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권력’이 되어버린 영어, ‘서열의 유동화’에 주목하다
『한국인과 영어』는 한국의 서열문화와 더불어 벌어지고 있는 ‘영어 전쟁’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개화기를 시작으로 2014년까지 영어 공부의 역사를 살펴보며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어 열풍’에 대해 저자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 지자’고 말한다. 더불어 그간 학벌, 서열, 경쟁을 비판하면서 학벌과 서열을 깨거나 없앨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서열 미화’와 ‘서열 타파’라는 양극단의 주장을 넘어서 ‘서열 유동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머리말 한국인의 영어 전쟁 ㆍ5
제1장 영어는 처음부터 ‘권력’이었다 : 개화기~일제강점기
1816년 최초의 영어 교육 ㆍ17 김대건, 최한기, 개신교 선교사들 ㆍ19 ‘영어 천재’ 윤치호 ㆍ22 1883년 보빙사 미국 파견 ㆍ23 알렌·아펜젤러·언더우드의 입국 ㆍ26 육영공원·배재학당·이화학당 개교 ㆍ28 1888년 주미 한국공관 설립 ㆍ31 영어로 출세한 이하영과 이완용 ㆍ33 배재학당의 영어 교육 ㆍ35 ‘영어의 달인’ 이승만 ㆍ37 출세 도구로서의 영어 ㆍ39 『대한매일신보』의 활약 ㆍ43 이상설의 영어와 이완용의 영어 ㆍ44 ‘삼인칭’의 뜻을 알게 된 양주동의 ‘미칠 듯한 기쁨’ ㆍ46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영문란 설치 ㆍ48 “이제 영어 모르면 패배자됩니다” ㆍ50 사교권 장악 수단으로서의 영어 ㆍ52 진주만 폭격 이후 영어는 복음의 소리 ㆍ53
제2장 영어는 ‘시대정신’이었다 : 해방 정국~1950년대
해방 정국의 공용어가 된 영어 ㆍ59 ‘통역정치’의 전성시대 ㆍ61 영어는 최대의 생존 무기 ㆍ64 ‘사바사바’의 성행 ㆍ66 6·25전쟁과 영어 ㆍ67 ‘샌프란시스코’는 마력적인 상징 ㆍ70 미국 지향성은 시대정신 ㆍ72 AFKN과 YMCA의 활약 ㆍ75
제3장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 1960~1980년대
미군과 영어로 통해야 권력을 잡는다 ㆍ79 “조국을 버린 자들”? ㆍ81 수출 전쟁 체제하에서의 영어 ㆍ84 박정희의 ‘문화적 민족주의’ ㆍ87 1970년대의 ‘조기 영어 교육’ 논쟁 ㆍ89 “빠를수록 좋다” VS “주체적 인간” ㆍ90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 ㆍ92
제4장 세계화 시대에 영어 광풍이 불다 : 1990년대
‘영어 격차’의 소외감 ㆍ99 조기 유학 붐 ㆍ102 〈톰과 제리〉논쟁 ㆍ104 국제화 바람 ㆍ106 어머니 90퍼센트가 찬성한 조기 영어 교육 ㆍ108 세계화 바람 ㆍ111 ‘카투사 고시’와 ‘토익 신드롬’ ㆍ114 ‘바람난 조기 영어 교육’ ㆍ117 “이대 신방과 94학번들이 절반도 안 남은 까닭은” ㆍ119 세계화의 파국적 결과 ㆍ121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 ㆍ123 박노자의 ‘영어 공용화론의 망상’ ㆍ125 기업이 선도한 ‘영어 열풍’ ㆍ126
제5장 “한국에서 영어는 국가적 종교다” : 2000~2002년
“토플과 토익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 ㆍ133 “영어 하나만 제대로 배워오면 성공이지요” ㆍ135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 ㆍ137 ‘영어 자본-영어 권력 시대’ ㆍ139 영어와 대중문화 ㆍ141 “영어! 영어! 영어!……요람에서 무덤까지 ‘영어 스트레스’” ㆍ144 ‘영어 열풍 이렇게 본다’ ㆍ147 영어 시장은 연간 4~5조 원 규모 ㆍ149 “한국 영어 배우기 국가적 종교방불” ㆍ151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ㆍ154 토익 산업의 팽창 ㆍ155
제6장 영어, 정치와 유착하다 : 2003~2007년
영어캠프·영어마을 붐 ㆍ149 거리로까지 뛰쳐나간 영어 ㆍ163 ‘대한민국은 그들의 천국인가?’ ㆍ166 ‘영어가 권력이다’ ㆍ169 ‘2006, 대한민국 영어 보고서’ ㆍ171 ‘영어 인증 시험 열풍’ ㆍ173 계속되는 ‘토플 대란’ ㆍ176 ‘영어에 홀린 한국’ ㆍ178 ‘스파르타식 학원 성황’ ㆍ181 ‘영어 사교육 부추기는 빗나간 대선 공약’ ㆍ183
제7장 ‘영어 망국론’이 등장하다 : 2008~2014년
영어로 회의하는 ‘뚱딴지’ 서초구청 ㆍ189 “영어 잘하면 군대 안 간다” ㆍ191 ‘오렌지와 아린지’ 파동 ㆍ194 ‘신해철’인가, ‘박진영’인가 ㆍ196 영어 몰입교육 파동 ㆍ198 ‘영어 망국론’ ㆍ200 “한국에선 영어가 ‘종교’나 다름없죠” ㆍ202 ‘영어에 미친 나라’ ㆍ205 ‘복지 예산 깎아 영어 교육’ ㆍ208 “영어가 입에 붙은‘아륀지 정권’” ㆍ210 “영어에 ‘고문’ 당하는 사회” ㆍ212 ‘토익 계급사회’ ㆍ215 ‘공포 마케팅’과 ‘탐욕 마케팅’ ㆍ218 ‘근본적 개선 방안’이 존재할 수 있는가? ㆍ221
맺는말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지자 (이 부분만 읽으면 된다.)
