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제갈량>이 페미니즘 작품인 단 한 가지 이유[기고] 서울대 총문학연구회

  • 대학신문
  • 승인 2016.09.04 07:46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현재 연재 중인 좋은 웹툰들은 넘쳐난다. 


대중적인 작품 몇 개만 간단하게 꼽아봐도 ‘병맛’에서 이말년 이후 최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레바의 <레바툰>, 


이 시대의 청춘 리얼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이자혜의 <미지의 세계>나 기안84의 <복학왕>, 새로운 무협웹툰의 경지를 써나가고 있는 류기운/문정후의 <고수>, 그동안 전무했던 ‘상큼발랄’한 19금 개그 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일권의 <스퍼맨>, 대하 SF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양영순의 <덴마> 등 좋은 작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김달의 <여자 제갈량>이 특별한 이유는 한 번 읽고 ‘재밌다’며 슥 넘어가게 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읽고 나서도 계속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게, 특히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게 되는 이유는 <여자 제갈량>이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이며, 그것을 감정적으로 소모하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참신하게 그러나 어색하지는 않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삼국지를 활용해 친숙하지만 그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의미 있는 부분들을 끈질기게 발굴해낸다. 이에 따라 독자는 자연스럽게 공감하면서도 새롭게 만나는 지점들에 턱턱 멈춰 서서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여자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 중 그렇게 의미 있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여자 제갈량>을 추천하는 글은 많이 봐왔지만, 그 매력에 대해 깊게 들어가서 평해주는 글은 없었다. ‘재밌다’ 이상으로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은 금방 끝나지도 않을 뿐더러 대개 재미가 없으니까 이해는 한다. 그나마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은 「여자 제갈량, 혹은 조롱의 울분」(http://herimo.tistory.com/169, 이하 「조롱의 울분」)이라는 글이었다. 이 작품과 관련해 읽었던 글 중 가장 깊고 상당히 날카로웠으며, 고맙게도 적절하게 헛발질을 해줘서 내가 할 말도 있게 만들어 줬다. 이 글은 결국 「조롱의 울분」에 대한 내 대답이다. 그러니 위 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좋다.

 



여성, 아니 ‘인간’




<여자 제갈량>은 'TS물'(등장인물의 성별을 바꾸는 작품)이다. TS물은 대개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려진다. 여러 성인물을 차치하더라도, 삼국지를 패러디한 또 다른 웹툰인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도 제갈량은 여자로 나오는데 <여자 제갈량>과는 달리 여자라고 해서 달라지는 내용은 거의 없다. 조운이 제갈량에 반한 설정에서 나오는 자잘한 개그 포인트가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은 제갈량일 뿐이고, 여성적인 특성은 오직 풍만한 가슴과 골반, 그리고 잘록한 허리로써만 강조된다.




하지만 <여자 제갈량>에서는 다르다. 실제 인물을 여성으로 전환하면서 여성을 단순히 욕망의 대상 혹은 패러디의 대상으로써 배치해놓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여성이라는 한 ‘인간’을 역사 속에 새롭게 끼워 넣고 그로 인한 변화들을 주목하고 있다. <여자 제갈량>이 다른 삼국지 2차 창작물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원작보다도 더 생생한 캐릭터들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단순히 성별을 바꾸고 육체를 부각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여자들은 ‘인간’이 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여자들은 단순한 대상, 즉 ‘여자’ ‘성적 대상물’ 혹은 '피해자' 등으로 뭉뚱그려 치환되지 않는다. 그들은 할리우드식 여성(남성에게 사랑받는 것만이 목표인 여성)이 아닌 인물들로서 각자의 욕망을 제각기 지니고 그것을 추구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하나 등장하는 작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등장한다. 영화에서 여성의 수동성을 평가할 때 자주 쓰이는 ‘벡델 테스트’ 따위는 씹어 먹을 정도다.




