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중한 만남을 기다리며


박 귀 경
(감정평가사 제5회시험 합격·보상법규 최고득점자)

 

 


1. PROLOGUE


가슴에 부딪혀오는 모든 것에 우린 진실해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만남을 위해 가슴을 녹이는 간절함속에서 내게 부딪혀오는 모든것들 앞에 우린 진실해야 한다. 삶은 한시적인 것이다. 만남의 시간들이 약속되어 있지 않는 그 순간속에서 우리의 소중한 만남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만남의 의미가 때로는 설레임으로, 때로는 외면으로, 때로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으로 남을지라도 우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일어서야 한다.

 

 

기다림으로 살아온 우리는 삶을 태우는 고독속에서 때로는 한숨으로 기다려야하고, 때로는 눈물로 기다려야하고, 때로는 적막한 밤 고요한 등을 바라보고 기다려야만 한다.

 

 

하얀 목련이 활짝 핀 하늘을 밟으시며 오실지, 무더운 여름 쏟아지는 빗물처럼 내리시며 오실지, 국화꽃 향내로 물든 그윽한 들녘을 지나시며 오실지, 겨울밤 하얀 눈꽃처럼 사뿐히 나리시며 오실지 예측할 수 없는 그 만남이 기다림에 지친 우리를 울리고 만다.

 

 

우리는 술잔을 들며 울고, 별을 붙잡고 울고, 강물에 애절한 우리의 가슴을 던져 놓은 채 그 소중한 만남을 기다리며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우린 살이 찢기우는 아픔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하늘이 가슴에 닿아버리는 슬픔으로 눈물을 헤며, 삶이 아픔을 더해오더라도 우린 그 소중한 만남을 찾아 길을 가야했다.

 

 

만남을 기다리며 배워버린 진실을 안고 하늘과 땅 어느곳이라도 찾아가야 했다. 만남으로, 만남으로 이어져온 생명,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가지자. 진정으로 진실을 다하고 그 앞에 머리 숙여도 만남의 의미가 바래지고, 우리가 기다리던 그 소중한 만남이 아닐때 우린 결코 돌아서야만 한다.

 

 

뚫어진 가슴을 메우고 허탈해져버린 삶을 가지런히해서 내게 다가올 그 소중한 만남을 위해 가슴을 열자. 아픔을 누린만큼 그 만남앞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설수 있는 것이다. 무한대로 흘러내려오는 정(情)의 물결을 내 소중한 그 만남 앞에 끝없이 부어야 한다.

 

 

만남을 기다리며 눈물을 배웠고, 만남을 기다리며 진실을 배웠고, 만남을 기다리며 영원한 사랑을 우린 배워왔다.

 

 

내가 人生에 대해 조금 눈 뜨고, 鑑定評價士라는 資格試驗을 준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내 가슴속에 간직해 온 김복용님의 詩로써, 삶이 고달프고 그 고달파진 삶속에서 孤獨해져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소중한 만남」은 1994년 11월 30일 최연소합격·법규과목 수석이라는 화려한 Title로 기다림에 지친 나를 울렸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감히 여러분 앞에서 짧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던 나름대로의 受驗生活을 그려감과 동시에 얼마나 열심히 그 소중한 만남을 향해 달려왔는지 또다시 시작된 또다른 소중한 만남을 위해 달려가는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밤을 새워 과거로의 旅行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지금쯤 學院街나 考試院 주변은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과의 외로운 투쟁에 밤 새는 줄 모를텐데, 저는 벌써 그때를 많이 잊어버렸기때문에 노량진 考試院에서 혼자 두 주먹 불끈 쥐고 밤새웠던 그때로 돌아가려 합니다.