근본적 개선 방안은 있을 수 없다! ㆍ225 ‘이웃 효과’와 ‘서열주의’ ㆍ228 ‘영어 광풍’의 기회비용 ㆍ230 “영어 교육, 진보의 콤플렉스를 깨라” ㆍ233 ‘SKY 소수 정예화’는 안 되는가? ㆍ235 진보적 근본주의자들의 보수주의 ㆍ237 삼성 입사 경쟁이 치열해지면 안 되는가? ㆍ239 ‘학벌 공정거래법’은 안 되는가? ㆍ241 학벌주의를 긍정하는 언론의 보도 프레임 ㆍ243 학벌만 좋은 ‘천민 엘리트’ ㆍ246 진정한 경쟁을 위해 ㆍ249
주 ㆍ253
이중언어 뇌 연구와 한국인의 ‘영어 뇌’
장하원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STS 전공〉
홍성욱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STS 전공, 신경인문학 연구회 대표〉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는 영어 열풍이 불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영어 뇌, 영어 활성화 세포, 영어 신경망이라는 단어부터 시작해서, 뇌에서 언어를 처리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보다 효율적인 영어 학습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 뇌에 무의식적인 각인을 유도하는 자극법을 통해 영어를 습득하도록 돕는 학습 컨텐츠, 영어 실력을 평가하기 위한 뇌파 검사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검사 등 영어 학습을 뇌 개발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담론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만들어지며, 이에 기초하는 실천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과학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이중언어 뇌(bilingual brain) 연구를 통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부터, 이렇게 생산된 결과물이 과학자 사회를 벗어나 다른 사회 영역들을 지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담론과 실천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가 볼 것이다.
차이의 구성: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
영어 실력 향상을 뇌 개발로 이해하는 담론이 이렇게 확산된 데에는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지만, 지난 2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뇌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양전자 단층 촬영(PET)이나 fMRI와 같이 뇌의 해부학적 구조가 아닌 뇌의 활동 모습과 기능을 보여 주는 기능적 뇌 영상 기술이 개발되면서 인간의 인지 과정과 연관된 신경학적 기반을 찾는 연구가 훨씬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 등과 관련된 다양한 심리학적 문제들이 새로운 뇌 영상 기술을 기반으로 연구되고 있다. 언어심리학의 연구 문제들을 푸는 데에도 인지심리학, 언어철학 등의 이론뿐 아니라, 다양한 뇌 영상 기술을 활용하여 뇌의 활동을 관찰한 결과들이 점점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중언어 구사자(bilingual) 또는 다중언어 구사자(multilingual)는 모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모국어(1차 언어)와 외국어(2차 언어)의 표상과 처리가 동일한 대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다른 대뇌 영역에서 처리되는지에 대해서는 심리학, 언어학, 교육학, 의학 등의 다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여러 이론을 제기해 왔다.
가장 중심적인 초기 가설은 모국어와 외국어가 서로 다른 뇌 영역에서 처리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실어증 환자들에 대한 관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실어증이 생긴 이중언어 구사자에게서 한 언어에 대해서만 기능이 저하되는 것이 관찰되었고, 이러한 환자들이 언어 기능을 회복할 때는 각 언어별로 회복 속도와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각 언어마다 서로 다른 대뇌 영역이 관여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Albert and Obler 1978; Paradis 1995; 조재민 외 2009).
