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인 따라 감정결과 천차만별… 재판 결과에 절대적
감정인 둘러싼 분쟁 막을 길 없나



최근 감정인을 둘러싼 분쟁이 급증하는 이유는 감정인 없이는 재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송이 복잡해지고 사건 파악에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선 법원 판사들 사이에서는 재판의 주도권이 감정인에게 넘어갔다는 푸념도 나오고 있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원래는 감정인이 보조적인 역할을 했었지만 사건이 전문화되면서 판사가 오히려 소외되는 일도 발생한다”며 “판사들의 전문지식이 부족한 분야에서는 감정에 따라서 재판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데 이를 통제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 “감정인 없이 재판 못해”= 2013년 한 해 동안 서울중앙지법은 재판에 6929회 감정평가를 요청했다. 그동안은 주로 시가 감정이나 측량이 감정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아파트 하자 감정처럼 규모가 큰 것에서부터 저작권 침해 등 전문적인 부분까지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2013년에는 예년보다 200명가량 더 늘어난 1658명을 감정인으로 지정했다. 특히 건축 감정인이 큰 폭으로 늘었다. 최근 도심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경우가 많고 재건축 관련 분쟁도 늘면서 건축 감정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감정평가는 증거의 하나일 뿐이지만 소송 결과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송 대상이 전문적인 영역일수록 감정인의 영향력도 세진다. 감정평가를 판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감정일수록 판사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판사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이상 그 분야의 전문가인 감정인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신개발 분야에 대한 분쟁이 늘어나면서 재판에서 감정인의 영향력은 더 커지는 중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힘들게 파악을 해 놓아도 재판 결과를 축적할 수 없어 감정 기준을 모두 마련해 두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소송 대상이 전문 영역일수록 감정인 영향력도 커져
법원 전속 안 돼 일방 당사자와 유착관계 형성 위험
유일한 관리는 사후평가… 근본적 문제해결 기대 못해

 

 


◇감정인별로 감정결과도 천차만별= 그러나 감정평가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이나 기준이 없어 감정인이 누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감정결과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분야는 건축감정이 이뤄지는 아파트 하자보수비용 청구소송이다. 균열이나 부식같은 비교적 하자 여부를 구분하기 쉬운 증상뿐만 아니라 거울 뒤에 생긴 틈새, 화장실 방음 등 하자 여부를 결정하기 애매모호한 증상까지 법정에서 다투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하자로 인정할지에 대해서도 감정인마다 의견이 제각각이다. 같은 하자를 보고도 감정인마다 수리 비용이 다르게 측정된다. 이 때문에 감정인의 의견이 승소 여부나 배상금액 등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감정료가 많이 드는 것도 큰 문제다.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 하자보수비용 청구소송의 경우 보통은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이 넘는 비용이 감정료로 청구된다. 감정인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고 여러명에게 감정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사자들은 판사보다 감정인을 누가 맡게 되느냐에 촉각을 기울인다. 그만큼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건축 분야는 감정인이 심사에서 배제되는 비율도 꽤 높다. 서울중앙지법은 감정인을 모두 7개 분야(시가, 경매, 건축, 측량, 문서, 신체, 진료기록)로 나눠 명단을 관리하고 있는데, 2012년 활동한 건축감정인 312명 중 58명(18.58%)이 2013년에는 감정인 자격을 박탈당했다.

 


◇관리에 빈틈 많아= 법조계에서는 감정인 제도가 태생적으로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띄고 있다며 관리시스템 부재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감정인이 일정한 자격증만 구비하면 어렵지 않게 법원의 감정인 명단에 등록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감정인이 재판에 주는 영향은 판사만큼이나 큰 데도 공정성에 대한 윤리교육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경기불황이 심해지면서 감정료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문제다. 감정인은 건별로 감정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사건에서 감정인으로 선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업계에 평판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한 변호사는 “아파트 하자보수처럼 일방 당사자가 여러 명인 분야에서는 감정인에 대한 소문이 빠르다”며 “하자보수 범위를 좁게 인정한다고 소문이 나면 감정인 선정에 여러번 누락되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 감정인이 당사자 수가 더 많은 입주민의 눈치를 보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감정인들이 기본적으로 법원에 전속된 사람들이 아니다보니 생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일방 당사자와 유착관계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몇 년 전에는 한 감정인이 일방 당사자에게 돈을 받고 유리한 감정평가를 내려줬다가 들켜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감정인 선정이나 평가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현 제도의 부조리는 심각한 수준”이라며 “예전에 판사로 재직할 때보다 감정에 대한 당사자들의 신뢰도가 낮아진 것을 변호사로 일하는 요즘에 체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속수무책= 현재 법원이 감정인을 관리하는 방법은 사후평가제가 유일하다. 재판에서 감정을 요청했던 재판부가 연말에 설문 조사를 통해 이를 평가하고 각급 법원 감정인 평가위원회가 이를 토대로 일년에 한번씩 감정인 명단에서 ‘불량 감정인’을 솎아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명단에서 제외됐던 감정인도 2년 뒤에는 별다른 제재없이 다시 등록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불량 감정인’이 재등록돼 활동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법원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전 아파트 하자보수 등 일부 분야에 대해 감정평가 기준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했지만, 일선에서는 여전히 감정인 제도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공정성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전문심리위원제도의 활용이 저조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현재 등록된 전문심리위원 2400여명 중 지난해 재판에서 의견을 제시한 경우는 400여건에 불과했다.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한 판사는 “전문심리위원은 보수가 감정인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에 재판 참여에 비협조적이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굳이 동종업계 종사자에게 쓴소리를 해가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홍세미 기자 sayme@law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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