 

 

지금 좀 나태해진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모르는게 많았던 나였기에 모든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2. 비장한 각오의 FRESHMAN

나는 살고싶다. 물고기가 바다를 만나 활개치며 뛰어놀듯이 나도 내 일을하며 열심히 살고 싶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나는 제2의 탄생을 맞이했다. 이제 눈 뜨고 잠자던 과거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제2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때부터 나는 내의지로 살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이것이다.’ 하면 밀어부치는 것이다, 무식하다할 정도로. 그러나 대학입학전까지 나는 인생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꿈(희망)을 크게 가지라는데 나는 큰 꿈도 없었다. 충실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는 재수를 하고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 대학 입학조차 축하받지 못하는 결과로 다가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속에서 진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단지 공부만을 얘기하는 것이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4년이란 기간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4년 동안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것이다.’ 라는 각오로 전투를 준비하는 병사처럼 비장했다.

 

 

3. SOPHOMORE

비장했던 각오는 ‘오데로’ 가고 나는 현실을 한탄하며 질퍽대고 있었다. 그래도 학과공부나 주말에 아르바이트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퇴근후에 자기발전을 위해 학원을 다니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시던 11년 터울진 오빠와 항상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던 과학기술대학에 다니던 학상이의 모습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삶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긴급 가족회의가 있었다. 가족들의 한결같은 물음은 ‘너 뭘 하며 살래?’ 였다. 정말 황당했다. 매사 ‘열심히’, ‘적극적’만 강조하던 나는 성격상 노는데도 열심이었고, 졸업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빠는 수험정보지를 주시며, 잘 선택하라고 하셨다. 나이차이가 많이나는 언니, 오빠는 당신들의 사회경험을 토대로 우리막내의 보다 나은 사회생활을 위해 이젠 준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공인회계사, 공인 노무사, 변리사등등 자격시험들의 이모저모를 따져보고 ‘鑑定評價士’로 결정했다.

 

 

 

물론 과친구의 아버님이 감정관련기관에 계셔서 조언을 구했고, 가족들과 특히 오빠랑 의논해서. 90년부터 시행되었고, 출장이 많다는 점, 특히 여자 평가사가 적다는 점에 내가 한번 남자들과 겨뤄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시작부터 철저히! 나는 각 학원의 설명회에 참석하여 합격자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각 과목의 수험방법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들었다. 수험생활전 합격자들의 체험담은 이길에 깜깜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다소 거리가 먼 신림동 S학원은 방학동안 다니기로 하고, 노량진 N학원은 개강후에 다니기로 했다. 노는것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망년회를 즐겼으며, 12월 31일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밝아오는 새날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정말 내 길이라고 생각되는 감정평가사를 향해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4. 내 소중한 만남을 준비하는 JUNIOR


92년 1월 이제 결정이 났으니 나는 한시가 급했다. 나의 계획은 6개월 동안 1차를 해서 합격하고 1년정도 2차 준비하여 재학중에 자격증을 따야겠다는 것이었다. 먼저 2개월 과정의 이론반을 신청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2개월동안 87학번 예비역 선배랑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아침 10시까지 학원에 도착해 오후 6시까지 공부하고 오후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11시. 진도 나간 부분만큼 문제 풀고 2시 반경에 잠을 잤다.

 

 

이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신림동 S학원에서 관계법규를 강의 하시던 손성태 선생님과의 만남 때문에. 수업시간 도중 그분의 어린시절 동자승 생활과 오늘의 그분이 있기까지의 생활자세등의 진솔한 얘기는 나를 감동시켜, 그 날 나는 감동의 전율에 잠도 못이뤘다. 지금도 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듯 하고, 모든 세포들이 살고싶다고 아우성치는 듯한 삶의 욕망으로 며칠밤을 새웠던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다.

 

 

 

3월달이 되어 학교가 개강하면서 노량진 N학원에서 경제·회계 문제반을 수강하여 객관식 시험준비를 했다. 우리과의 조직인 동그라미의 조직원 주영, 혜영, 영숙, 수연, 보영언니는 항상 서로 도와가며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이때 또 잊을수없는 것은 지하철1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널때. 강의가 끝나고 학원을 향해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한강을 오고가던 나는 창너머로 비치는 강물과 야경을 보며 꼭 합격하리라 다짐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의 복잡함과, 지독한 땀냄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케하기에 충분했다. 집 으로 돌아오면 온 가족은 지친 나를 기다렸고, 오빠는 늘 용기를 주시고, 엄마는 책상옆에서 새우잠을 주무셨다.