이에 더해, 이중언어 구사자의 뇌에 직접적으로 전기적 자극을 가하는 실험에서 특정한 언어 능력만이 영향을 받는다거나(Ojemann and Whitaker 1978; Ojemann 1983; 조재민 외 2009), 신경외과적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특정 언어에 대해서만 기능 이상을 보이는(Gomez-Tortosa et al. 1995) 등 직접적인 뇌 자극과 뇌의 구조적 변화에 의해 특정한 언어의 처리 능력만 달라지는 현상들이 관찰되면서 언어별로 다른 뇌 부위가 관여한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이러한 주장은 1990년대에 들어 이중언어 뇌 연구 분야에서도 fMRI나 PET 등의 기능적 뇌 영상 기술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정상인’의 뇌 활동에 대한 관찰 결과를 근거로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기능적 뇌 영상 기술이 처음 활용될 당시에는 시각 등의 감각 경험이나 신체적 동작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운동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이 활발히 연구되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언어 구사나 기억 등의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을 수행할 때 활성화 되는 뇌의 부위를 찾는 시도가 늘어났다.
특히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fMRI는 조영제를 투여할 필요가 없고, 알려진 위험이 없으며, 반복 연구가 가능하여 이를 활용한 이중언어 뇌 연구의 실험 대상이 뇌 병변 환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즉, 보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뇌가 실험실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뇌 영상 기술이 도출해 내는 뇌 영상은 뇌과학자들에게 있어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집약해서 나타낼 수 있는 통계적 가치를 지닌 이미지이자, 대중들에게 ‘뇌 속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설득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매력적인 이미지였다(Beaulieu, 2002).
초기에 이루어진 fMRI를 활용한 이중언어 뇌 연구들에서는 대부분 언어를 습득하는 시기(age of acquisition)에 따라 피질의 활성화에 다른 패턴이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fMRI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Dehaene et al. 1997; Kim et al. 1997; Yetkin et al. 1996 등). 이 중 가장 많이 인용된 연구인 김(Kim) 등의 연구1)에서 실험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실험 결과가 어떻게 해석되는지 살펴보면,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early bilingual)’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late bilingual)’ 그리고 이들의 뇌 영상이 보이는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fMRI를 이용한 실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실험 대상자와 관찰할 뇌 부위인 관심 영역[region of interest(ROI)]을 지정하고, 연구 가설에 맞는 fMRI 실험 패러다임과 자극(stimuli)을 구성하는 것이다. 김 등은 언어 표현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과 언어 이해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는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을 ROI로 지정하고, 12명의 이중언어 구사자를 피험자로 모집했다.
A부터 L까지 12개의 알파벳 문자로 지칭되는 피험자들은 23세부터 38세 사이에 있는, 오른손 또는 양손잡이 남성 8명과 여성 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A부터 F까지 6명의 피험자는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가 모국어인데, 11.2(±1.5)세에 2차 언어에 처음 노출되었고, 19.2(±4.1)세에 회화적 유창성(conversational fluency)을 획득한 사람들이며, G부터 L까지의 피험자는 모국어와 외국어에 노출된 시기가 같은 사람들로 터키어/영어, 영어/스페인어, 중국어/영어 등으로 짝 지어진 두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연구자들은 전자를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late bilingual)’로, 후자를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early bilingual)’로 구분하여 지칭했다.
이렇게 fMRI 실험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갖는 수많은 특성들 중 모국어 및 2차 언어의 종류, 언어 습득 시기, 피험자의 나이 및 성별,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손 등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만이 추출되었다. 이 중 연구 가설에서 시험하고자 하는 2차 언어의 습득 시기를 평균 11.2(±1.5)세로 일정하게 맞추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에 대해서는 해당 연구자 사회 내에서 차이가 없다고 인정할 만큼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하나, 즉 2차 언어의 습득 시기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12명의 사람들은 2차 언어의 습득 시기가 빠른 피험자와 늦은 피험자, 즉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가 되었다.
김 등은 이렇게 6명의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6명의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가 소리를 내지 않고 문장을 생각해 내는 작업(silent sentence-generation task)을 수행하는 동안에 활성화 되는 뇌 영역을 fMRI로 관찰했다. 일반적으로 fMRI 실험은 원통형의 자장 안에 피험자가 들어가 가만히 누운 상태로 작은 스크린에 제시되는 영상이나 글귀 또는 헤드폰을 통해 제공되는 소리와 같은 fMRI 자극을 접하면서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동안에 뇌 작용의 변화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사용되는 BOLD(blood oxygen level dependent) fMRI 기법은 신경 활동의 변화에 따라 해당 뇌 부위의 혈류량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전제로, 혈중 산화 헤모글로빈의 양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정도로부터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 된 영상을 얻어 낸다. 이때, 특정한 인지 과정을 수행하는 동안에 발생하는 변화를 잘 잡아내기 위해서는 피험자의 머리나 몸의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가적인 뇌 활성을 줄여야 한다. 이 때문에 fMRI 실험 패러다임 하에서 피험자가 수행하는 작업은 단순히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과정으로만 이루어지거나, 자신의 판단 결과에 해당하는 버튼을 누름으로써 의사를 표시하도록 짜여진다.
