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년만에 詩로 부활…조선후기 요절한 천재시인 이언진

경향신문 | 2009.11.28 00:42

▲골목길 나의 집 이언진 | 돌베개
▲저항과 아만 박희병 | 돌베개

 

 

 

"이따거의 쌍도끼를/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손에 칼을 잡고/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이 시를 남긴 이언진(李彦 ·1740~66)은 학계에서 '요절한 천재시인'으로 통한다. 중인 출신이었던 그는 독특한 시풍으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2000여수가 넘는 시를 쓴 것으로 전해지지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병약했던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다행히 300여편의 시문이 그의 아내에 의해 불타지 않고 남아 후손 등이 문집으로 엮었다.

 

 

 

< 골목길 나의 집 > (8500원)은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이언진의 < 호동거실 > 에 담긴 연작시 170수를 처음으로 온전히 번역하고 짤막하게 해설을 붙인 시집이다. < 저항과 아만 > (1만8000원)은 이언진 시의 맥락과 의미를 촘촘히 분석한 것이다.

 

 

 

'이언진'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는 하나의 범주로써 다가온다. 윤동주와 이상 등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한 출중한 시인들을 일컫는 요절한 천재시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페이소스'(비애감)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재시인은 왜 요절하는 것일까? 시대를 앞서 읽은 천재시인은 문단을 전복시킬 태세로 혁신적인 글을 쓰지만 당대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경우가 많다. 시대와의 불화 혹은 내면과의 불화가 그의 생애를 단축시켰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문학적 재능을 불사르다 일찌감치 가버린 그들이 좀더 오랫동안 살았다면 후세는 그의 면모를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지만 그럴수록 신비감은 덜해진다.

 

 

 

 

 

이언진은 이런 요소를 두루 갖췄다. 20세에 역관이 된 그는 1763~64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을 얻거나 필담으로 학술교류를 했다. 일개 통역관이었던 이언진은 직책상 이 자리에 낄 처지는 아니었지만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며 일본인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이 소문이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졌어도 그가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류층에선 중인 출신 문인의 활약에 대한 불쾌감과 위기감마저 나돌았다.

 

 

 

배척당한 시인의 선택은 두갈래다.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만의 성을 굳게 쌓고 그들을 조롱하고 허위와 부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대개의 천재시인이 그러했듯 이언진이 택한 것도 후자다. 그는 시의 형식에서부터 철저한 비주류의 길을 택했다. < 호동거실 > 은 여섯 글자씩 끊어지는 '6언시'로 이뤄져 있다. 5언시나 7언시 중심이던 한시의 전통에서 탈피한 것이다. 그는 중국의 구어인 '백화(白話)'를 많이 구사했는데 이 역시 관습에서 한참 벗어난다.

 

 

 

맨 앞에 인용된 시는 이언진의 '불온성'을 드러낸다. 이 시는 108명의 호걸들이 관(官)과 맞서는 내용의 중국 소설 < 양산박 > 을 차용해 체제전복을 꿈꾼 것인데 신분제를 부정함은 물론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읽힌다.

 

 

 

 

 

 

 

이언진은 '호동(골목길)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이라며 소똥·말똥 냄새나고 시끌벅적한 도시 서민들과 주거지를 정감 어리게 바라봤다. 사진은 이언진이 살던 시대보다 100여년쯤 뒤인 구한말 서울의 골목길 풍경이다. 돌베개 제공 < 호동거실 > 은 "새벽종이 울리자/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만인의 마음을 나는 앉아서 안다"라는 시로 시작했다. '호동'()은 이언진이 스스로 붙인 호인데 '골목길'이란 뜻이다. '호동거실'은 바로 '골목길 나의 집'이란 의미. 당시 호동은 상인·중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 호동거실 > 의 시들은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이 공간을 긍정하고 서민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별칭을 골목길이라고 지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신분적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에게는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세태는 요랬다조랬다 하고/이내 몸은 고통과 번민이 많네/높은 사람 앞에서 배우가 되어/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그는 자신을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동급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배척한 주류사회에 투항하지 않는 자존감과 주체성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교만이라는 게 역자인 박희병 교수의 해석이다.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인 류우이칸이 쓴 책에 담긴 이언진의 초상화.이언진 평전도 준비 중인 박 교수는 기존 학계의 접근이 너무 단편적이고 표피적이었다며 이언진을 동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과 짝패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박지원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가 '개량적 개혁'으로 보인다면, 이언진의 문학 노선의 정치적 함의는 '혁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문단의 이단아이자 괴물이었던 이언진이 250여년이 지난 뒤 우리 앞에 돌연히 나타났다. 그를 다시 요절시켜 관으로 돌려보낼 것인지, 온전한 천재시인으로 자리매김해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눈밝은 문화기획자들에게 이언진은 보물창고로 보일 수 있는 면모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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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은 연암 박지원의 글 「우상전」을 통해서 존재가 알려진 천재 시인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을 다룬 책이다. 그간 몇몇 학자에 의해 조금씩 다뤄진바는 있지만, 이번처럼 이언진의 작품 전체를 완역한 책은 없었다.

