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 ‘비정형(informe)’의 상상력-함기석·정재학·황병승 시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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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강일구]

‘비정형(informe)’의 상상력-함기석·정재학· 황병승 시의 경우

1. 고유성으로 복귀해가는 비정형의 사유

근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의 생활양식은 점차 합목적적 근대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편성되어 왔다. 시간과 공간은 분절되고 압축되었으며 제도를 포함한 일체의 지배방식 안에 수(數)의 법칙성이 가장 강력한 설득의 기술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근대국가가 지향했던 합리적 제도와 질서의 구축, 과학적 사고의 부양, 위생학적 사회의 확립, 표준화와 계량화에 의한 대량생산 시스템의 가동, 빅 데이터( big data)의 축적과 활용 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수의 법칙성에 의한 정형화(定型化)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정형화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한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그늘’이며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그 틀 속에 귀속시키려 하는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인간과 사물을 ‘상품’과 등질적인 기능과 수량, 교환가치로 파악하는 데 익숙해진 근원에는 이 같은 정형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 존재는 ‘익명의 대체 가능한 상품’처럼 소비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 내면을 은밀하게 훈육하고 강제하는 이 같은 정형의 메커니즘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그것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무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인간이 정형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졌을 때, 그 외의 것들이 지닌 가치는 왜곡되거나 소외되며 나아가 장애나 질병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처에서 신경증과 욕망의 비만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보존과 배려를 위한 생명체가 아닌, 정형의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체로부터 발생한 ‘오작동’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이러한 존재성을 추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격리 처리함으로써 현실의 표면을 매끄럽고 안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속해서 연예인의 환상과, 인터넷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 표준화된 미의 척도를 자연스럽게 우리의 내면에 침투시킨다.




대부분 현대예술은 이러한 정형의 메커니즘과의 투쟁을 그 내용물로 담고 있다. 예술은 개별적인 인간 고유의 내면성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다. 이는 문학 또한 마찬가지이며, 특히 1990년대 한국 문단에서 대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라는 말들은 직접 정형의 메커니즘을 공격하는 방향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정형성은 그 견고성을 유지·보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포스트모던이나 해체라는 ‘말’이 주변성을 빈틈없이 재영토화하는 정형의 메커니즘에 흡수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내가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게릴라전이 소모적인 저항에 머물지 않고 이룩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함기석·정재학·황병승 시에 보이는 해체와 재영토화 간의 길항적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고뇌와 절망, 새로운 존재의 발굴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2000년대 한국시의 주요한 현상은 ‘파괴된 몸’의 형상과 ‘말이 될 수 없는 말들’로 요약된다. 이러한 특징을 보인 일군의 시인들은 신서정, 미래파, 뉴웨이브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들의 시가 지닌 난해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것들이 파악 불가능한 대중사회에 대한 절망의 결과인지, 세계와 대면하기를 포기하고 자폐적 언어에 갇혀버린 태만의 결과인지, 혹은 새롭고 유의미한 시적 상상력의 모색인지 판단해야 했다. 무엇보다 절감했던 것은 이들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아우를 수 있는 지평이 부재해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경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상상력의 지평을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회화 용어인 ‘비정형(informe/formless)’의 개념과 조우시키고자 한다. 바타유의 ‘비정형’이란 기획된 사물의 정형을 무화하는 운동방식이며 사물의 이름에 부여된 이성의 권위를 박탈하는, 고착된 ‘개념’을 부정하는 운동이다. 1929년 바타유는 앙드레 브르통과 결별하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대립했으며, 모더니즘 예술 전반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미셸 레리스 같은 동료와 함께 그는 '도큐망(Doocuments)'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정의된 '사전(Dictionnaire)'을 제시했다. 이 사전은 근본적으로 이성중심주의의 권위와 폭력성을 비판하는 한편, 그에 대항하는 모더니즘 예술 또한 이성의 기획에 불과함을 폭로하려 했다. ‘비정형’은 그 사전의 주요한 챕터를 이룬다.






사전이라는 것은 단어의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단어의 직무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비정형은 주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형용사이면서도, 각각의 사물은 그 자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세상의 사물을 저급하게 끌어내리는(déclasser) 역할을 하는 용어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거미나 지렁이처럼 도처에서 짓눌릴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믹한 인간이 만족하기 위해서 우주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 전체의 목표는 이외에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프록코트를, 즉 수학적인 프록코트를 부여하는 것과 연관된다. 반면에 우주가 어느 것과도 유사하지 않고 비정형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주는 거미나 침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조르주 바타유, '사전' ,  '도큐망' 제1권 7호, 1929, p.382.(크라우스, 정연심 외 옮김,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미진사, 2013, p.4. 재인용)