이러한 fMRI의 특성을 고려하여 김 등이 피험자에게 수행하도록 한 작업은 특정 언어를 지정하는 지시문에 이어서 나오는 아침, 오후, 저녁에 해당하는 삽화를 보고 전날의 해당 시점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해당 언어를 사용해서 마음속으로 말하는 것(internal speech)이었다. 즉, 마음속으로 문장을 생각하는 일이 언어 구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작업으로 선택되었다.
피험자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 fMRI를 통해 산출된 뇌 활성 이미지를 관찰한 결과,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경우 브로카 영역에서 1차 언어와 2차 언어가 처리되는 뇌 영역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나타난 반면([그림 1] 참고),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경우 1차 언어와 2차 언어가 거의 동일한 브로카 영역에서 처리되었다. 베르니케 영역의 경우에는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 모두에게서 1차 언어와 2차 언어를 처리하는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를 보여 주는 데이터로 [그림 1]과 같은 대표적인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인 피험자 A의 브로카 영역에 대한 뇌 영상을 비롯하여, 이 피험자의 베르니케 영역에 대한 뇌 영상,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 6명의 뇌 영상 중 활성화가 일어난 부분의 복셀(voxel)만을 선택적으로 보여 주는([그림 1]의 상자 부분과 같이) 그림, 대표적인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인 피험자 G의 브로카 영역에 대한 뇌 영상, 그리고 모든 피험자의 뇌 활성화 영역과 정도가 수치로 표시된 표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데이터들을 통해 김 등의 연구자들은 언어의 습득 시기가 브로카 영역의 기능적 조직(functional organization)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갓난아기일 때 특정 언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과정에서 기능적으로 조직된 브로카 영역의 일부 부위는 이후에 변형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어른이 된 후에 습득한 2차 언어의 경우 이 부위가 아닌 주변부 피질 영역을 동원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림 1] 김 등의 연구에서 후기 이중언어 구사 피험자의 브로카 영역의 뇌 영상으로 제시된 그림 뇌 영상 중 특히 활성화 되는 복셀 부분만을 확대하고, 모국어로 작업을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붉은색으로, 2차 언어에 대해서는 노란색으로 표시해서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Kim et al., 1997).
이러한 연구 결과에 반대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처리하는 뇌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논문들도 속속 게재되었다(Klein et al. 1999; Chee et al. 1999; Hasegawa et al. 2002 등). 또한 언어 처리의 과정에서 동원되는 뇌의 영역은 언어 습득 시기뿐만 아니라 언어의 유창성(language proficiency), 언어에의 노출(language exposure) 등 복잡하게 얽혀 있는 원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김 등과 같이 언어 습득 시기만을 언어별로 관장하는 뇌 영역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의 원인으로 꼽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었다(Sakai 2005). 또한, 연구자별로 fMRI 실험을 구성하는 방식이 상이한 데서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Vingerhoets et al. 2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등의 연구는 여러 연구자들,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널리 인용되었다(조재민 외 2009; 이승복 외 2004; 이승복 외 2002; 김재진 외 2001 등). 한국의 연구자들은 김 등의 연구는 물론, fMRI를 활용해서 이루어지는 이중언어 뇌 연구들과 기존의 언어심리학, 언어철학의 이론들을 참고하여 유사한 이중언어 뇌 실험들을 설계하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시험한 결과를 해석해 내고 발표했다. 이렇게 이중언어 뇌에 대한 연구 전통, 새롭게 도입된 fMRI 기술로부터 도출되는 실험 과정의 특수성, 뇌 영상 형태의 데이터 표현 방식이 높이 평가 받을 수 있는 과학자 사회의 가치 체계 속에서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확산되었다.
문제의 구성: 영어 습득 시기의 문제
김 등의 연구는 태아 동영상 서비스 및 온라인 영어 태교 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베베콤(bebecom)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영어 태교 서비스’ 란에서 ‘미국 메모리얼 슬로운 캐더링 암 센터(Memorial Sloan-Kettering Cancer Center, NY)의 실험’으로 소개되었다. 김 등의 논문에 제시된 이미지와 설명은 과학적 논문의 장을 벗어나, 산모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라는 다른 사회적 맥락에 놓이면서 다른 지식과 담론으로 생성된다.
