구된다고 하나, 엄격한 잣대로 보면 틀림없는 불합격.
한없이 인(仁)한 눈으로 보면 합격선인 50점에 턱걸이 할까 말까한 수준. 암기와 반복만이 합격을 보장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수천 수백페에지나 되는 시험범위를 4년 동안 수없이 꼼꼼히 보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2년만에 합격한 친구들에 비해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한 탓일 것이고, 오랜 공부로 인하여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할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 끝난 시험인데 편안하게 기다리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4년을 불합격의 두려움 속에 살았던 것 같다.
나는 해외에서 만난 친구처럼 두려움에 빠져있어, 내가 그에게 했던 충고를 잊어버린 것이다. 즉, 내가 시험에 불합격하는 이유는 "시험에 또 떨어지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합격생과 나를 비교하고 한 없이 자기 비하 했던 모습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비하는 인간의 영혼을 썩게 하거나 파괴시켜버리는 악마의 강력한 무기라고 한다. 이러한 자격지심 내지 열등감에서 발생한 자기 비하는 내 속을 갉아먹으며 불합격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12월에는 200여명의 합격생들돠 수천 명의 불합격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진 모두가 항상 불합격생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시험의 불확실성을 비판하며 수험계를 떠날 것이고, 대다수는 수험생의 신분으로 다음 시험을 기약하며 공부를 이어갈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최소인원합격제라는 희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의 선택에 후회를 하여서는 안된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장기간 노력해 본 적이 있었던가!
혹시라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면 열등감과 불합격에 대한 두려움은 버려버리고, 나의 모든 것을 데리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주 사소한 말투에서부터 중요한 공부까지 부처와 같은 마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거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주면 절대 길을 잃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으며 반드시 합격한다고,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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