 


18세기 조선의 문단 상황에서 이언진의 존재는 파격이며, 존재만으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골목길 나의 집』은 이언진의 존재와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다.

 


이 책은 《우리고전100선》 제12권으로, 이언진과 그의 시집 ‘호동거실’을 소개하기 위해 전체를 완역하고 매수마다 작품 감상 및 짧은 평 위주로 수록한 책이다. (좀더 전문적인 평설이 필요한 독자는 이 책과 동시 출간되는 『저항과 아만』을 참조.)

 



조선문단의 새로운 유형의 이단아 이언진의 발견


중인(中人) 신분의 요절한 천재 시인 이언진(李彦?, 1740∼1766). 이언진은 동시대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의 「우상전」(虞裳傳)이라는 글을 통해 현재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다. 우상은 이언진의 자(字)이며, 「우상전」은 연암 박지원이 이언진을 입전(立傳)한 글이다.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은 그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장편 연작시다. 이 시에 관류하고 있는 인간의 평등,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항거, 다원적 가치의 옹호, 개아(個我)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존중 등은 기존의 조선 문단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모습이다.

 


‘호동거실’은 그간 ‘동호거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호동거실 157수 중 특징적인 몇 수만이 몇몇 연구자에 의해 연구·발표된 바 있다.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호동거실은 오류가 많은데다 그간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언진이라는 인물의 전모를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필자 박희병은 고려대 소장 필사본 《송목각유고》를 발견, 판본비교 및 고증을 통해 170수의 시를 완비하고 이를 최초로 완역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천재 시인 이언진을 선보이게 되었다.

 


이언진은 누구인가?


이언진(李彦?, 1740∼1766)은 20세인 1795년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중국에 두 번, 일본에 한 번 다녀왔다. 역관 이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63년의 일본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이다. 조선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씨를 얻으려 하거나 필담(筆談)을 통해 양국의 학술문화를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응대하는 일은 서기(書記)와 제술관(製述官)의 몫이었다.

 


이언진은 한학 압물통사(漢學押物通事)의 직책으로 일본에 갔다. ‘한학’은 중국어, ‘압물’은 물건 관리, ‘통사’는 통역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직책으로 본다면 이언진은 일본 문사나 학자들과 시를 주고받거나 필담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언진은 성대중(成大中), 남옥(南玉) 등 유수의 서기, 제술관을 제치고 일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의 문학적 천재성 때문인데, 이언진은 일본인이 시를 청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하루에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박지원의 「우상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언진은 1764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일본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는 소문은 서울의 사대부 사회에 쫙 퍼져나갔지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이언진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차별과 부조리에 이언진은 깊은 좌절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언진은 원래 몸이 건강하지 못했는데, 일본에 다녀온 후 급격히 병이 악화되었다. 지나친 독서와 공부로 몸을 상했으며, 역관으로서의 잦은 해외 출장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신분차별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좌절감과 분노는 그의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지 채 2년이 못 되어 죽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1. 이언진에 대한 당대 문인의 평가

 