이곳에서 연구를 하는 김효승 박사는 사람의 뇌는 어떻게 여러 가지 언어를 배우게 되고, 언제 배워야 효과가 있는지를 연구한 끝에 흥미로운 결과를 알게 되었다. 12세 이전에 제2 외국어를 배운 경우와 12세 이후에 제2 외국어를 배운 사람이 사용하는 뇌 영역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즉, 어릴 때 제2 외국어를 배운 경우는 모국어 영역과 활성화 부위가 같고 12살 이후에 배운 경우는 뇌에서도 모국어와 제2 외국어의 영역이 확실히 분리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럼 뇌의 영역이 분리되는 시점은 언제이냐?라는 의문에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많지만, 실험 결과상 12살 이전에 제2 외국어를 배우면, 이미 아이들의 뇌에는 제2 외국어가 아니라 모국어로 인식이 되어 입력이 된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결론이라고 했다.2)
베베콤 사이트의 일면에 제시된 이와 같은 설명에서 김 등의 연구 결과는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뇌에서 1차 언어와 2차 언어가 표상되는 영역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로부터 ‘제2 외국어를 언제 배워야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가 2차 언어를 처음 접한 평균 나이였던 11.2세라는 실험 조건은 제2 외국어가 모국어로써 인식되어 뇌에 입력될 수 있는 한계 나이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과학적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었는데, 사용된 과학적 이미지는 김 등의 논문에서 제시된 이미지들 중 대표적인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인 피험자 G의 브로카 영역에 대한 영상과 대표적인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인 피험자 A의 브로카 영역에 대한 영상이 나란히 제시되었다([그림 2] 참고).
여기서,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뇌 영상은 논문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뇌 영상은 피험자 A의 뇌에서 모국어인 영어와 2차 언어인 프랑스어가 표상되었던 영역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꽂음으로써 각 언어 처리 영역의 분리를 좀 더 가시적으로 표시했다. 또한, 성조기와 태극기는 영어와 한국어 처리 영역의 분리를 의미함으로써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주요 고객인 한국인 부모의 주의를 끌도록 만들어졌고, 그림 아래의 캡션은 12세 이전과 이후를 강조함으로써 12세 이후에 영어를 배울 경우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다른 뇌 영역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을 돕는다. 즉, 김 등의 연구 결과는 12세 이전에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문제를 강조하는 데 활용된 것이다.
[그림 2] 베베콤 사이트에 제시된 언어 표상 영역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 Kim et al.(1997)에 제시된 이미지들 중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피험자 G)의 브로커 영역에 대한 이미지(왼쪽)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피험자 A)의 브로커 영역에 대한 이미지(오른쪽)가 제시되었다.
김 등의 연구 결과 및 함의에 대한 소개에 더해, 베베콤에서는 인간의 뇌와 언어 처리 영역을 컴퓨터 및 폴더로 비유함으로써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을 좀 더 쉽게 제시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더욱 구체화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컴퓨터로 비유를 하면, 파일을 열려고 할 때 여러 폴더에 저장해 놓은 것을 열려면 시간이 걸리고 능률도 떨어진다. 하지만 한 폴더에 저장해 놓은 것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인 것과 같다. 뇌는 제2 외국어를 언제 배우느냐에 따라 저장된 영역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영어를 배운 아이들은 발음도 원어민 같고 술술 대화를 하는 반면, 나중에 배운 아이들은 발음도 딱딱하고, 영어 인사말 하나 말하기도 힘들어 하는 이유를 뇌 과학으로 증명한 것이다.3)
언어를 표상하는 뇌의 영역을 컴퓨터 폴더로, 각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폴더에 저장된 파일을 여는 일로 비유함으로써,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뇌에서 모국어와 외국어가 표상되는 영역이 겹치는 ‘현상’이 컴퓨터 폴더 내지는 언어가 저장되는 영역이라는 ‘실체’로 물질화(materialization) 되었다. 현대를 사는 일반인들이 흔히 접하는 컴퓨터와 폴더에 대한 유비를 통해, 이 설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두 언어를 처리하는 뇌의 영역이 동일할 때의 효율성을 체감하는 효과를 유도했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뇌의 기능, 즉 혈중 산소 농도의 상대적인 우위가 임의의 색상으로 표시되어 만들어진 뇌 활성화 영상이 언어를 저장하는 뇌 영역이라는 물리적인 실체처럼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과학자 사회에서는 그것이 갖는 통계적인 가치 때문에 활용되는 뇌 영상이 대중의 영역에서는 마치 정신 상태의 물리적 형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Beaulieu, 2005).