바타유가 공격하는 것은 ‘수학적인 프록코트’를 거치지 않고선 사물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근대의 로고스 중심주의이다. 근대의 이성적 합리주의는 사물의 추(醜)를 배제함으로써 아카데믹한 인간이 ‘만족’할만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인간 내면의 야생적 본성, 세계의 배설적 측면, 자연의 폭력성은 근대 바깥으로 내던지거나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카데믹한 인간은 웅변가의 입을 바라보는 동안 로고스적 행위인 ‘말’에 몰두할 뿐, 그의 혓바닥이 튕겨내는 ‘침’을 바라보지 않는다. 바타유는 형태가 ‘훼손된’ 혹은 ‘해체되는’ 사물들로부터 매혹을 느낀다. 그는 사물의 형태를 연기나 침과 같은 것으로 변형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최초의 순수지각으로 되돌아가는 예술의 표현방식을 고안한다. 그것이 비정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정형이 드러내는 사물의 ‘저급함’이다. 우주를 “거미나 침”의 형태로 되돌려놓는 것, 즉 정돈된 형상으로 귀결될 수 없는 불쾌하고 추한 ‘형용사’적 특성을 다시 존재의 본질로 되돌려놓는 것이 비정형의 임무다. 바타유는 사물 자체를 이성적 위계질서로 보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의 사상을 ‘저급유물론(base matérialisme)’이라 명명한다. 비정형은 사물을 순수감각적 원형(原形)으로 되돌려놓는 저급유물론의 핵심 개념이다. 이러한 바타유의 사유는 근대적 사유의 정형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비정형’을 통해 정형성을 공격하는 함기석·정재학·황병승 등 2000년대 저급유물론적 시의 상상 기저를 추적하고자 한다.



2. 기호의 도식성과 투쟁하는 추(醜)


최초로 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만든 18세기의 학자 바움가르텐에게 아름다움이란 ‘감성적 인식’을 뜻했다. 감성은 이성을 보완하는 도구였다. 그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감성적 인식을 시(詩)에서 찾았다. 시가 감성을 다루지만 이성에 가장 가까운 예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철저한 근대인이었던 그에게 시의 언어는 인식 가능한 ‘정형’의 세계를 드러내야 했으며, 현실에서 감각 불가능한 표현, 예컨대 ‘하얀 어둠’ 같은 표현은 사용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현대예술은 이와 같은 고전미학의 관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상대적 ‘무질서’를 추구함으로써 예술의 개념을 유동적으로 재조정해왔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한국시에 정형성의 대척점에 놓인 그로테스크와 추(醜)가 대대적으로 나타난 이후 이러한 경향은 이성중심적인 사유를 해체하고 공격하는 전위적 표현방식이 되었다. 1990년대 말 그로테스크와 추에 의한 해체 전략은 간혹 비정형의 사유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 분절의 지점을 점유한 것이 함기석의 상상력이라 판단된다. 그는 형용모순과 감각 불가능한 상태의 재현을 통해 억압적 ‘정형성’에 대한 공격적 인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고정된 정체성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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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에게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수학적 등식화(A=B)와도 같다. 이는 인간 존재를 해석 가능한 기호(sign)로 바꾸어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지 입은 여자”로 불리길 꿈꾸는 여성의 욕망은 그녀가 ‘직선’과 ‘밑줄’이라는 전혀 엉뚱한 수학적 기호들로 전환됨으로써 좌초된다. 연관공, 형사, 목수의 눈에 그녀의 육체는 해석해야 하는 도형으로 보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 분야의 지식을 통해서만 타인을 바라보며, 그들 자신의 직업이라는 사회적 규정 안에 갇혀 대상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피살자’로만 발견되는 여자의 육체는 검은 도화선, 사건의 단서, 줄자 등 이미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물에 불과하다. 여기서 함기석이 문제시하는 것과 바타유가 비판한 ‘수학적 프록코트’가 서로 일치됨을 알 수 있다. 여자의 몸을 가로지름으로써 그녀가 ‘태어남’을 가능케 하는 ‘직선’은 수학적 프록코트의 은유이다. 수학적 프록코트란 모든 존재를 규격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예측 가능하고 계량 가능한 사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함기석은 연관공, 형사, 목수 등이 드러내는 각기 다른 시각을 통해 현대 사회의 질서정연한 분업체계 안에 수학적 프록코트가 내장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분업체계는 인간을 그 영역으로부터 생성된 표준화된 지식과 획일적 관점 안에 가둠으로써 타자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직선을 그음으로써 여자가 “태어났”다는 표현은 그녀가 타인의 눈에 ‘피살자’로 발견된다는 상황과 모순된다. 이 역설은 인간이 사회 제도 안에서 정체성을 부여받는 순간 한 주체로 ‘탄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할 자유를 빼앗긴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직선’은 인간 정체성을 규격화하는 사회적 메스로서 정형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아울러 한 인간의 사회적 호칭이 기입될 빈칸으로서 개인의 억압된 장소를 보여준다.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배제된 것’, 즉 개인의 고유성이다. 이로부터 함기석의 비정형적 상상력이 시작된다. 그의 기본 전제는 인간이란 본래 규정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수학적 등식화를 총괄하는 대타자를 뭉개진 곡선()의 형상으로 그려낸 점이 이러한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특정 개인을 지칭하기보다 인간의 사물화를 기획한 제도를 상징하며, 나아가 수학적 프록코트를 초과하는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이때 유령처럼 생긴 곡선의 형상은 파악 불가능한 훈육권력의 속성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속하는 실체는 무엇으로 상징되는가? 함기석에게 그것은 수학적 등식화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편재된 도식화된 기호라 할 수 있다. '내가 잠들면''국어선생은 달팽이''수학시간'을 비롯한 여러 시편에서 함기석은 ‘교실’, ‘사전’ 등과 같은 사회화 장치들을 추적한다. 교실은 인간을 교사-학생이라는 일방향적인 관계로 지식을 주입한다. 사전은 사회적 약속에 의한 획일적 의미가 탈주하지 못하게 하는 감옥이 된다. 위 시 '○가 하루는’에도 직업명과 사물명이 개인의 욕망과 고유성을 거세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함기석은 기호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기호의 도구가 되는 상황을 문제시한다. 그는 종종 말놀이를 통해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한다. 함기석의 첫 시집의 제목이자 시 제목인 “국어선생은 달팽이”처럼 의미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말놀이를 통해 기호의 규약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는 시를 제도 언어의 도식성에 저항하는 게릴라로 인식한다. 함기석이 시 '고유한 방화범'에 “시인은 제 피와 뼛가루가 묻은 자신만의 언어로/자신의 교수대와 관을 만들어야 한다/치열하게 유희하듯 유희하듯” 이라고 말한 것은, 칠레의 시인 니카노르 파라가 “시인은 사물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이름 변경')라고 말한 것 보다 더 비장하게 기호의 도식성과 투쟁해야 하는 시인의 사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달린다
  사내는 가방 속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차가 눈보라를 끌고 달린다
  사내는 가방 속 하얀 지하실을 내려다본다
  기차가 눈보라를 끌고 빌딩숲을 달린다
  사내는 다친 발목과 하늘에 빨간 요오드팅크를 뿌리며
  사물들을 새롭게 명명한다