 

 

 

마흔이 다되서 나를 낳으신 엄마는 매사 내게 엄하지 못하셨고 나의 아픔이나 고생을 나누려 애쓰셨다. 내가 나중에 고시원에서 공부하기로 한것은 체질에도 맞지만, 엄마의 마음고생을 덜어주고 싶었다. 보지 않으면 그래도 낫겠지. 1차 시험을 보러 가던 날 한참가다 뒤돌아 보았을때 두손모아 기도하던 엄마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과에서도 TOP을 하여 엄마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곧 바로 학원에 등록하였지만 2차에 대해서 말 그대로 맛도 못보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비록 준비는 부족하지만 주어진 기회를 마다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지금도 1차만 준비했더라도 꼭 시험장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험장 분위기 파악도 할겸. 나는 이제 다음 단계로 내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했다.

 

 


5. 좌절하는 SENIOR


4학년이 되면서 학교나 학원이나 모두 바빠졌다. 과 친구들이 취업설명회를 찾아다니거나, 영어학원에 열심히 다닐때, 나는 머지않은 나의 합격을 기원하며 도서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2차는 도무지 내가 어느정도 알고 있는지 감이 안왔다. 그렇게 답답해 하던중 노량진 N학원의 그룹 STUDY 모집은 깜깜한 바다의 등대와 같았다. 재학생이라는 이유로 면담에서 거절당했던 나는 무작정 매일 나가서 선생님들께 매달렸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STUDY그룹의 강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의 실력을 어느정도 감 잡을수 있다는 것인데 3기 선배님들이 직접 지도까지 해주시고 무료였기 때문에 나는 이또한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STUDY 팀장 선생님들은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 되어주셨다. 이분들과의 만남 또한 소중한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4월 한달동안의 교생실습은 내게 있어 많은 갈등을 안겨 주었다. 원래부터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 나는 이것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학원에서 부기를, 주말에는 과외를 지도했던 것도 돈벌이보다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해서 한 것이었다. 명성여고 2부에서의 한달간의 교생실습.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그들에게 자신감과 신념을 키워주기 위해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또한 지루한 수험생활에서 조금은 떠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퇴근 후 동네 독서실에 자리를 잡았는데 엄마나 오빠가 데리러 왔을 때는 항상 자고 있었다. 제대로 되가는 건지 정말 암담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졸업전에 교원자격증, 감정평가사 자격증, 공인중개사 자격증, 운전면허라는 4가지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버리지 않았다. 교생실습을 무사히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이제 시간이 없었다. 모의고사를 봐보니, 아는 게 없었다. 기말고사를 일주일간 꼬박새워 치루고, 나는 노량진 고시원으로 향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마음만 급하고 정신없었다. 혼자 있다보니 공부보다는 근심걱정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때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STUDY팀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대학도서관에 나가서 조급한 마음을 서로 위로받으며 보내는 바람에 오고 가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다른 사람과 너무 비교하다보니 마음만 급해 계획대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 잠시의 위안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후회스럽다. ‘몇명 뽑을까? 누가 출제위원일까?’ 이게 왜그리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지 이것 예측하다가 볼일 다봤다. 지금도 가끔 그런 수험생을 볼때면 과거의 나를 보는듯 해 공부에 더 열중하라고 얘기하지만 그들도 겪어야 이해할려나 좀처럼 듣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날짜는 가고 시험당일이 되었다. 나는 착찹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향했다. 예상했던 문제가 나왔는데도 나는 침착하지 못하고 덤벙댔다. 실무문제에서 계산기를 잘못 두들겨 값이 잘못나오자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안타까와서 고시원으로 돌아와 옥상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완벽한 답안을 쓸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러나 팀원들이랑 맞춰보니 그런대로 점수가 나올 것 같았다. 일단 발표때까지 잊자.