다소 새로운 의미로 구성된 과학적 이미지와 연구 결과에 대한 설명 및 유비는 긴 내러티브를 이루는 하나의 조각이다. 베베콤은 ‘당신의 아이는 이미 천재입니다’라는 모토 아래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교육 방법을 안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이며, 주요 고객층은 산모와 갓 태어난 아기를 둔 어머니이기 때문에 김 등의 연구 결과는 영어 태교 및 0세부터 3세까지의 조기 이중언어 교육을 정당화 하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우선, 태아와 신생아의 뇌 발달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이 시기에 적절한 뇌 발달을 유도하는 것이 아이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이중언어 발달은 특히 0세부터 3세 사이에 이루어져야 모국어와 동등한 정도로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을 소개한다. 이때, 태아기와 유아기에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거한 ‘학습’과는 구분되는, 유전적·생물학적 요소에 의한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습득’ 과정이다.
이렇게 학습과 구분되는 습득의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태아와 신생아도 충분히 외국어 능력을 체득할 수 있는 상태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체득이야말로 ‘내재적 언어 습득 장치’를 통해 언어 능력을 근본적으로 기르는 과정임을 주장하고 있다([표 1] 참고).
[표 1] 베베콤에 제시된 학습과 습득의 구분
학습 | 습득 |
---|---|
의식적 과정 |
무의식적 과정 |
언어에 관하여 알고 있음 |
언어를 알고 있음 |
의식적인 언어 지식 있음 |
무의식적인 언어 지식을 갖고 있음 |
규칙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음 |
규칙을 의식적으로 모르고 있으나, 어감이나 느낌으로 비문과 적문을 구분할 수 있음 |
공식적인 정식 교육 학습 |
자연적인 학습, 비공식적 학습 |
환경, 경험적 영향이 중요 |
유전적, 생물학적 요소가 중요 |
내재적 언어 습득 장치가 꼭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음 |
내재적 언어 습득 장치가 있어야 함 |
이러한 구분에 이어 등장하는 김 등의 연구는 태어날 때부터 외국어를 접한 사람과 12세 이후에 외국어를 접한 사람을 비교해서 보여 주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로써, 12세 이후에 영어를 접하면 자연적인 습득이 아닌 의식적인 학습으로만 영어 능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영어와 한국어를 관장하는 영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이후, 임신 16주부터 청각기관이 형성되는 태아는 생후 9개월까지 소리를 들으며 뇌에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다는 ‘사운드 코딩(sound coding) 이론’에 의거해, 아기의 사운드 코딩 데이터베이스를 확장시켜주기 위한 영어 태교는 ‘특별한 아기를 위한 현명한 엄마의 선택’이라고 강조되며, 베베콤이 제공하는 영어 태교 프로그램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김 등의 이중언어 뇌 연구를 비롯한 뇌과학, 심리학 분야의 연구들은 베베콤의 영어 태교와 조기 이중언어 교육 프로그램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인지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써 기능했다. 즉, 조기 이중언어 교육과 영어 태교를 지지하는 맥락 속에서는 김 등의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 연구 결과들이 영어 습득 시기를 문제 삼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영역에서 생산된 언어 처리에 대한 뇌과학 지식이 광고와 같은 대중적 영역에서 새로운 내러티브에 포함되면서 내용이 변형(transformation)되는 과정은 과학적 지식이 갖는 의미와 가치가 과학 전문가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특히, 광고는 과학의 영역에서 생산된 특정한 설명이 일반 대중들과 만나는 장소로,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collective imagination)을 형성해 내며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라고 볼 수 있다(Pitrelli et al., 2006; Fishman, 2004).
대중의 과학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PUS)]를 바라보는 관점 중 기존의 결핍 모델(deficit model)에서는 광고 등의 미디어에서 과학적인 내용을 다룰 때 과학적 정보를 부정확하게 제시함으로써 과학 지식의 왜곡(distortion)이 일어난다고 치부했던 데 반해(Gregory and Miller 1998), 의사소통적 모델(communicative model)에서는 과학 전문가와 미디어, 일반 대중의 인식론적인 역할을 보다 평등한 관계로 두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과 그것이 갖는 힘이 구성된다고 본다(Yearly 2000; Wynne 1995). 물론 이 과정에서 전문적 지식이 해당 과학자 사회라는 국한된 장소에서 일차적으로 생산되고 이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렇게 생산된 지식이 바로 ‘사실’의 지위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이 대면하는 것은 관계와 맥락이 없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맞닥뜨렸을 때 개개인의 경험과 상황을 토대로 사실로써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세계 속의 사실(facts-in-the-world)’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베베콤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광고라는 맥락에서 재구성된 사실들은 이중언어 뇌에 대한 과학 지식이 광고주라는 단일 주체의 상업적 전략을 위해 사용되는 과정에서 단순히 왜곡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영어 태교 및 조기 영어 교육과 연관된 사업주, 산모, 태아 및 갓난아기 등을 포함하는 대중 영역의 행위자들이 과학자들과 함께 형성해 낸 특정한 이중언어 뇌 지식 또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실천의 구성: 영어 뇌 만들기
문제가 구성되면 그와 관련된 조정과 실천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단순히 과학 지식을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써 제시되는 전문적 지식을 참조하여 새로운 인간 범주, 즉 객관적 자아를 상정하고, 여기에 맞춰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objective self-fashioning)을 거치게 된다(Dumit 1997). 뇌과학자들의 이중언어 뇌 연구에서 제시되는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차이에 대한 사실이나, 베베콤 사이트에 제시된 이중언어 교육에 관한 설명을 접하고 이에 동의하게 된 개인은, 그러한 전문적 지식에 맞춰 새로운 정체성, 더 나은 인간 범주를 구성하고, 이를 향하는 실천에 참여하게 된다.