오후 3시는 밤하늘이다 바람은 죽은 쥐
  백열등 불빛은 난쟁이다 연필은
  파란 눈의 밀랍인형 글자는 흰 칼이다
  천장은 토성 종이는 지하실이다


(중략)


사내는 밀랍인형의 머릴 잘라 들판으로 던진다
  들판으로 검은 쥐떼가 몰려든다
  사내는 지하실을 무너뜨리며 소리친다
  녹색의 시체들은 검은 말이야 언어야 흰 칼이야
  검은 녹색이 희다니 으악! 가방은 가방(假房)이야
  그럼 내가 앉아 있던 가방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기차가 들판을 지나며 들판으로 달린다

'녹색의 시체들이 차례로 일어선다' 부분

 
사물들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하고자 하는 ‘사내’는 시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사내는 명명을 위해 ‘요오드팅크’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인의 말바꿈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치유의 과정임을 암시한다. 즉 사물에 덧씌워진 기호가 사물의 본질을 기획된 의미 속에 고정해 버리고 ‘상처 입히는’ 것이라면, 시인의 말바꿈은 사물의 본질을 해방하는 저항인 셈이다. 독자는 이 시를 착란적이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따라 읽어가며 사전적 의미 규정에서 벗어나도록 유도된다. ‘오후 3시’가 ‘밤하늘’이 되고 ‘천장’이 ‘토성’이 되는 형용모순의 비약적인 은유들은 의미론적 차원에 대한 극단적 저항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내가 가방에 갇힌 채 ‘누운’ 자세로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저항의 활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주하는 기차는 사내의 무기력함을 부각시킨다. 기차는 압도적인 속도로 빌딩숲과 들판을 앞질러 가며 ‘눈보라’로 현실을 뒤덮는다. 기차와 사내의 대비 관계를 유의할 때, 이 눈보라는 시 '○가 하루는'의 ‘직선’처럼 인간과 사물을 압도하는 폭력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말바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동반함으로써 기호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필기구가 그로테스크한 사물로 명명되는 것이다. 연필은 ‘파란 눈의 밀랍인형’이라는 비생명적인 모조인간으로, 검은 글자는 ‘흰 칼’이라는 무기로, 종이는 ‘지하실’이라는 음습한 공간으로 대체된다. 이는 연필을 생명이 거세된 인간으로, 문자를 생명을 파괴하는 흉기로, 종이를 음습한 밀실로 이해하게끔 함으로써, 문서화의 과정이 곧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파괴하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사내는 필기구들을 파괴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전복시킬 가능성은 미미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가방(假房)’, 즉 거짓된 안식처에 머물러 있고 기차의 질주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은유로 전면화된 추는 함기석의 절망적인 현실 인식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에 동원된 추는 기호의 도식이 지닌 폭력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더러 은폐된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녹색의 시체들은 검은 말이야 언어야 흰 칼이야/검은 녹색이 희다니 으악! 가방은 가방(假房)이야”에 보이는 인식론적 깨달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함기석은 기호의 도식성이 지닌 추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바타유적인 저급유물론의 입구에 진입한다. 저급유물론은 관념을 배제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조차 사물의 추만은 허용하지 않은 채 세계를 보고자 했음을 비판하면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추의 주요한 본질 중 하나가 비정형인 것이다. 함기석은 '사라진 소녀' '하얀 새' '창문' 등 여러 시에서 인간과 세계의 표현될 수 없는 ‘여분’을 늘어진 창자, 시체 등 훼손된 육체성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의 시는 인간이 가진 비정형적 잠재 요인을 드러내기 위해 추와의 결합을 기꺼이 허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비정형’의 상상력은 주로 정형의 세계를 해체하고 비판하는 데 묶여 있는 듯하다.

