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수는 보존과 수호를 뜻한다.
보수라는 말은, 그러나, 대상이 무엇인지 가리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말이 쓰이는 상황에 따라 잇고 감싸는 대상이 결정된다.
이 점이 잊혀지면, 논의에서 혼란과 오류가 나온다.


2. 사회적 차원에서 보수의 대상은 특정 사회의 이념과 체제다.
우리 사회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잇고
감싸는 태도와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3. 1980년대 이전의 러시아와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선
전체주의 이념과 명령 경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를 잇고
감싼 태도와 사람들이 보수라 불렀다.
즉 보수는 한 사회에 현존하는 질서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지닌 태도의 복합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4.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수를 보수라 부르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념과 체제를 따르지 않고 다른 이념과
체제로 대치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보라 부르는 데서
나온다. 비록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관행은 분명히 문제적이다.


5. 먼저, 한 사회의 이념과 체제를 크게 바꾸거나
아예 다른 것들로 대치하려는 태도는, 즉 보수의 대척적 존재는,
진보라고 불릴 수 없다.
그것은 '대체'나 '변혁'이라 불려야 한다.
진보의 역은 퇴보임을 떠올리면,
이 점이 또렷해진다.


6. 다음엔, 보수와 진보를 대립시키는
관행엔 숨겨진 편향이 있다.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바뀌며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
이어져야 하는 현실 속에서, 보수라는 말보다는 진보라는
말이 훨씬 좋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자연히, 보수와 진보를 대립시키는 관행은
근본적 수준에서 논의를 뒤틀리게 한다.


7. 이념을 논의할 때, 우리는 모든 이념들을 어떤 기준에 따라
하나의 스펙트럼에 배열하고 양쪽이 대체로 대칭적이라 여긴다.
학문적 논의에선 이런 관행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특정 사회의 맥락에서 이념을 다루게 되면,
이런 대칭은 무너진다.
어떤 사회든 특정 이념을 자신의 구성 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 원리가 된 이념은 정설(orthodoxy)의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이념들은 모두 이설(heterodoxy)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기구들은 정설과 이설 사이의 비대칭을 공식화하고
강화한다.


8.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정설은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우른 개념이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자유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며
개인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는 되도록 작아야 한다는 이념이다.
즉 자유주의는 사회적 강제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민들 전체가 권력을 가진다는 이념이다.
그런 권력이 쓰일 목적에 대해서느 즉 사회적 강제의 내용에 관해선,
그것은 얘기하는 바가 적다.
따라서 그것은 인민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사회구조와 의사결정 절차에
관한 이념이다.

 

-출처: 복거일,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기파랑, p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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