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어 판 서문 (3~6쪽)
세월이 흐르면 책은 늙거나 아니면 반대로 제2의 청춘을 살기도 한다. 곰팡이가 슬거나 구운 지 오래된 빵처럼 말라비틀어지는가 하면 면모를 일신하고 다시 각이 날카로워져 새로운 차원을 전면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 운명에 저자들은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의 운명을 겪는 책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어떤 가치를 부여받게 될지(주관적 운명)는 숙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모든 작업은 책이 씌어지는 그 때에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이 책 『천 개의 고원』(1980)은 『안티-오이디푸스』(1972)의 속편이다. 하지만 두 책은 객관적으로 완전히 다른 운명을 겪었다. 분명 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 68 운동의 영향력이 느껴지던 격동기에 씌어졌다면 아무래도 『천 개의 고원』은 물결이 잠잠해지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시기에 나왔던 것이다. 『천 개의 고원』은 우리 두 사람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반응이 미지근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어머니가 천덕꾸러기 자식을 특별히 더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안티-오이디푸스』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성공은 한층 더 큰 좌절로 이어졌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엄마-아빠”가 정신분석, 정신의학, 심지어는 반(反)정신의학, 문학 비평, 그리고 사유에 관해 만들어질 수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 속에서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초래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박살낼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68에 대한 반동은 아직도 오이디푸스가 얼마나 강고하게 가족 안에 남아 있는지를, 그리고 정신분석과 문학과 온갖 사유 속에 유년기의 슬픔이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는 아주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천 개의 고원』은 우리에게, 최소한 우리에게는 외견상의 실패와는 달리 일보 전진을 가져다주었으며 미지의 영역, 오이디푸스로서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자세히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다보고 만 영역들을 말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세 가지 주제는 아래와 같다.
1)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처럼 기능한다(따라서 재현이 아니라 생산이 문제이다).
2) 세계와 세계사 속에는 사방에서 환각과 소설이 넘쳐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혀 가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종, 부족, 대륙, 문화, 사회적 지위 등을 끊임없이 망상한다).
3) 보편사는 존재하지만 이것은 우발성의 역사이다
(역사의 대상인 흐름들이 원시적 코드를 넘어, 전제군주적 덧코드화를 넘어,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를 넘어 독립적인 흐름들의 연합을 가능하게 해주듯이 말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는 칸트적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는데, 아마 이 책을 무의식 차원에서의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에 고유한 종합을 규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역사는 이러한 종합을 실현하는 흐름들이고, 오이디푸스란 모든 역사적 생산을 기만하고 있는 “피할 도리가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했다.
『천 개의 고원』은 이와 달리 칸트 이후의(나아가 단호한 반헤겔적) 시도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구성주의적”이다. 따라서 다양체 이론이 그 자체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하다는 것이 어떻게 실사(實辭)의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반면에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아직도 다양체를 종합 속에서만 그리고 무의식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고찰했었다.
『천 개의 고원』에 들어 있는 늑대 인간에 대한 주해(「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에서 우리는 정신분석과 고별하면서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다양체들은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며, 결코 총체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 속에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일 뿐이다. 다양체들의 주요 특징은 독자성이라는 다양체의 요소들, 되기의 방식인 다양체의 관계들, <이것임>(즉 주체 없는 개체화)이라는 다양체의 사건들, 매끈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다양체의 시-공간, 다양체의 현실화 모델인(나무형 모델과 반대되는) 리좀, 고원들을 형성하는 다양체의 조성판(연속적인 강렬함의 지대들), 그리고 고원을 가로지르고 영토들과 탈영토화의 단계들을 형성하는 벡터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러한 우발성의 보편사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만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만남은 어디서 또 어떻게 생겨났는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처럼 원시-야만-문명이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이 책에서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형성물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즉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주변부에서 줄지어 “최후”의 목표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원시적 집단. 이와 달리 중앙 집권화 과정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의 집합(국가 장치)을 형성하고 있는 전제적 공동체. 오직 국가에 맞설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유목민의 전쟁 기계(국가는 처음에는 자신 안에 속하지 않는 전쟁 기계를 내부로 포섭한다). 국가 장치나 전쟁 장치 속에서 완성되는 주체화 과정. 자본주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국가들 속에서의 이러한 과정의 통합. 혁명적 행동 방식의 양식들.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영토, 대지 그리고 탈영토화라는 요인들.
리토르넬로를 보면 어떻게 이 세 가지 요인들이 자유롭게, 즉 미학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리토르넬로는 소규모 영토에서 울려나오는 가곡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새의 노래로 구성되는가, 사납게 울부짖고 미친 듯이 노여워하는 대지의 거대한 노래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대기의 강력한 화음과 우주의 목소리들로 구성되는가? 우리는 이 『천 개의 고원』이 이처럼 서로 다른 고원에 속한 노래들이 전부 합쳐 만들어내는 리토르넬로가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철학 또한 자그마한 가곡부터 가장 힘있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그저 우주적인 서창의 일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외치면서 노래한다. 그리고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침, 즉 개념들을 에둘러 가서 진짜 노래가 될 수 있는 외침들이다.
1. 서론: 리좀(11쪽)
실바노 부소티
2. 1914-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59쪽)
흔적들의 들판 혹은 늑대의 선
15. 결론: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9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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