 3. 감금된 게니우스의 고통

‘나’란 육체와 정신의 고유성을 통해서 인식된다. 생명 감각으로서 육체와 그 안에 지속하는 정신(기억)의 통일성으로부터 개인은 자아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학문체계가 분류와 분석을 지향한 결과 자연을 포함한 인간의 신체는 해부학적 패러다임에 귀속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달리 어떤 세계 질서에 구속되기 이전의 순수한 신체를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른다. 기관 없는 신체는 무엇으로도 실현될 수 있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다. 근대의 ‘신체’가 그렇듯이 정신 또한 결코 온전한 의미로 인식되기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도덕과 질서의 규율에 따라 인간은 ‘나’라고 호명되는 주체화 과정에서 자아로부터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배제한다.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은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그 무엇’을 게니우스(Genius)라고 부른다. 게니우스란 로마 신화에서 개개인에 내재한 수호신을 의미하지만, 아감벤은 이 용어를 제도 장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자아의 ‘이면’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정재학의 비정형적 상상력은 바로 제도 장치에 억압되어 있던 게니우스를 발굴하고자 한다. 그의 시에 억압 장치로 등장하는 건 바로 ‘나’를 규율하는 시선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 앞에서
  저 찍어준 것 기억나세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말이에요
  현상한 사진에 저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진에 담긴 편지' 부분

 
사람들의 시선에 숨이 막혔네 그들은 나에게 파란색칠을 마구 해댔네 난 내 몸에 불을 지폈네 보라 연기가 피어오르네 그들은 여전히 파란색이라 하네

 
'낡은 서랍 속에서 1' 부분

 
‘나’라는 노예, 메신저, 허상
  나는 당신을 거기에서 기다린다

 
'모피 입은 비너스' 부분

 
빌딩 꼭대기에서 배고픈 부리를 가진 새 한 마리 딱딱하게 나를 바라본다 눈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볼 수 있었지만 무엇 하나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응시' 부분

 
정체성 문제에 대해 정재학은 함기석보다 비관적이다. 함기석의 ‘나’가 기호의 도식성에 의해 손상된다면, 정재학의 ‘나’는 아예 타자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타인들의 시선은 나를 미끄러지며 빗겨갈 뿐이다. 나는 발견되지 않거나 오인된다. 그들 눈앞에 있는 나의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나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사진에 담긴 편지')일 뿐이다. 나는 비어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은 나를 지워버리는 동어반복의 폭력이다. '낡은 서랍 속에서 1'의 ‘나’에게서 풍기는 ‘보라 연기’를 가두는 것은 타인의 색칠이며, '모피 입은 비너스'의 규정된 ‘나’는 노예에 불과하다. 이들 시의 화자인 ‘나’는 비어있으며 왜곡되어 있으며 수동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재학 시의 주된 문법이 대화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상호 이해에 대한 강한 회의감과 함께 타인과 대화하고 그들을 호명하면서 진정 이해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응시'에 보이는 서로 다른 눈들의 결합은 그러한 상호 이해에 대한 회의감과 소망을 모두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눈들’은 하나로 합쳐지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서로가 ‘타자’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나려는 상상이다. 그러나 하나가 된 시야로 사방을 볼 수는 있어도 “무엇 하나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호 이해의 실패를 뜻한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가 아닌 진정한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발견되지 못한다는 절망으로부터 정재학의 비정형의 상상이 시작된다.