일본 사행(使行)에서 높은 문명(文名)을 거둔 이언진에 대한 평가가 당대 조선 문인들의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당대의 보수 지배층은 이언진에 대해 일말의 위기위식을 느꼈다. 금석(錦石)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이 그 형인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 말이 보인다. “이번 통신사행에 역관 이언진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스무 살 남짓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귀국했다는군요. (…)지금 여항에 이런 기재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월사(月沙)나 간이(簡易)의 시대에 외국에서 홀로 문명을 날린 역관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늘, 이로 보면 세도가 낮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기이한 재주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역관배 따위가 외국에서 독보하다니, 참으로 말세야’ 하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당대인 가운데 이언진의 스승인 이용휴, 그리고 성대중, 박지원, 이덕무, 김숙 등의 문인이 이언진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이용휴는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언진을 사랑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언진의 재능에 대해 묻자 벽을 가리키면서, “벽을 어떻게 걸어서 통과할 수 있겠소? 우상은 바로 이 벽과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성대중은 1763년에 이언진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절로 다녀왔다. 그는 이때 처음 이언진을 알게 되었는데, 귀국 후에 이언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며 원고를 보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성대중은 이렇게 해서 얻은 이언진의 글을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유통시켰다.

 


박지원과 이언진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박지원은 이언진보다 세 살 많다. 박지원이 스물아홉일 때 이언진은 그에게 몇 차례 자신의 글을 보낸 적이 있다. 박지원은 그 글들에 대해 ‘자잘하여 보잘것없다’라고 혹평하였고, 이언진은 박지원의 이런 혹평을 전해 듣고 분노하고 또 낙담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하였고, 박지원은 「우상전」을 통해 이때의 일을 기록하며 이언진의 재능이 자못 크고 높아 짐짓 눌러주려 한 것이라며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한다.

 

 


이덕무도 이언진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책 《이목구심서》에는 이언진에 대한 기사가 종종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 또한 성대중처럼 이언진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2. 저항과 아만의 시인 이언진

 


이언진은 저항시인이다. 이언진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그의 시에 담아냈다. 그러므로 ‘저항’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호동거실’은 바로 이 저항이 빚어낸 아름다운 보석이다. 이언진은 저항함으로써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언진은 이 당당함 때문에 결국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작(詩作)은 거대한 벽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병은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고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든 듯하다.

 


이언진의 요절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 하나의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시작(詩作)을 통한 이언진의 저항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사는 그 심부에서 심각한 균열과 파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껏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주자학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이탁오를 대놓고 찬양한 이는 없었다. 오로지 유교만이 최선은 아니며, 유불도 삼교 회통을 주장한 이도 없었다. 마치 사대부의 철학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인과 평민들의 삶에서 도(道)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인 셈이며, 균열과 파열의 시작인 셈이다. 이 균열과 파열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의 값진 출발점이다. 이 점에서 이언진의 저항은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제104수〕

 

 


‘호동거실’에서 보여주는 ‘저항’은 시인의 ‘아만’(我慢)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아만’은 불교 용어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른다. 불교에서의 ‘아만’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부정정인 의미로 쓰이지만, 이언진에게서 느껴지는 아만은 자의식 내지 주체의식이 아주 큰 것이다.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과 높은 자존감,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려는 태도, 좀처럼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자신을 동급이라 하였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단순이 ‘높은 주체성’ ‘강렬한 자의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아만’이라는 용어는 이언진이 지녔던 넘쳐흐르는 주체성과 강한 주체에 동반되는 그의 그늘까지 포괄한다.



이백(李白)과 이필(李泌)에다
철괴(鐵拐)를 합한 게 바로 나라네.
옛 시인과 옛 산인(山人)과
옛 선인(仙人)은 성이 모두 이씨라네. 〔제111수〕

 


이언진에게 있어 저항과 아만,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그의 저항은 아만에서 나오며, 아만은 저항의 내적, 심리적 원천이다.