<여자 제갈량>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억압받았던 여성들을 그리면서 단순히 성별 역전만을 논할 뿐 아니라, 여성 외에도 성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당했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환관은 철저히 주체에서 소외된 존재들로서, 대부분의 경우 몇 가지 고정된 특질들을 가진 ‘대상’으로서만 존재해왔다. 십상시를 ‘주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여자 제갈량>에서는 이런 편견들을 깨고 환관이었던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 그의 내면까지도 깊숙이 다룬다. 이외에도 작품 전체에 걸쳐 레즈비언, 첩실, 서자 등 그동안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온갖 캐릭터들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 힘이 미처 자라지 못한 채 길들어 버린”?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은 그런 생생한 여성 주체들이 남성지배적인 권위구조 내에서 지속적으로 ‘대상화’ 당하는 수모를 겪고 결국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다. 「조롱의 울분」의 글쓴이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이 작품을 과연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페미니즘을 “젠더 평등 사회로 향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회운동이나 이론”이라고 말할 때, 주인공들이 가능성을 성취하지 못하고 끝내 몰락하고야 마는 내용인 <여자 제갈량>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인물들이 실패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여자 제갈량>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인정한다면 그 순간 ‘변화’를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정의 자체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침내 글쓴이는 <여자 제갈량>을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으며, 뼈아프지만 이 작품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글쓴이는 우울한 현실을 패러디할 때 “적의 논리를 조롱하기 위해 적의 논리를 반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패러디가 실패하면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이를 “우울의 패러디, 패러디의 우울”로 지칭하며 이 실패를 <여자 제갈량>이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지목한다. 그리하여 글쓴이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발명하려는 제갈량과 <여자 제갈량>의 실패는 곽가의 죽음이 보여주듯 이미 노정”돼 “이미 그 끝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결국 <여자 제갈량>은 “그 힘이 자라지 못한 채 길들어 버린 이야기”라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나는 여기서 「조롱의 울분」 글쓴이와 견해가 완전히 갈린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여자 제갈량>은 명백히 페미니즘 작품이다. 또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는 패러디의 실패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않으며, 글쓴이의 허무주의적 결론에도 맹렬히 반대한다.

 



몰락하지만 패배하지 않는




글쓴이가 말한 “페미니즘이란 젠더 평등 사회로 향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회운동이나 이론을 의미한다”는 문장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작품은 젠더 평등 사회로 향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글쓴이는 이 질문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그렇다”고 전제하고선 결론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작품 내적으로 젠더 평등 사회로 가는 가능성이 나타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페미니즘 작품이란 무엇인가? 페미니즘 작품이란 결국 여성이, 혹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성적으로 억압받는 어떤 인간이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들의 ‘성공 가능성’ 따위는 사실 페미니즘 작품을 가르는 선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작품 내에서 페미니즘의 목표가 그렇게 쉽게 성취돼 버린다면 그것은 페미니즘 ‘작품’이 아니라 페미니즘 ‘선전물’에 불과할 것이다. 이상화된 세상을, 성공적인 인물을 그리지 않아도 좋다. 세상이 무너지고 인물이 실패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주체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우리가 어떤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승리나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처절하게 몰락하는 인간의 그 생생한 표정일 뿐이다.(“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중략)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2008)의 「책머리에」) 결국 승리나 성공의 짐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우리에게나 매여 있을 뿐이며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자 제갈량>은 최상의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순응하는 순욱, 반발하는 곽가, 종잡을 수 없는 가후, 여성 상위의 사마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제갈량까지, 이렇게 생생하면서도 빛나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일찍이 본적이 있던가.

 




死孔明 走 生仲達



게다가 글쓴이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여자 제갈량>에서의 패러디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울한 현실을 패러디에서 바꾸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성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반대로 이 작품이 선전물이 아니라는 증거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패러디의 우울’이 아니라 ‘현실의 우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위 글쓴이와 달리 ‘제갈량의 실패’와 ‘<여자 제갈량>의 실패’는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결국 제갈량의 실패는 곽가의 죽음이 보여주듯 노정돼 있고, 역사가 알려주듯 예정된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아직 <여자 제갈량>의 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힘이 아직도 왕성하게 커가고 있는 이야기를, 끝을 보았다며 조로증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우울’일 따름일 테다.

 



김시온(경영학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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