  내 방에는 세 개의 시계가 있네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네 문 옆의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가까웠네 밖에 나가보니 모두들 우산을 쓰고 있었네 나만 비를 맞네 비는 수은으로 내 몸에 스며드네 방에 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안심했었네 수은독이 견디기 힘들었네 약속 장소는 너무 멀었네 택시를 잡았네 운전사는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보며 운전하네 그는 마구 달렸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물먹은 성냥은 켜지지 않았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속 말을 거네 알 수 없는 변성화음이었네 그는 앞차를 받았네 그래도 계속 나를 보네 택시에서 내렸네 다른 택시를 잡았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네 담배 연기는 오로라처럼 피어오르네 담배 연기가 아름다운 것을 처음 느꼈네 그는 외눈박이였네 약속 장소 반대 방향으로 가네 운전기사와 다퉜네 그는 담배 연기를 싫어하네 구토하네 나 그 냄새 견디기 힘들어 택시에서 내렸네 수은은 계속 내리네 다른 택시를 또 잡았네 그는 내 눈동자가 은색이라 하네 믿지 않았네 그 운전사는 눈이 네 개였네 거북하지 않았네 그는 약속 장소에 왔으니 내리라고 하네 생각해 보니 그에게 약속 장소 말한 적 없네 그는 요금을 받지 않네 내려보니 내 방이었네 방에는 아무도 없었네 침대 위의 시계는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네 거울을 보네 눈동자가 없었네 (중략)


세 개의 시계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네

 

'세 개의 시계' 부분

 
정재학의 시에서 상호 이해에 대한 회의감은 종종 기형적인 눈의 이미지로 반복된다. ‘택시 기사’가 ‘외눈박이’였다가 ‘네 개’의 눈으로, ‘나’의 눈동자가 ‘은색’이었다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상호 이해의 시선이 과도하게 작동하거나 아예 작동이 정지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착 상황의 반복은 자폐적 존재의 가능태를 부추긴다. 더불어 방을 떠나 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화자의 상황과 경험 불가능한 이미지의 나열이 벗어날 수 없는 자폐적인 공간성을 강화한다. 이때 끊임없이 ‘내리는’ 수은비, ‘내리고 오르는’ 택시, 운전사의 불길한 모습 등의 전개는 불안을 야기하는 단문들의 강박적인 리듬과도 조응한다. 이 불길한 외부 공간은 화자의 ‘약속’을 무산시킨다. 이 시에서 끝끝내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은 불안에 뒤덮인 ‘방’이다. 이 ‘방’이란 ‘나’가 떠나고자 하지만 되돌아오게 되는 원형트랙이다. 결국 회귀할 수밖에 없는 자폐적 세계, 그러나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심연인 이 방은 '낡은 서랍 속에서 1'의 형태 없는 ‘연기’처럼 타자에게는 해석될 수 없는 ‘나’의 게니우스라할 수 있다.

‘약속’을 예고하는, 그리고 시의 끝에서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세 개의 시계를 주목해보자. 세 개의 시계라는 상징으로부터 쉽게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유추해볼 수 있다. ‘약속’과 결부된 죽은 시계들은 과거에 대한 추억과 현재에 대한 향유,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모두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폐적인 방과 죽은 시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박제된 존재다. 정재학의 시는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진실의 절망을 이같이 드러낸다. 이때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불안은 사회와 자아의 균열 지점에서 파생함과 동시에 그 자체로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내부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존재 내적 불안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한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정육점을 실은 버스가 오자 그녀는 소매를 흘리며 버스에 오른다 정류장의 휴지통에는 얼굴 없는 안경들이 담겨 있었다 버스는 왜 이리 늦는 것일까 야간약국으로 가려면 사진 현상소를 실은 버스를 타야 한다 하늘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잠시 후 비닐 공장을 실은 버스가 왔다 아까 보았던 여자가 담요에 싸인 아이를 안고 내렸다 그녀는 정류장 주위의 소금으로 된 돌들을 씻어 아이에게 먹였다 사진 현상소를 실은 버스가 오자 그녀는 함께 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아무 윤곽 없는 종이 헝겊 얼굴이 드러났다


'야간약국 가는 길' 부분

 
정재학은 인간을 한 꺼풀의 ‘비닐’, 한 겹의 ‘종이 헝겊 얼굴’이라는 두께로 표현한다. 또한 휴지통에 버려진 안경들이 담아낼 얼굴들처럼, 자아란 폐기된 배설물이 머문 장소로 소환되고 있다. 그의 해체된 형상들은 정형으로서의 사회적 자아를 부정한다. 그로부터 그는 절대 언어화되지 않는 인간의 육체성과 정체성을 끄집어낸다. 휘발될 것 같은 자아의 얇은 피부는 그가 도시적 질서 안에서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생존의 두께다. 그 배설물적 형상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정서는 실존적 감각을 연다. 이는 규율 사회 안에서 소외감을 내장한 도시인의 실존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 ‘비정형’이란 자유로운 자아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우리 자신이 예속되어있는 육체와 정신의 고유성을 지시한다. 그 고유성은 추하고 섬뜩한 비정형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존재의 진실은 인용한 시 ?야간약국 가는 길?에 등장하는 사물들에도 내장되어 있다. 규칙적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는 정육점, 사진 현상소, 비닐 공장이 실려 있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흔적을 거세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정육점은 짐승을 고깃덩어리로 해체하고, 사진 현상소는 현실을 이미지로 박제하며, 비닐 공장은 접촉을 차단하는 투명한 막을 생산한다. 정육점, 사진 현상소, 비닐 공장 등이 환기하는 기계적 시스템은 존재의 실체를 은폐하고 그것을 상품과 시뮬라크르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을 암시한다. 정재학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기괴함’은 타자의 시선과 자기 육체 사이에 박락된 실존적 절규를 내포한다. 그 절규는 형상화될 수 없는 게니우스로서의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4. 저급유물론적 타자의 탄생