 

 

 

9월이 되자 졸업논문 준비와 제7회 공인중개사 시험준비에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발표날짜가 다가왔다.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그날 따라 날씨는 얼마나 추운지 하루종일 고민하다 가방을 싸고 대전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어렸을 적 나의 외삼촌은 늘 따뜻했고 존경스러웠기 때문에 외삼촌댁으로 향했다. 계룡산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아무것도 모르시는 외삼촌·외숙모는 과수석으로 졸업하게 된 것과 곧 합격자 발표가 날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 가슴은 더욱더 아팠다.

 

 

일주일 정도를 방안에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했으나 결론은 뻔했다. 다시 해야한다. 나는 한다면 한다. 다시 공부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컸다. 부모님은 다시 공부하는 것보다 내가 괴로와하는 모습에 더욱 반대하셨다. 계속한다고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오빠의 설득으로 교직자리를 알아보고, 교직생활을 하면서 공부하기로 1차 협상을 보았다. 이력서를 써들고 안다는 사람은 다찾아 다녔건만 자존심 상하는 일 뿐이었다. 다 포기하고 기업체 원서를 내기도 했으나 당장 나오라는데도 없었고 적극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한달동안 뛰어다닌것이 전화위복이되어 다시 공부하는데 에너지가 될줄 알고 부모님과 오빠의 계획된 각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과 오빠는 내가 이것도 저것도 안되니까 그 공부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력서를 냈으니 교직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1·2차 동시에 준비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노량진 고시원으로 향했다. 물론 제7회 공인중개사 시험에는 합격했다. 친구 주영이의 삼성취업소식은 더욱 나를 긴장시켰다.

 

 

 


6. 기다림에 지친 나를 울린 [내 소중한 만남]

 


1) ‘다시’가 아닌 ‘처음’하는 기분으로 ...

 

다시 공부하는데 있어 나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많은 교수님들, 선배님들과 의논했다. 모두들 지금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내 의지가 약한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내가 할 자신이 있느냐였다. 더욱 교직자리가 나서 면접을 보고 확정된 상태에서 나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고시원에서 돌아와 꼬박 24시간만 고민하기로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인생에 있어서는 누가 잘 살았는지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늙어서 아니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다. 주어진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정해졌다. 가족들도 이젠 힘이되어 주셨다.
더위 탄다고 고시원 가까이에서 방을 얻어 공무원시험준비를 하던 친구네집에 소형냉장고를 사주시고, 더운여름 하루에 2개씩 도시락을 싸다주신 언니, 나를 믿어주신 가족들의 사랑으로 나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1·2월엔 꼬박 고시원에서 살았다. 1차는 학원에 등록해 놓고 그 시간에 미진한 이론과 문제풀이를 했다. 수업도중 나는 귀로 듣고, 눈으로 문제를 보며, 손으로 푸느라고 정신없었다. 하루 3시간 이 수업시간을 빼고는 2차 공부에 전념했다. 특히 자신감이 없던 보상법규에 치중해서 SUB-NOTE를 만들어 나갔다. 보상법규가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나니 1차시험에 계산기를 지참한다는 소문에 쉴틈도 없이 1차에 비중을 더 두어야했다. 3·4월엔 이론과 법규를 일주일씩 교대로 공부하고 실무는 이틀에 한번씩 실제 시험처럼 풀었다. 그리고 하루중 가장 지겨울때 1차객관식 문제를 풀었다.