 


이언진은 종래 ‘천재문인’으로 불려왔다. 이언진이 천재인 것은 맞지만, ‘천재’라는 단어는 자칫 이언진의 인간적, 사회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당대 사회에서 이언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문제적 ‘현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에게는 ‘천재’라는 수식어보다는 ‘괴물’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이언진이 이단아인 것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되는 이념과 위계적 질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언진과 같은 이단아는 조선 시대 역사에서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역관 출신의 문인은 이언진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에 홍세태(洪世泰, 1653∼1725)라는 저명한 문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언진 사후 한 세대 뒤에는 중인층 출신의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대표적인 집단이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이다. 이들의 시문에도 신분적 제약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심사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양반이 되고자 했고, 그들을 따라하고자 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언진처럼 자신을 체제 밖에 세우고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19세기에도 중인층 문인들의 문학적 동인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역시 이언진 같은 인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호동거실’ 같은 시집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 점에서 이언진은 공전절후의 문학가이다.

 

 


‘호동거실’, 호동에서 꿈꾼 조선의 전복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의 글을 모두 불에 태웠다. 다행히 그의 작품 ‘호동거실’을 포함한 일부만이 그의 아내에 의해 불태워짐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문집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의 ‘신여고’ 뜻이 바로 불태워지고 남은 원고라는 말이다.

 


이언진의 대표작 ‘호동거실’은 한국문학사의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정신적 가치와 문제성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호동거실’은 형식과 내용 모두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아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호동거실’은 호동의 거실이라는 뜻이다. ‘호동’은 서민이나 중인이 사는 골목길을 이르는 말이고, ‘거실’은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호동은 ‘여항’(閭巷)이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한편 ‘호동’은 이언진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골목길’이라는 뜻의 ‘호동’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참 특이한 발상이라 하겠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신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판단된다. 자신이 사는 공간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이 공간적 동일시는 사대부 계급에 대한 대립의식의 자각적 표출일 것이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했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1) 호동거실의 형식적 특징

 


첫째, 6언으로 이루어진 170수의 연작시이다. 6언시는 그리 흔한 형식은 아니다. 한시는 대개 5언이나 7언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6언시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한국에서 창작되어 왔지만 대개 희작(戱作)이 많고, 5언이나 7언만큼 비중 있는 형식은 아니었다. 그러니 5언시나 7언시와 달리 6언시는 명시(名詩)라 할 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이언진이 6언시 장르를 택한 것은 희작(戱作)을 짓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주변부 장르를 선택한 것은 5언과 7언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대부들의 한시 창작 관습에 도전하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감수성과 사유를 담기 위해서였다.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달리 작시법(作詩法)이 그리 까다롭지 않고, 형식적 구속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언진은 6언시를 통해 퍽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한국문학사에서 두어 편이나 너댓 편 6언시를 쓴 시인은 더러 눈에 띄지만, 170수나 되는 연작을 창작한 시인은 이언진 말고는 없다.

 

 


둘째, 『호동거실』에는 백화(白話, 중국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호동거실』에는 특히 『수호전』에 보이는 백화 단어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이언진은 『수호전』이나 『서상기』 등 중국 소설이나 희곡을 애호하였다. 이런 작품들은 사대부적인 취향이 아니라, 평민적·시정적(市井的) 취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언진이 중국의 이런 속문학서(俗文學書)의 언어를 자신의 시어로 구사한 것은, 사대부 문학이 아니라 호동의 문학을 자각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제82수 참조〕

 

 


2) 호동거실의 내용적·주제적 특징

 


첫째, 호동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다. 호동은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서민들의 삶을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털보, 곰보, 혹부리, 청계천 광통교로 물구경 가는 사람들 등 ‘호동거실’에는 호동에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서정적 열전’(抒情的 列傳)이 담겨 있다. 〔제67수 참조〕

 


둘째, 사대부 계급에 대한 날선 비판과 야유를 보여준다. 이언진은 비주류, 주변부의 인간으로서, 주류 계급이라 할 사대부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사대부들은 무능한데 부귀를 누리는 반면, 하층 출신의 인간들은 유능한데도 사회적으로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에 깊은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제104수 참조〕

 


셋째, 시인 자신의 내면초상(內面肖像)을 다양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즉 『호동거실』에는 시인의 자기서사(自己敍事)에 해당하는 시들이 아주 많다. 시인은 이 자기서사를 통해 스스로를 응시하거나 위로하고 있다고 보인다. 〔제111수 참조〕

 