베베콤 사이트에서는 다양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에 기반하여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인 엄마들에게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안내한다고 말한다. 베베콤은 태아의 두뇌 발달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에 근거해서 엄선한 영어 동요, 영어 태담, 영어 동화 등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함께, 각 주별로 태아의 뇌 발달 과정을 학습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로써 임산부가 태아의 발달 과정을 이해한 상태에서 인터넷을 통해 프로그램에 맞춰 효율적으로 영어 태교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찬가지로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베베콤에서 제시하는 영어 조기 교육 프로그램을 따를 것을 추천하는데, 이는 각 시기별로 정리한 아이의 발달 과정에 대한 정보와 함께 나란히 제공되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주체로 행동하기 어려운 태아와 신생아를 대신하여, 이들의 엄마들이 과학적, 객관적으로 제시된 더 나은 인간 범주에 맞춰 아이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중언어 뇌 연구의 가상 커뮤니티(virtual community)는 베베콤과 같은 산모나 영유아의 부모라는 비교적 제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넘어 TV와 같이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작용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통해 확장된다. 2008년 10월 4일 저녁 7시에 방영된 〈과학 카페〉의 서브 코너로 마련된 〈영어의 과학: 뇌를 알면 영어가 보인다〉는 영어와 뇌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조기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방영되었다.4)
이 방송은 2008년 당시 일부 초등학교에서 영어 몰입 교육이 시행되는 등 세계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이자 경쟁력으로써 영어 실력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실태를 소개하면서, 학원가와 여러 학습 서적들에서 제시하는 ‘영어 뇌’, 즉 우리 머릿속에 영어를 잘하게 만드는 뇌의 영역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질문으로 삼는다.
특히, 이 영어 뇌는 토플과 같은 시험 성적이 아닌, ‘실질적인 영어 실력’인 의사소통 능력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강조되는데, 이는 토플 시험 응시자 수와 평균 점수 모두 국제적으로 상위권을 차지하는 우리나라가 실제로는 영어 의사소통이 가장 어려운 나라로 꼽히고 있는 상황을 꼬집어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영어 회화에 어려움을 겪는 개인들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최근 들어 출판된 영어 교육 서적들 중 다수가 영어 뇌를 만들라는 주문을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어 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밝히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서는 김 등의 연구와 유사한 실험을 재연한다. 실험 대상자는 8살 때부터 3년 정도 미국 생활을 한 뒤 외국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 1명과 대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해서 영어 능력을 키운 남학생 1명으로 구성되었고, 두 피험자의 영어 유창도는 유사했다. 이들이 fMRI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이어, 한국어와 영어의 단어나 문장으로 이루어진 fMRI 자극의 예시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실험 결과로는 [그림 3]과 같은 이미지와 함께, 두 피험자 모두 브로카 영역이 활성화되지만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인 남학생에게서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는 추론이 없이 저장된 영어 단어를 바로 끌어내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일치하지만,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는 영어를 바로 이해했다기보다는 추론을 통해 이해하고 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더 많은 뇌 활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김 등의 연구와 유사한 형태의 실험은 실제로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 주었으며, 이에 따르면 비슷한 유창성을 갖더라도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보다는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가 훨씬 즉각적이고 쉽게 영어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 방영 내용은 언어 습득 시기의 차이에 따라 실제 유창성에는 차이가 없더라도 영어 단어나 문장을 읽거나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뇌의 영역에는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이고, 이를 통해 조기에 영어를 접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뇌의 차원에서 더 높은 영어 실력, 즉 더 효율적인 영어 처리 기제를 갖는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후반부로 갈수록 영어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시점에 대한 결정적인 실험 증거는 아직 없다고 말하면서, 결국 얼마나 더 잘하느냐가 활동하는 뇌의 영역을 결정하며 이러한 영어 실력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어 교육 전문가인 데이비드 김은 뇌가 활발히 형성되는 시기에 언어를 배우는 것이 유리하긴 하지만 개인의 열정과 자신감이 언어를 배우는 데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5) 또한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남기춘 교수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뇌가 변화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뇌의 변화 속도를 높일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게 되면 뇌가 변화가 되는 거예요. (···) 어떤 방법은 그 변화를 더 빨리 가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방법은 상대적으로 좀 느릴 수 있는 거죠.6) 그런 걸로 보면 외국어 학습에 따라서 변화하는 뇌를 척도로 삼아서, 좋은 학습법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영어 실력은 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와 직결되고, 이것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습득 시기뿐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노력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영어 회화 능력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개개인은 효율적인 영어 뇌를 갖는 객관적 자아의 모습을 각자 실현해야 하는 행위자로서 구성되었다.