 

 

 

나는 수험기간내내 ‘나는 수험생이지 채점자도 교수도 아니다.’ 라는 것을 몇번이나 다짐했다. 2차

 

시험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어느 문제가 나올 것인가 하는 추측

 

을 하기보다는 진지한 자세로 모든 부분을 공부하고, 논란이 있는 학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결

 

론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하자, 그래도 안된다면 이건 내길이 아닐 것

 

이다.’ 학창시절 시험하루전 내일 전쟁나기를 바라거나, 내가 알고 있는 문제만 나오기를 간절히 기

 

도하던 과거의 내가 아니다. 5월달이 되면서 나는 더욱 빡빡한 계획을 세웠다. 사실 나는 수험전반

 

적 계획부터 시작해서 한달, 한주, 하루, 한시간까지 지킬수 없는 계획을 세운다. 나는 계획을 세울

 

때 가슴이뛴다. 금방이라도 골인할것같은 마라토너처럼. 이대로만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물

 

론 다 지킬수 없지만, 계획대로 할려고 이리 저리 뛰다보면 결승점이 보인다. 지금도 계획을 세우며

 

산다. 계획에 매달려 살아가는 나는 이상하게도 행복하다. 6월에는 1차 걱정때문에 2차가 영 손에 안잡

 

혀서, 매달 나오는 부동산고시 내용들을 다 모아서 실무문제 풀고, 시사적인 문제들을 골라보았다. 보상법규에서는 CASE문제들을 좀 정리하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 시원한 한여름 소나기를 보면서 1차시험을 치뤘다.

 

 


2)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
오빠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렇다 적어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험에 임해야 한다. 마지막 박차를 가해야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고시원근처 H학원의 자습실을 이용했다. 학원생만 이용할 수 있었으나, 검사하는 아저씨는 늘 나를 무사통과시켜 주셨다.

 

 

 

시험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긴장했고, 그런 긴장으로 밤을 새울때면 내 몸은 지치지만 나는 더욱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같이 공부하던 언니가 1차에서 떨어져 나는 무척이나 흔들렸다. 같이 꼭 같이 합격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험 2주전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새언니의 유산. 모두들 내게 숨기려고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방황했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꼭 합격하는것 뿐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나는 더욱 열심히 해야했다. 이 모든것이 나를 더욱 채찍질했고, 나는 힘든줄 몰랐다. 하루를 3등분해서 3과목을 다 본다는 건 좀 무리였다. 나는 하루종일 혼자 시험보고 부족한 부분은 SUB-NOTE를 봤다. SUB-NOTE를 만들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1·2차 동시에 준비하는 사람은 그 짧은 기간 압축된 내용을 복습해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적어도 자신감이 생기니까. SUB-NOTE내용은 다 아는듯. 무더운 여름은 나를 자습실에 있게 했고, 언니가 싸다준 도시락 덕분에 나는 하루종일 자습실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냉방병이 걸렸다. 여러분도 건강관리 유의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 나는 아침일찍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차분히 시험에 임했고, 좀 아쉬운 부분도 있었으나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이었다. 하루종일 시험장밖에서 기다리는 STUDY팀장 선생님들과 4기에 합격한 선배님들은 많은 힘이되어 주셨다. ‘나도 내년엔 저 나무 그늘아래서 감정평가업계를 얘기해야지.’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고 우리는 원없이 놀았다. 9월경엔 형부가 ‘제3회 주택관리사’ 공부를 하시겠단다. 단조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형부와 몇분들에게 회계와 민법을 도와드리면서 나도 접수해서 공부했다. 다행히 우리 모두 합격했고, 나는 이일로 발표까지의 긴 기다림을 참을 수 있었다. 발표날짜 즈음해서 매일 그 초조함이란 말로 형언할 수 조차없다.
드디어 발표의 순간. 협회에 근무하던 4기 선배님인 김정민씨가 전화로 19명중의 하나라고 알려 주었을때.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긴 기다림에 지친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7. EPILOGUE


정말 두서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그리고 솔직히 써내려갔습니다. 사실 저는 다가오는 시련은 모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고, 될 수 있으면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삽니다. 저는 이글을 쓰면서 새삼 많은 것을 느낍니다. 처음 시험준비를 할땐 합격후 정말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현재 좀 나태해진 저의 모습과 너무 고마우신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것을 전하지 못한점 때문에.