유대-기독교 전통으로 보았을 때 언어의 다양성은 죄악의 소산이다. 바벨의 신화는 국민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는 일원적 언어 체계를 지향한다. 반면 비정형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워라무룽운지’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주 대륙에 최초로 발 디딘 워라무룽운지라는 신화적 여성은 자기 자식들에게 각기 ‘땅’과 ‘언어’를 정해준다. 갈등하고 반목하던 자식들은 다른 언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형제의 영토를 지날 때마다 그 영토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소수의 부족 사회를 이룬 호주 원주민들에게 땅과 인간, 언어는 하나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땅의 질서와 융합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이 고안한 낯선 언어는 일원적 가치를 해체함으로써 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황병승의 낯선 문법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도시라는 현대사회의 ‘대지’로부터 자라난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환영과도 같은 네온사인과 영상들, 파편화된 육체성이 그의 감각의 뿌리를 이룬다. 그의 언어에는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관념이 삭제되어 있다. 이장욱의 해설처럼 “이 시집의 흩날리는 상징들은, 할 말이 있는데 에둘러 말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물성을 잠시 빌린 것도 아니다.”. 황병승의 언어는 유형진이 일명 ‘모니터킨트’라 부른 고향상실의 세대가 가진 공통된 감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황병승은 현실과 시뮬라크르가 혼융된 대지로부터 고유한 영토를 만든다. 그가 실험하는 비정형의 상상력은 도시 내부에서 발견한 ‘바깥’이며, 진정한 의미의 타자성이다.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커밍아웃' 부분

 

황병승은 자기 시의 주요한 테마로 거듭 ‘동성애’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동성애를 다루는 이상으로 신체의 상부와 하부, 인간성과 동물성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 시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획된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우리 자신에게서 배제된 추악이 외부(外部)가 아니라 이미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는 본성임을 드러낸다. 황병승이 ‘커밍아웃’시키고자 하는 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동성애의 욕망 이상의 타자성이다. 그는 ‘입술’을 뜯어낸 위치에서 항문으로 ‘배설하듯’ 대화하며 ‘당신’을 알아간다. 이는 동물성을 전면화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재위치화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처럼 뒤틀린 육체의 이미지는 새롭게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해체된 살, 즉 순수한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다른 시에도 인간의 배설적이고 짐승적인 측면이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누굴까, 빨간 눈 솟은 귀 바로 나라는 네발짐승의”('살인마(殺人魔)_Birthday Rabbit')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동시에 황병승의 시에는 강간, 살인, 거세와 같은 극단적인 범죄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는 마치 어디까지가 ‘인간’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에 소환된 동성애적 이미지들은 인간을 바라보는 도덕적 시선을 파기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다.

황병승의 비정형적 상상력이 지닌 난해성은 바로 보편적 도덕률을 이탈하려는 시도에서 연유한다. ‘옳은’ 행동과 결정을 강요하는 도덕 원칙을 파열시킬 때 시의 맥락은 파편화되고 해석할 수 없어지는 극단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의 시는 언어를 추월하는 언어다. 시는 방언이 됨으로써 획일적인 생명정치학의 세계를 탈주한다. 이때 황병승의 주제의식을 ‘퀴어(Queer)’로 설명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고정된 사회적 성(gender)을 넘어설 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sex)의 규정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파열된 욕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실현 불가능한 짐승적 욕망을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리어 생물학적 조건으로부터도 탈주한 순수욕망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황병승의 도착지는 정재학의 경우와 달리 ‘나’가 아닌 바로 ‘타자’다.