양육되는 뇌와 뇌 결정론
요컨대, 이중언어 뇌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는 과학자 사회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차이, 그리고 이들의 뇌 영상과 이에 대한 해석이라는 뇌과학 지식은 광고 및 TV라는 대중 미디어의 맥락에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으로 변환되면서 특정한 문제와 실천을 만들어 냈다. 영어 태교와 조기 이중언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러티브 속에서, 태아 및 신생아의 영어 습득 과정은 이후의 학습 과정과는 차별되는 생물학적, 유전적 기제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체득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면서 외국어 습득의 시기를 문제화했다.
또한, 국제화 시대의 경쟁력인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불어닥친 영어 열풍 속에서 영어 뇌 담론을 해석해 내는 TV 프로그램의 맥락에서는, 제대로 된 영어 실력은 토플 점수가 아닌 의사소통 능력으로, 그리고 그것은 영어 유창성이라는 현상적 차원을 넘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문제로 구성되었다. 결국 이러한 영어 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조기 이중언어 교육을 포함하여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과학에서 만들어진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의 차이가 언어 습득 시기의 문제와 영어 뇌 만들기라는 실천으로 구성되는 과정 속에서, 뇌와 영어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 또는 인과관계는 점점 더 강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김 등은 논문을 통해 6명의 조기 이중언어 구사자와 6명의 후기 이중언어 구사자가 갖는 속성들 중 유일한 차별적 요소인 2차 언어에의 노출 시기의 빠르고 늦음이 차별적인 뇌 영상 결과와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연결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추측과 해설이 덧붙으면서 언어 습득 시기와 뇌의 활성화 차이의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뇌과학자 사회 내에서는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뇌 영상과 과학적 주장이 조기 이중언어 교육을 강조하는 맥락에 놓이면서 언어 습득 시기의 차이는 ‘원인’으로, 영어 실력의 차이, 더 정확하게는 유창성과 같이 겉으로 보이는 실력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도 영어를 구사할 때 뇌 활성화 패턴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능력 및 효율성의 차이는 ‘결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사회에서 영어 회화 능력의 문제는 영어 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담론과 실천으로 개개인에게 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어 실력은 영어 뇌라는 물리적 실체로부터 나온다는 담론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뇌 결정론(brain determinism) 또는 신경 결정론(neuro-determinism)은 강화된 셈이다. 유전자 정보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그 발현만이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유전자의 경우와 달리, 뇌의 경우에는 가소성(plasticity)이 있음이 여러 연구들을 통해 밝혀지면서, 뇌과학에서는 물리학이나 화학에서와 같은 결정론적인 법칙보다는 외부 환경적 요소를 고려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Illes and Racine 2005).
그러나 뇌 가소성에 대한 연구들이 뇌의 구조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을 해소하며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변화하는 뇌의 모습을 강조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글의 사례에서처럼 뇌 가소성이라는 특징이 영어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식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특히, 유전자와는 달리 뇌는 질병과 건강 문제를 넘어 인간의 능력과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른 행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면서, 신경 활동은 유전자 정보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Roskies 2007).
이 가운데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도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뇌의 구조와 기능이 영어 구사를 비롯한 고차원적인 인지 과정이나 행동과 끈끈하게 연결되는 과정에서 뇌 결정론, 즉 뇌 구조와 인간의 능력 사이의 인과관계가 더욱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 뇌는 인간 모두가 지니는 생물학적 실체로써, 뇌를 양육하는 것은 언어 능력을 신장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인식되었다. 오래 지속된 자연(nature) 대 양육(nurture)의 논쟁 구도와 달리(Pinker 2004; Rorty 2004 참조) 뇌는 ‘양육될 수 있는 자연’으로써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양육’되며 변화하지만, 동시에 이로부터 만들어진 뇌는 물리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자연’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결정짓는 근원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생물학 분야의 연구 결과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넘어, 이렇게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뇌라는 대상이 언제나 가장 자연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뇌과학 지식이 인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설명을 제공한다고 간주되는 세태를 이해하고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뇌는 양육될 수 있는 대상이자 양육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써, 뇌과학 지식은 개개인으로부터 특정한 실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내면서 영어 뇌 담론과 영어 뇌 만들기 실천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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