 

 

항상 칭찬을 아끼시던 아버지(합격후 아버진 처음으로 많은 칭찬을 하셨다), 항상 막내 걱정하다 이제 안심이 된다는 어머니, 항상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언니·오빠, 도시락 반찬 만들어 주시느라 애쓰신 새언니. 특히 지금도 나의 모든 일에 의논상대가 되어주시는 민주적인 오빠. 때로는 엄마에게 지독한 오빠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끝까지 용기와 조언을 주시고, 믿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감동의 손성태선생님, 수험기간 중 한결같이 생각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던 STUDY 팀장님, 세종대학교 심동석·김주호·김중길·최 관 교수님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쯤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을 STUDY팀 동지들의 합격을 기원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감정평가사 특히 여자로서 극복해야 할 난관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상 [적극적 사고, 전문가 정신, 감사철학] 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또 다른 소중한 만남을 위해서…

 


8. 공부방법


1) 1차 시험

 

객관식 시험요령은 무조건 많은 문제를 푸는데 있다. 처음 가볍게 이론을 보고 공부한 이론이 어떻게 문제화 되는지 풀어보면서 미진한 부분은 복습한다. 그다음은 문제를 많이 풀어 봐야 한다. 특히 이시험은 시간 배정이 중요하니 자주 문제를 풀어 속도를 내야한다.
★민 법 : 권용우 객관식문제집과 조병욱 총칙, 물권법 문제집
★관계법규 : 손성태관계법규, 임호정문제집
★회 계 학 : 이효익회계학연습
★경 제 학 : 김대식외 2인공저 경제학원론, 이근식경제학 문제집
사실상 교재는 시내 대형서점에 가서 어떤 교재를 골라도 별반 차이가 없을것같다. 여하튼 잊지말라, 문제를 많이 풀면 합격한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 2차시험

 

주관식 시험에다 교재선택에는 어려움이 있는 우리 시험에서 2차 시험은 처음 시작할 때 정말 미칠지경일 것이다. 먼저 어느 교재든 한권이라고 제대로 볼것을 권하고 싶다. 그 다음에 다른 교재들을 보며 중복된 부분은 복습하는 셈치고 특이한 부분은 따로 정리하든지 해라.

 

그리고 이설 저설에 흔들리지 마라. 나름대로 결론 내리고 넘어가라. 끝장을 보려고 한다면 시험 끝

 

난다. 그리고 몇 명 뽑을까, 누가 출제위원일까 추측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마라.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고, 찍은 문제를 쓰고도 떨어지는데 그저 ‘나는 수험생이다’ 하고 최선을 다해 써보고 또 써보는

 

연습을 하라. 한문을 안 써도 된다는 말에 현혹되지 마라. ‘이왕이면 다홍치마’ 만전을 기해야 하므

 

로 목차정도는 한문으로 쓰는 성실성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보상법규 : 행정법을 다 공부한다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관련용어를 행정법책 색인표를 찾아가며 해라. 하다보면 관련 행정법은 다보게 된다. SUB-NOTE작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논란이 되는 부분은 정리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특히 1·2차동시 준비생은 필요하다고 본다.

 

 

★ 감정평가이론 : 한 교재라도 정독해서 보고 문제별로 정리하다 보면 SUB-NOTE가 된다.
가장 쉬운 것 같지만 범위가 방대해 어디서 나올지 모르고, 점수 차별화가 어렵기 때문에 고득점하기 위해서는 평소 폭넓게 공부하고 나름대로의 목차구성도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 감정평가실무 : 게으른 사람에겐 괴로운 과목이다. 매일 매일 풀어보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문제를 받아서 전체 흐름을 감지해야 한다. 한문제 한 문제 풀 때 애정을 갖고 풀어라. 절대 풀이를 보지 말고. 그리고

 

실제 시험에서 꼭 끝까지 풀어라. 틀린 것 같다고 중도 포기하지 마라. 시중에 나와 있는 문제가 많지 않으니 반복해서 풀다가 문제를 외워버리는 경우가 없도록 주의해라.

 

그리고 무엇보다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라. 그러다 보면 합격여부보다 공부가 재미있어진다.
공부방법은 사람마다 얼굴·개성이 다르듯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참고만 하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면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