 
새 이름을 지어주러 왔니
  코를 만지며 내가 물었다

 
대답 대신 소년이 건네는 한 장의 사진,


시코쿠가 기차에 오르고
  잘 가 나를 잊지 말아라
  시코쿠였던 자가 역에 남아 손을 흔든다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나를 풍차의 나라로 혹은 정지

 
(일 년 열두 달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금세 밋밋해지던 나의 목소리여 손바닥을 칼로 푹 찌르며 외로운 신사 시코쿠 시코쿠)

 
당신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내 자리로 간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그른 일. 사로잡히다, 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아저씨의 세계를 내어주세요
  꿈속의 소년이 돌아섰다

 
'시코쿠' 부분

 
성(sexuality)과 짐승적 감각을 횡단하여 황병승은 타자를 향해 간다. 이 시에서 주목할 진술은 “당신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내 자리로 간다!”고 절규하는 대목이다. ‘시코쿠’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그가 사랑하는 타자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는 이성(異性)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상반되는 두 가지 독법이 가능하다. 즉 ‘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으며, 정반대로 ‘타자’로 인해 정체성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하나의 몸짓’이 타인의 호명에 의해 꼭 ‘알맞은’ 의미로 재탄생한다면, 황병승의 ‘나’는 타인에게 사로잡힌 순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을 비정형의 존재가 된다. 이 차이는 김춘수는 인식의 층위에서, 황병승은 욕망의 층위에서 타자를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성 정체성의 횡단은 인간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운동일 때에만 가능하다. 황병승은 순간순간 정체성이 변화하는 사건에 대해 말한다. ‘시코쿠’는 기차에 오르면서 동시에 자신을 배웅하는 모순된 포즈가 가능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 정체성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소년’은 끊임없이 꿈속으로부터 그에게 말을 걸어 내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상상계적 무의식이다. 그것이 근원적 욕망으로 ‘나’를 유도함에 ‘시코쿠’라는 정체성은 변주된다. 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사회적 규준에 구속되지 않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관계 맺음 속에서 변주된다는 인식을 통해 그의 시 이미지는 비정형으로 극대화된다.

시인들이 비정형의 이미지를 활용할 때, 이는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대화하려는 시도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황병승은 ‘나’의 욕망과 세계와의 관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정확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는 타인과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명명된 남성-여성-시코쿠와 같은 명칭들은 다만 그것에 붙여진 순간의 명칭일 뿐이다. 성이란 결국 타자와 ‘알맞게’ 대화하는 방식을 찾고자 하는 자세 바꿈이다. 타자와의 내밀한 접촉을 예비하는 황병승의 언어는 항상 에로틱하다. 한편 황병승이 과감하게 ‘나’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식하는 ‘리얼리티’가 기존의 시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에게 현실이란 확고부동한 실재가 아니라 실재와 시뮬라크르가 중첩된 세계다.

 
끝없이 새로운 도형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세계관도 종교도 자존심도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마리오는 단지 도형만을 바라보며
  마리오는 보여지고 있다 마리오가 새롭게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도형만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리오는 너무 많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마리오 속의 미란다가 미란다 속의 마리오가 마리오 속의 쟝이 쟝 속의 치타 씨가 존재감도 없이 의문을 품는 순간,

 
하나이면서 모든 것들이, 한순간이면서 모든 순간인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페이지 속의 마리오와 녀석들은 입을 모아,

 (맛이 어떻든?!)

 이 모든 이야기 이 모든 픽션 이 모든 판타지가 순식간에 정지하고
  너무나도 허망하게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어딘가의 행간에 처박고,

'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 부분

이 시는 열아홉 소녀 ‘미란다’가 쓴 소설을 내포하는 일종의 메타시다. 소설은 ‘마리오’를 비롯한 방랑하는 악한들의 활극으로 펼쳐진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운 국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소설 속 인물 ‘마리오’가 작가 ‘미란다’의 ‘이야기 가죽’을 훔치기도 하고, 소설 안팎에 존재하는 ‘치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어느 순간 ‘페이지’의 순서 또한 뒤죽박죽인 것으로 선언된 뒤에 소설은 ‘정지’한다. 이러한 일련의 서사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없다. 만화, 영화,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 이미지들이 고유한 물리법칙을 가진 전혀 다른 세계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무질서는 하나의 욕망에 통합된다. 결국 수많은 인물과 사건이 ‘미란다’ 속에 중첩되면서 그녀가 소설로 쓴 ‘욕망’의 대리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세계관도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 상징인 ‘도형’이 등장한다. ‘도형’이란 기획된 시선의 도식성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운동하는 비정형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시코쿠'의 ‘시코쿠’처럼 ‘도형’을 통해 소녀는 ‘미란다’였다 ‘마리오’가 되고, ‘쟝’이자 ‘치타’가 되면서 자유로운 변신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정체성이 한 소녀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체는 다양한 가능태를 수렴한 ‘도형’, 즉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품은 ‘알’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발견은 인간에 대한 사회적 범주화를 벗어나 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황병승이 한 소녀의 욕망을 왜 이렇게 복잡한 형태로 표현했는지 되묻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시적 전략이 시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먼저 논리를 해체하고 감각을 전면화한다. 그 다음 감각적 유물론을 통해 허구와 현실을 혼합시키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황병승은 서사적 논리를 중단시키는 자리마다 “(맛이 어떻든?!)”하고 되묻는 목소리를 삽입한다. 다른 대사들이 큰따옴표로 처리된 것과 달리 이 부분만을 괄호로 구분한다. 이때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세계를 맛보는 ‘감각’이다. 다른 시 '버찌의 계절'에서 시인은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곧 달고 맛좋은 버찌의 계절”에 대해 말한다. 즉 그는 열매를 맛보는 감각의 향유 차원에서 시를 쓰는 유물론적 글쓰기를 추구한다. 이는 원초적 동물의 수준까지 인간 욕망을 노출하는 바타유의 저급유물론과 상통한다. 황병승은 이 저급유물론의 토대로부터 도약하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것이다.