넷째,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 및 신분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담겨 있다. 이언진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조선이 국시(國是)로 삼고 있는 주자학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으며, 이단 사상인 양명학(陽明學)으로 주자학을 대체시키고 있다. 골목길 사람들은 모두 성인(聖人)이라거나, 골목길 사람 누구에게나 양지(良知=양심)가 있으니 그 모두가 성인과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대체함으로써,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반역의 사상가 이탁오를 극찬한 이는 조선 사람 중 오직 이언진 한 사람이다. 〔제19수, 제95수 참조〕

 


다섯째, 유불도(儒佛道) 3교를 공히 인정함으로써 다원적 사회를 모색했다. 『호동거실』에서는 유교=양명학과 나란히 불교와 도교가 똑같이 긍정되고 있다. 이언진은 유교만이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을 배격했으며, 유불도의 공존과 회통(會通)을 통해 진리가 추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특정 사상의 배타적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유로운 사유를 전개하면서 새로운 진리 구성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제120수 참조〕

 


『골목길 나의 집』의 성과


(1) 호동거실의 제 이름을 찾고 그 가치를 인정하다.

 


이제껏 모든 연구자들은 ‘호동거실’을 ‘동호거실’이라고 불러 왔으나, ‘동호거실’이라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호동거실은 이언진의 문집에 실려 있는 백수십 수의 연작시로서, 이언진의 대표작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를 하나의 시집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으나, 그 규모로 볼때 문집에서 분리해 하나의 시집으로 봐야 한다.

 


(2) 철저한 고증과 판본 비교를 통해 최초로 완역하다.

 


이언진의 유고집으로는 1860년에 나온 두 가지 간본이 전하는데, 그 하나는 역관인 김석준 등이 엮은 《송목관집》이다. 여기에는 ‘호동거실’의 시들이 대거 산삭되고 고작 20수만이 실려 있다. 내용의 불온성 내지 과격성으로 대부분 산삭되고 겨우 몇 수만이 소개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간본은 이언진의 집안에서 간행한 《송목관신여고》다. 여기에 수록되 ‘호동거실’은 총 157수인데 오류가 적지 않고 배열도 얽혀 있다.

 


이 두 간본과는 별도로, 간본보다 앞선 시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이 연세대 도서관과 고려대 도서실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연세대본인 《송목각시고》는 《송목관신여고》의 ‘호동거실’ 시의 편수와 배열순서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고려대본인 《송목각유고》는 ‘호동거실’의 시가 165수 실려 있는데, 이 책에만 보이는 작품이 13작품이고, 이 13작품의 경우 그 각각에 ‘산거(刪去)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 체제를 도끼로 부숴 버리고 싶으며, 강호의 녹림객들과 결교하고 싶다고 하거나 조선 국왕과 관리를 원수로 간주해 저주하면서 조선의 지배구조, 조선의 수탈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시도 있는데, 이들 시는 그 반체제성과 과격성 때문에 유고집에서는 탈락된 게 아닐까 추정된다. (판본 비교는 이 책과 동시 출간되는 『저항과 아만』 470쪽 부록 참조.)

 

 


지금까지의 ‘호동거실’에 대한 모든 논의는 《송목관신여고》에 실린 것을 텍스트로 삼아 이루어졌기에, 이 때문에 착오가 없지 않았다. 이번에 펴낸 두 종의 책은 저자가 새로 발견한 《송목각유고》에 실린 ‘호동거실’을 텍스트로 삼되 《송목관신여고》에만 보이는 5작품을 보충해 넣었다. 그 결과 이 책에 수록된 ‘호동거실’은 총 170수이다.

 



(3) ‘호동거실’ 전체를 분석·조망함으로써 전방위적인 이언진 평가를 해내다.

 


이 시집에 대한 연구는 그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번의 경우처럼 ‘호동거실’ 전체를 완역하고 연구한 경우는 이제껏 없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서들은 완역의 바탕 없이 특징적인 몇 수만으로 이언진의 연구가 이루어지다 보니, ‘근대’, ‘중세적 가치와 이념의 부정’ 등만을 오로지하여 연구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전체 시의 문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해낸 것에 불과하다. (이언진의 생애는 이 책의 부록 ‘이언진 연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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