황병승의 시세계에서 '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와 같은 메타픽션의 환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혼다의 오·세계(五·世界) 살인사건'에서도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가 재구성되는데, 실상 이러한 혼종성은 그의 시 전체에 산포되어 있다. 이러한 환상성은 그의 유물론적 시 쓰기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황병승의 시에서 현실과 허구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한 똑같이 ‘리얼리티’로 의미 부여된다. 그는 200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을 발견하고자 하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가 가상이냐 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황병승에게는 그 이미지들을 타자와 나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재분배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는 그 지점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다.

5. 21세기 존재론

2000년대 들어 부각되는 비정형의 상상력은 현대사회의 정형성과 그에 깃든 획일적인 사유를 넘어서 새로운 생성과 발견을 이루려 하는 징후라 할 수 있다. 함기석은 기호로부터, 정재학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황병승은 성도덕으로부터 억압된 인간의 본질을 고민함과 동시에 이러한 억압을 벗어난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놓고자 한다. 함기석은 교실, 사전과 같은 훈육 장치와 도구를 인간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을 방해하는 기획 사회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유희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말바꿈을 통해 획일화된 의미 규정을 무효화한다. 그는 인간의 실현되지 않은 욕망의 가능태로서 비정형성을 주목하면서 인간을 억압하는 기획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정재학은 타인의 시선으로 발견될 수 없는 정체성의 여분, 즉 게니우스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현대 도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한계로 공허와 불안을 포착하며, 현대도시와 인간의 실존적 형상을 비정형의 이미지로 재현한다. 이로써 비정형은 인간의 실존적 토대로 환기된다. 황병승은 도덕적 규율 혹은 성 정체성으로 구속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추적한다. 그는 인간의 짐승적이고 배설적인 측면을 전면화하고, 시시각각 인간의 정체성을 파열시키고 재생하는 비정형적 운동을 통해 무한히 가변적인 내적 욕망을 그려낸다. 아울러 그는 ‘나’의 욕망 실현이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 모두는 ‘정형’의 억압으로 배제된, 더 나아가 추악한 것으로 선언된 인간 욕망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들은 직접 만지고 보는 세계로부터 시 쓰기를 시작하며 치열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성을 다룬다. 그 시도는 공적인 언어로부터 멀어지면서 간혹 ‘난해한’ 것이 된다. 그 난해성은 타자를 보는 내밀한 시선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호의 도식성과 존재를 왜곡시키는 시선, 그리고 세계의 치부에 관해서 쓴다. 또한 시뮬라크르와 몽상·현실이 뒤섞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인간이 욕망하고 실존하는지를 추적한다. 이로써 이따금 해석 불가능성에 직면케 하는 그들의 비정형적 언술의 세계는 가장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 소통불가능성이 번역될 수 없는 개별자의 욕망을 현시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침묵한 채 타자와 함께 놓여 있는 장소를 얻는다.


시의 질료인 ‘말’은 정형과 비정형에 모두 걸쳐 있다. 세계의 정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현재의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언어는 세계를 자유롭게 사유하는 동시에 상징체계의 구속으로 되돌아와 그 자유의 내용물을 타인에게 전한다. 자아와 타자, 세계의 근원적 형상은 정형도 아니고, 비정형도 아니며 그 둘 사이의 왕복운동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근대문학의 탄생을 공식 언어와 카니발 언어의 대화 속에서 찾는다. 그것은 질서화된 공식 언어의 가치 체계와 그로부터 해방된 말놀이의 향연이 결합함을 뜻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부재했다면 중세를 초극하는 근대문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시는 현대 도시의 정형성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탄생한다.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의 형상을 해체할 뿐 아니라, 추악한 형태로 만든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금기를 위반한다. 이러한 금기 위반은 합목적적 질서 속에 파산한 자아의식과 전형화되어버린 타자성을 온전하게 재생하려는 모색인 것이다.

개인들이 상호 공존하는 ‘함께-놓여 있음’이란 유대감의 확대이자 타자로부터 느끼는 불쾌함을 수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타자란 낯선 것이고, 자아란 위태로운 것이다. 비정형의 상상력은 자아와 타자, 세계가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불쾌한 심연이라는 사실을 함께 비춘다. 비정형을 사유한 시인들은 그 낯섦과 불안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2000년대의 시는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는 토대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토대이다. 이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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